N.O.B by 연야린 # N.O.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 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온 몸을 죄여들어 오는 어둠. 미친 듯이 퍼 붇는 빗줄기. 폐 안 깊숙이 혀를 날름거리며 파고드는 퀴퀴한 악취에 나는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내 품 속을 한 번 더 더듬어 본다. 섬뜩하리 만큼 차가운 금속의 물체가 만져지자 나는 또 다시 키득거린다... 지금 웃고 있는 것은 누구? '나'? 머리 속이 어지럽다... 갑자기 떠오르는 기묘한 형상. 머리가 두 개인 뱀.... 서로 각자 다른 생각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몸뚱이는 하나. 미친 고양이의 눈깔 마냥 흐릿한 오렌지색 가로등 빛이 어스름이 비추어지는 외진 골목길. 고약한 악취가 진동하는 커다란 녹 빛의 철제 쓰레기 통 옆에서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낄낄거리는 나.... 분명 지금 주절주절 떠들어대며 혼란스러워하는 '나'와는 몸뚱이는 같을지언정.. 머리는 따로 노는 또 다른 뱀 대가리는 아닐까... 이런 '나'의 의미 없이 허공을 맴도는 상념은 무너져 내려버렸다. 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다. 호흡이 거칠어 졌다. 나는 지금 기다리고 기다리던 것을 발견한 것이다.... <두두두두두두두> 장마라더니..... 땅을 찢어발기기라도 할 듯 비가 내리고 있다. 웃지 않으려고 해도 입가가 저절로 벌어지고 있다. 마치 귀에라도 걸릴 양.... 안되지... 안돼... 얼마나 기다렸는데... 간만에 내 손에 들어온 장난감인데... 순간의 행복한 웃음으로 놓쳐버릴 수는 없지.... 나는 오른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끽끽끽> 막힌 입 속에서 쥐 울음소리와도 같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온다. 흠칫..... 장난감이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것이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길을 되돌아 나갈 까봐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찌찌찌찍>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는군.... 비를 피해 쥐새끼 한 마리가 내 쪽으로 달려오며 울어댄다. 신이 나를 도우사.... 기도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장난감의 얼굴은 사실 눈 여겨 볼 필요가 없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나에게 별 의미가 없다. 존재.. 그 자체만이 중요한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왜? 왜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지? '나'의 의문에.... 나는 대답하질 않는다... 긴 레인코트를 입고 있다.... 놀랍게도 하얀색이다... 하얀색... 기분이 좋아진다... 너는 제격이구나... 이런 날을 위해 하얀 레인코트를 입고 나오다니 말이야.... 키가 크다.... '나'보다 크다... 체격도 좋다... 운동을 하나? 레인코트 안에 감추어진 단단하고도 다부진 몸매를 상상할 수 있다. 적어도 '나'하나 쯤은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이건... 누구의 말? 나인가... 아니면 '나'인가.... 그가 천천히 걸어온다... 물웅덩이를 피하지도 않는다... 왠지... 그가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의 발걸음이 이 엿 같은 날씨만큼이나 우울하고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나'일까.... 그가 점점 다가온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인다... 흡족한 웃음이 나오려고 하지만 지금 웃어버릴 만큼 나는 어리석은 녀석이 아니다.. 잠시 후면... 잠시 후면 미친 듯이 웃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그가........ 그가........ 내가 숨어있는 어둠 속을 지나친다.. 그의 턱선이 살짝 드러났다. 분명 그가 이 쪽을 돌아본 것이다. <보일 리가 없는데... 보일 리가 없는데...> '나'는 안다... 밤 눈이 아무리 밝은 사람일지라 해도...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그는 돌아보았다... 그의 슬픈 듯한 미소는 '나'만의 착각일 것이다... 그래!!! 착각이다!! 나는 모른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지 간에 관심조차 없다. 나는 오로지..... 그것에만 몰두하고 있으므로.... <그것? 무...무엇을 하려는 것이지?> 나의 왼손이 품 안에 쑤욱 들어간다. 그리고 그를 향해 돌진한다. " 크하하하하하!!!" 나의 웃음소리가 골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비 소리와 섞인 그 웃음은 마치 악마의 것과 같다. " 죽어!!!" '나'는 그제야 내가 휘두르는 것이 작은 손도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람을 가르는 도끼날. 오렌지 빛이 반사되어 번뜩인다. <쩌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그의 머리에 박힌다. 살을 가르고 뼈를 쪼개며 하염없이 파고드는 그 불쾌하고 잔인한 느낌이 도끼날을 통해 그리고 손잡이를 통해 내 손을 강렬하게 타고 올라온다. " 죽어! 죽어!!!" 나는 희열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연신 도끼를 내려친다. 마치 방아질을 하듯 말이다. 사방으로 찐득거리는 살점이 튀어 오른다. 내 얼굴에 흠뻑 튀는 것이 비인지 피인지... 모르겠다. 상관없다. 피면 또 어떠랴. 이 끈적거리는 액체 덩어리가 피라면 또 무슨 상관이랴. 죽어라. 이 더러운 것아. 죽어라. 생명의 끈 따위는 멀찍이 내던져 내 앞에서 죽어버려라!! " ..............우.....야...." <....................> 이게 무슨 개같은 경우란 말인가... 머리통이 박살이 난 수박마냥 뭉개졌는데도... 입은 살아서 나불거린다는 것이 말이 되느냔 말이다... " 크하하하하하!!!" 정신 나간 놈. 나는 웃고 있다. 나는 분명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나'를 향해 말한 거야? " .....은.....우....야......." 이번엔 좀 더 정확히 들렸다... ...........'나'의 이름이다....... 그는 알고 있다.. '나'의 이름을 알고 있다. 머리의 절반은 으스러진 채 뇌수와 피와 비로 뒤엉킨 저 얼굴....... 어둠보다 더 새까만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 머리가 박살이 난 것은 '나'인가? 머리가 미친 듯이 아프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가슴이 타는 것 같다! 숨이 막힌다! 이 비명은 몸뚱이마저 둘로 갈라지는 뱀의 것인가? '나'는 안다.. 저 얼굴을 알고 있다.. 밤의 한 조각을 삼킨 듯한 저 눈동자. 가슴 속 저 안에서 울리는 깊이 있는 목소리.. '나'는 알고 있다. 그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어!!! " 으아아아아아아!!!!!"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뜨니 새까만 어둠이 아닌... 흐릿한 회색 빛이 천장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흐느끼며 이불 위를 구르듯 내려와 엉금엉금 기어 화장실로 향했다. " 우우우웩!!" 엊저녁 먹은 것도 없는데.... 나올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그러나 나는 변기를 붙잡고 연신 토악질을 해댔다. 머리 속을 떠나질 않는다... 도끼를 통해 내 손에 전달되던 그 생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하다.. 죽고 싶을 만큼 더럽고 끔찍한 악몽이다.... 게다가..... 그 얼굴.... 나의 이름을 부른 그를........ 나는 알고 있다... 최지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 빌어먹을 장마............" 어제 아침부터 시작된 장마... 기분이 나쁘다... 나는.... 비 오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장마는 다르다... 길고 긴 시간동안 끈떡지게 달라붙는 그 음울하고 축축한 기운에 나는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다... 마치.. 그것과 한 몸이 되어 내 존재마저도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 ...........제기랄." 엎친 데 덮친 격인가.. 나는 학교와 집 사이를 반쯤이나 걸어오고서야... 우산에 구멍이 뚫린 것을 알아차렸다... 우산의 댓살을 타고 물방울들이 연신 떨어지고 있다. 이러면... 우산을 쓰나 안 쓰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 놈의 악몽.. 그 개 같은 악몽... 정말 이 기분이라면 누굴 잡아 족치고 싶은.......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미친 새끼.. 정말 나는 미친 것 아냐?" 머리 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생각의 끄트머리를 낚아 챈 나는 마치.. 저기 저 공중변소 앞에 고인 빗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힌 기분이다... " c8!!!" 나는 냅다 소리치며 우산을 멀찍이 내팽겨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흘긋거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이 가질 않는다... 오늘의 나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이다... 늘..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신중하게... 행동하는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광분하여 날뛰는 내 뒤에 숨은 것이다... " ........." 순식간에 비를 쫄딱 맞아 흠뻑 젖고 나서야... 나는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데.... 눈에 띄는 짓거리를 하면 안되는데... 나는 그저 평범한 놈이란 말이야....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집에 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학교까지 반은 온 상태인데다가...... 평소보다는 일찍 집을 나섰으나 도로 집에 갔다가 등교를 하면 100% 지각이다.. 나는 모범생은 아니지만... 담임의 주의를 끄는 짓은 하기 싫다... 아프다고 둘러댈 수도 있지만... 그것은 곤란하다... 결석이라도 하는 날에는.... 선생과 아이들의 관심이 쏠려버린다... 몸이 아주 아프지 않는 이상... 학교는 나가야 하는 것이다... 담임은 내가 혼자 산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꼴 같지 않는 녀석 아무나 하나 골라잡아 집으로 보낼 것이 분명하기에... < 뚝뚝...> 나는 흘긋 내가 지나쳐 온 복도를 쳐다보았다... 물투성이다.. 어떤 놈이 주번일진 몰라도.. 욕 한번 걸쭉하게 늘어놓겠지... 안 젖은 곳이 없다... 속옷까지 다 젖어버렸다... 사물함에 넣어 놓은 체육복을 입는 수밖에...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체육 시간이 없다해도 공공연하게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의외로 많다... 학주에게만 걸리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역시.. 눈에 띄는 짓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드르륵>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손에 힘이 들어간 데로 문을 힘껏 열어 젖혔던 것이다. 얼굴은... 아마도 누굴 방금 죽이고 온 사람처럼 살기 등등했겠지.... 아...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비록 꿈속이기는 하지만 나는 분명 도끼로 사람의 머리통을 난도질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머리통이.... 박살난.... 상대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때... 과연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 ............." 나는 최면이 걸린 사람처럼... 그의 눈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 저 눈동자... 달도 뜨지 않는 깊고 깊은 밤의 한 자락을 집어삼킨 듯한... 저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내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늘 무표정한 녀석... 나는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에게 지금 당장 무릎을 꿇어 잘못했다고.. 내가 꿈속에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빌고 싶었다..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울며불며 그의 다리에 매달려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나는 늘 음침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듣곤 한다... 무표정하지만... 밝고 침착한 기분이 드는 저 녀석과는 달리... 나는 늘 어둡고..... 불안한.. 기분이 든다고... ' 누가 말했더라?' 아.. 은영... 내 여동생... 그녀가 그랬지... 그 날 이후... 나보고 그런 표정밖에 짓지 못하느냐고 화를 냈었지... 그 이전에는.... 생각하는 것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 오빠는 말야. 화난 척 해도 기분이 좋은 상태면 얼굴에 고스란히 다 나타나.. 그래서는 누굴 속일 수도 없다구...-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가 말해놓고서... 왜 네가 모르니... 이제 내 안에는 음침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아... 그러기에 그것밖에는 나타나질 않는 거야.......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평소와 다른 것이 보였을까... 용서받고 싶은 나의 마음이... 잠깐 이라도 나의 얼굴에 나타났을까.... 그의 눈동자가 일순간 흔들린 것은.... 꿈 속에서 그가 슬픈 미소를 띈 것처럼 느껴졌던 것처럼... 내가 원하는 나의 착각일련지도 몰랐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가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외면해 버렸다.. 계속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는 "널 죽이다니!! 용서해줘!!" 라고 정신병자나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내뱉으며 울부짖을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아마 10초만 더 바라보고 있었다면.. 정말 그렇게 소리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창가의 다섯 번째 줄인 나의 자리로 가 책가방을 열었다.. 안에 방수천이 덧대어 있어.. 책은 젖지 않았다... 그리고는 철벅철벅 물소리를 내며 사물함으로 가 체육복이 담긴 쇼핑백을 꺼내었다. <와르르륵> 쇼핑백 손잡이에 책들이 걸려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제까지 모아 놓은 프린터 물과 공책.. 문제집들이 배째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닥에 널부러졌다..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는 문 쪽의 사물함에 기대어 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 그래도... 도와주겠다고 오는 것보다야 났지....' 그랬다.. 도와주러 오는 것보다 이 편이 나았다... 최 지훈.... 고 2가 된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기말고사도 이제 끝나버렸고... 조금만 있으면...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데... 나는 그와 이제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처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것도 오늘이 처음이다... 꿈도... 오늘 새벽에 꾸었을 테니... 현실이 아닌 꿈 속의 상황까지 친다해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공부도 꽤 잘하고.. 운동은 더욱 더 잘하는 소위 만능인이다... 무표정하고.. 말수도 적은 데에 비해... 늘 그 묘하게 끌리는 밝고 편안한 분위기 때문인지.. 친구도 제법 많은 편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1학년 말에 전학을 와 아는 친구도 거의 없고... 더군다나... 안에 틀어 박혀 남과는 담을 쌓는... 다가와도 반응하지 않고... 외면해도 반응하지 않는... 이른바.. 목각인형 타입이다.. 목각인형... 그래.. 그것이... 지금의 반 아이들이 가끔 나에게 우스개 소리로 농을 건네는 말이다.. 그래도 눈에 띄는 짓 하지 않고.. 가식적이긴 하지만... 사회적인 면에서는 효과 만점인 필살미소를 잘 지어.. 아이들은.. 나를 별로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있어도 없어도.. 그만.........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존재감도 제대로 없는.. 이 인간을 눈여겨보겠는가..... 그러나 나는 학기초부터... 듣지 않는 것이 좋았을 말을 듣고야 말았다. 일부러 엿들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복도에서 교실에 남아있던 지훈과 그의 친구들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을 뿐이다... " ...그러고보면 은우는 참 잘 웃어. 은우 웃는 걸 보면 참 속 편한가보다 싶단 말야.." 앞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아마도 다른 이야기에서 갑자기 내 쪽으로 화제가 돌려졌겠지... " 말주변도 없고 사교성도 없는 녀석이긴 해도 애가 선해 보이지 않냐? 은우 웃음은 정말 천사같다니까. 환하게 방긋 웃는 미소가..." " 흥!" 그 때였다... 마치 두 녀석의 말을 비웃는 듯한 코웃음 소리가 들린 것은... " 어쭈. 니가 지금 우리말을 비웃냐?" 한 녀석의 웃음기 섞인 말을 뒤이어 낮고 조용하지만 그 듣기 좋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 너희들은... 그 애가 웃으면.. 그런 느낌이 드나보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 말이 전부였지만.... 나는 그 속에 담긴.. 그 알 수 없는.. 마치 '나는 그 속에 숨겨진 의미까지 알고 있어...'라는 느낌에 등골이 오싹했다. 아마.. 녀석은 꿰뚫어보고 있었나... 나의 이 단단하고 견고한 가면 너머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로... 나는 최지훈을 똑바로 바라볼 수도.. 그에게 나의 가식적인 웃음을 보여줄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한번도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은 없다... 아니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냥..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있는 듯한 그의 눈길에 늘 두려움과 불편함을 느낄 뿐이지.. 특별히 미워하는 감정을 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런 악몽을 꾸었을까... 꿈은 자신의 무의식을 세계를 반영한다는데.. 그럼으로써 욕구를 해소한다고 하던데.. 내 무의식 속에 억눌려진 욕구는 지훈에 대한 살의였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겨우 책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는데... 지훈이 자신의 사물함을 닫는 것이 보였다. 순간 눈이 또다시 마주치자 나는 얼른 눈을 피해버렸다. 자꾸만 떠오른다... 갈라지는 살가죽. 쪼개지는 뼈. 흥건한 피. 사방으로 튀던 뇌수... 손 안에 그 느낌들이 다시금 전해진다.. 갑자기 싸한 한기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앙 다물었다. " ......닦아."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하얗고 보송보송한 수건이 쥐어져 있었다.... ' 지훈은.... 태권도 부였지... 늘 수건을...' 나는 뜬금없이.. 지훈이 운동을 마치고... 그 하얗고 보송거리는 수건으로 땀을 닦는 것을 떠올렸다. 그 하얀 수건.... 그 하얀 레인코트... 새빨간 피가 묻어난다........................ 미친 것.. 미친 것... 나는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 " ........닦아. 감기 걸리기 전에...." 그가 다시금 말했다... 왠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살며시 감추어진 따스한 느낌에... 나는 또 다시 심한 죄책감이 느껴져 가슴 저 한 구석이 찌릿찌릿 저려왔다... " 고마워... 그리고.... 정말... 미안해..." 꽉 잠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뒷말은... 수건을 써서 미안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꿈 속의 일을 그에게 사죄하고 있었다.. 말이 끝나갈수록 목소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다른 누군가가 들었으면... 아마 잔뜩 겁이 먹었거나... 심하게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겠지... " ...........네 잘못이..........아냐............" 나는 순간 잘못 들었는가 싶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구? 너 설마 알고 있는거야? 내가 꿈 속에서 너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거야? 떠올랐다. 떠올라버렸다. 그의 그 느릿하고 무겁고.. 음울한 발걸음... 마치 나를 알아본 양 고개를 돌리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리고.... 머리가 산산이 으깨어져 죽은 채 내 이름을 불렀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흠뻑 젖은 채 흐트러진 앞머리를 타고 빗물이 흘러내려 눈 안에 흘러 들어간다.... 눈이 아프다... 눈이 아프고 흐릿해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다만.. 그는 한참이나 뜸을 들인 후에야 대답했다... " ..............비 탓이지...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내가 수건을 빌려줄 필요도 없었을테니..."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슬쩍 몸을 옆으로 비킨다... 아마도 얼른 가서 닦고 옷을 갈아입으라는 뜻이겠지... 그래.. 네가 알 리가 없지... 나의 꿈을 네가 무슨 수로 알겠어... 그의 곁을 지나치자... 희미한 담배냄새가 난다... 냄새....라고 생각하자.. 나의 콧속은 이미 비릿하고 역겨운 피비린내로 가득 찬다... 지랄 맞은 악몽 같으니... 미쳤어... 나는 미친 것이 틀림 없어... 오감들이 현실과 꿈의 경계선에서 교묘히 줄을 타고 있다니... 악몽 속에서만 가득하리라 생각했던 피비린내가 오늘 나를 하루종일 붙잡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서 흠뻑 젖은 옷을 다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선 다음... 그 하얗고 보송거리는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아냈다... 부드럽다.. 너무 부드러워서.. 나는 순간 기분이 아찔했다.. 향기가 난다... 섬유유연제의 향이다... 그리고... 가끔 지훈과 서로 지나칠 때.. 그의 옷에서 나는 향기이다.. 그 향기와 함께 지훈만의 체취가 떠오른다... 담배 향이 살짝 뒤섞인.. 그 만의 냄새... " 미쳤구나... 강은우... 정말 미쳤구나... 네가 무슨 스토커냐? 그 녀석의 냄새 따위를 기억하다니.. 이게 무슨 지랄염병 같은 짓이야..." 나는 화장실 벽에다가 머리를 부딪히며 중얼거렸다.. 벽에다 머리를 찧어가며 미친 사람 마냥 웅얼거리는 나의 목소리를 누군가가 들었다면.. 아마도 질겁을 했겠지.. 쿠쿠쿠... 웃기다.. 그래.. 이 미친 녀석이 내 본모습이다.. 어쩔래!!! 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수건으로 툭툭 머리카락에 묻은 물기를 털어가며 교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주번들이 와 있을테니까.. ' 그런데... 지훈이는 주번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일찍 온 걸까?' 지훈 역시 나처럼 아주 일찍도.. 아니면 지각하기 아슬아슬하게... 늦게 오는 것도 아닌 늘 중간 시간대에 온 다는 것을 아는 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일찍 왔을까... 왜 일찍 왔을까... 나는 정말... 편집증 환자처럼 오로지 그 생각만을 맹렬히 떠올리며 교실 안에 들어섰다. " 어라? 은우 와 있었네?" 이성혁... 그는 지훈과 꽤 친한 친구사이다... 나보고 천사 같은 미소를 짓는다고 한 녀석.. 그러고보면... 직감력은 별로 없는 듯 보인다... 내 웃음이.. 이 만들어 낸 것 같은 어설픈 미소가... 천사같다고? " 으응... 일찍 왔네..." 내가 늘 하던 대로 약간 주저주저하듯.. 작은 목소리로 숫기 없이 대답하자 성혁이 이를 씨익 드러내며 웃었다. " 응. 주번이거든. 그나저나 주번도 아닌 너희들은 왜 이렇게 일찍 온거야?" " .......남이사." 지훈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 은우야. 넌 우산 안 가지고 나왔냐? 왜 흠뻑 젖은거야?" " 아..아니.. 가지고 나왔는데.. 고장이 나서..." " 에구구.." 안됐다는 표정을 짓는 성혁에게 나는 나의 주특기이자 버릇이 되어버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순간 얼굴이 따가워 흘긋 옆을 돌아보니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지훈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 무표정한 것처럼 감추고 있지만 그 저변에 깔려있는 복잡하고도 치열한 감정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 눈빛에 나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왜 일까.. 왜 나는 저 녀석에게만은 고양이 앞의 쥐 마냥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걸까.. 늘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해야 되는 걸까.. 나는 얼른 미소를 감추고는 떠듬떠듬 지훈에게 말을 건넸다... " 저.. 오.. 오늘도 태권도 연습해?" " ...........아니." 그가 아주 간결하게 대답했다. " 왜?" 이런 미친 것... 거기서 왜란 말이 왜 나오는 거야... 그가 나한테 대답해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그러나 지훈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을 해 주었다. " 몸이 안 좋아.... 집에 가서 쉬려고...... 머리가 많이 아프거든........." ' !!!' 나는 순간 전기에 감전 된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리라니.. 왜 머리가 아픈 거야... 혹시 내가 네 머리를 부서 놓아..... 이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하고 있을 쯤... 그가 다시 대답했다. " ...........그래서 수건은 오늘 쓰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냥 줘도 상관없지만 미안하거든.. 네가 가져다가 빨아서 다시 가져오던가... 나야 아무래도 좋으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 그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 내.. 내일 가져올게.." " .............그래." 말하는 동안 나는 한번도 지훈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나를 쳐다보았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책상 줄을 맞추고 있던 성혁이 약간 장난스러운 얼굴로 지훈을 바라보던 것이 좀 의아했을 뿐이었다. " 참. 너희들. 그거 모르지." 갑자기 성혁이 섬뜩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며 목소리를 깔았다. " ............." 지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하여 대신 대답했다. " 뭐...뭔데?" " 오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말야.. 우리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거 아냐.." 의미심장한 목소리. 의미심장한 눈초리. 나는 하마터면 "이 새끼야!! 네 놈이 내가 한 짓을 엿보았지!!!" 라고 악을 쓰며 걸상을 집어 성혁에게 내던질 뻔 했다.. ' 멍청이.. 아직도 현실과 꿈을 구별 못하는 거야? 그것은 악몽이야.. 단지 악몽이었을 뿐이라구....' " 장난이 아니래. 누군가가 손도끼로 머리통을 완전히 으깨 놓았대.. 거의 머리통은 형체도 안 남았다고 하더라구. 으웩... 그거 맨 처음에 발견한 사람은 앞으로 밥 어떻게 먹는다냐..." " ............"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이것은 악몽의 연속인가... 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맞아. 그래.. 그럴 리가 없어.. " 새하얀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다는데 완전히 빨간색으로 물들었다고 하더라.. 주변이 피로 장난이 아니었대.. 그것도 하필이면 커다란 초록색 쓰레기통이 있는 골목 있지? 왜 그 끝이 막혀서 사람들이 쓰레기만 버리는 거기 말야.. 거기서 죽었다고 하더라... 거기는 워낙 사람들도 안 다니는데다가... 비명을 아무리 질러봤자.. 잘 안들리니까... 목격자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야....." 흰색의 레인코트...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 골목길. 그래 기억이 나.. 그 미친 고양이 눈깔 마냥 빛나는 오렌지 색 가로등이 멀찍이 서 있는 그 골목길 말하는 거지? 당연히 알고 말고.. 어떻게 아냐구? 쿠쿠쿠. 바로 내가 거기에 있었거든. 품 안에 손도끼를 감춘 채... 장난감을 기다렸다가 미친 듯이 휘둘러댔지. 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던가? 꿈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악몽이었단 말이야!!!!!!!! 나는 균형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그렇게 토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지럽다... 주변이 뱅뱅 돈다.. 갑자기 사방이 그 가로등의 어둠침침하고도 기괴한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간다.. 지훈이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는 것이 흐릿하게 보인다.. 나의 눈은 이미 제 기능을 잃고 있었다.. 왜 일어나는 거야? 왜 나에게 다가오는 거야? 내가 너를 죽여서... 보복하려는 거지? 그래.. 그렇지.. 너는 지금 살아있는 것이 아닌 거야.. 내 손이 닿으면 넌 곧 흐물흐물 녹아내려 뼈만 남겠지. 주변에는 온통 살과 피... 나는 간신히... 성혁을 향해 몸을 돌려 묻는다........ " 죽은 사람은.. 우리 또래의.... 남자지?" 내 귀에 들리는 나의 목소리가 참으로 웃긴다.. 벌벌 떠는 것 같기도 하고..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다... " 아니. 20대 후반의 여자라던데?" 쿡. 교실바닥이 나를 향해 덤벼든다. 그래 덤벼라. 이 자식아..... 날 좀 어떻게 해줘. 이 악몽에서 영원히 깨어 버리게 날 좀 누가 도와줘......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끼끼끼끼......." 이건 또 어디서 들려오는 괴상망칙한 웃음소리란 말인가.... 눈 앞이 보이질 않는다. 오로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귀........ 아주 미세한 소리도 머리 속을 웅웅 울릴 만큼 확대시키고 있다... " 재미있었어.. 아하. 재미있었어... 또 하고 싶어.. 또 하고 싶어..." 나는 기이하고도 뭉개진 바퀴벌레 마냥 징글징글한 목소리를 들으며 "뭘?" 이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황당하게도... 나는 이미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목구멍을 통해.. 내 성대를 통해.. 내 혓바닥을 통해... '내'가 아닌 내가 이미 말을 하고 있었다. " 이번엔 또 어느 장난감을 골라볼까? 끼끼끼끼..." 빌어먹을!! 또 그 짓거리를 하겠다는 거냐? 그 인디언들이나 가지고 다닐 법한 낡은 손도끼를 휘두르며 또 누구의 골통을 부셔 놓으려고!! < 은.... 우.... 야.....> ...... 이것은... 죄책감이 들려주는..... 환청일까? ..............................지훈아................... 지훈아.. 제발 저리 가 버려라. 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려라... 저 놈이.. 아니.. 저 놈은.. 바로 나지... 내가 너를 또 죽이려나 보다... 나 그 짓... 또 다시 못해... 그러니 내 주위에 얼씬도 하지 마... 억지라는 것 알아... 쿡.. 네가 내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머리 속에서 널 떠올리면 그만인 것을... 그러면 그날 밤 나는 또 네 머리를 신나게 부수어 놓겠지... 이게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짓거리야... 어제까지도 말 한마디 나누어 보지 못한... 그저 가끔 스쳐 지나치기만 했던 같은 반 녀석을... 어째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느냔 말이야... < 은우야........>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어찌나... 애달프고... 다정한지... 나는 나를 가로막는 어둠을 손톱 끝으로 갈라대며 미친 듯이 헤집고 달려가 그에게 덥석 안기고 싶었다.... 지훈아.. 나 좀 도와다오...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하도록 네가 좀 말려다오.... 너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잖아.. 태권도도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또 너에게 달려들어 도끼 들고 설치거든 한방에 날려다오... 응? < 은우야. 일어나.> 이번에는 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아까와 같이 한 없이 다정하고 서글픈 목소리는 아니었다. 안개에 파묻힌 듯... 불분명한 감정과 조금은 삭막한 목소리... 그것은.. 이미 내가 눈을 반쯤 뜨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눈은 뜨고 있지만 난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차츰차츰 사물의 형태가 눈에 익기 시작한다... 싸한 소독약 냄새... 알콜 냄새.... 양호실이었다... " .................정신이 드니?" 무뚝뚝한 말투에 고개를 돌려보니.... 지훈이 서 있었다. 차가운 얼굴. 한 겨울에 서걱서걱 얼어붙어 가는 호수 마냥 싸늘한 눈동자.. 아마 비몽사몽간에.. 들은 목소리는 또 다시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웃겨... 아주 웃겨...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단정짓고... 꼴불견도 이렇게 꼴불견일 수가 없다.... " ..........남자 녀석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기절까지 하다니... 보기보다... 강하지 않은 거냐... 아니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냐......" 나는 몽롱한 기운에 취해 있다가 지훈의 말에 뺨 주위가 오싹해짐을 느끼며 침대에서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위 속에 든 물들이 또 세상 구경하겠다고 아우성을 쳐댄다. 마른 침을 억지로 삼켜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며 나는 나름대로 그의 말을 분석해본다... 보기보다 강하지 않냐니... 그렇다면 지훈은 날 강하게 보았다는 뜻일까.. 세상 천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비리비리 약해 빠진 생선가시 같은 놈이라는 것은 아니다... 키도 기본적으로 170 센티미터는 넘겼다... 근육질은 아니더라도... 뼈만 앙상하고 살가죽만 들러붙은 놈도 아니다... 허나.. 내가 강하게 보인다는 말을 들을 수 없던 것은... 늘.. 생기 없는 허약한 인상 탓일 것이다... 배시시... 웃는 얼굴... 춧점 없는 몽롱한 눈빛... 그리고 내 몸 여기저기서 풍기는 나태함과 허무함의 악취가... 은연 중에 작용하는 것일지도... 쿡... 이렇게 되기 전에는.. 나도 가끔.. 남자답다.. 잘 생겼다.. 라는 말을 듣곤 했다.. 사람은 변한다... 얼굴이라는 것도... 마음을 어떻게 먹기에 따라 변한다.. 강하다라.... 지훈은... 나의 어디를 보고 그렇게 느꼈을까... 하지만... 나의 마음은 바로 그 뒷말에 혼을 빼앗겨 버렸다.. -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냐 - 그게 무슨 말이지? 무슨 뜻으로 한 말이지?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기절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이야기란 말일까.... 가슴이 뜨끔 한다... 분명히 알 리가 없을 텐데.. 저 녀석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 트...특별한 이유라니?"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어투로... 그러나 나의 머리 속에는 온통 번뜩이는 도끼날과 흥건한 핏덩어리로 가득 차 있다... 되묻자 지훈은 약간 묘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또 마주쳐 버렸다... 난 저 눈이 무섭다. 두렵다. 불편하다... 기분이 묘한 것이... 숨이 콱콱 막혀온다... 까닭 없이 불안한 마음...... " .....모르면 됐어...." 그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나는 덩달아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쫓았다... 아직도 억수로 내리는 비... 저 비는 도대체 언제 멈추게 될까... 지금 당장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겠지... " ..........담임에게는 내가 말해 놓을 테니... 한숨 자고 올라와........." 지훈이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 으..응." 왠지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가 자라고 해서 자면... 적어도 악몽 따위는 꾸지 않게 될지도 모르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웃긴다.. 확실히 나는 제정신이 아니다.. " 그런데.............. 어째서... 죽은 사람이 남자라고 ... 생각한 거지?" 양호실 문을 나서던 지훈이 물었다... 그는 문 쪽을 향해 서서 나에게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에.. 나는 또 다시 그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본다고 해도... 그가 왜 그 질문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중을 파악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기 그지없다... " 그....그냥.. 희생자가... 여자라고... 생각하기는... 너무.. 끔찍해서......." 나는 생각나는 대로 입에 주워 올렸다. " ...........그래." 지훈은 그 말 한마디만 하고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문을 나서며 나직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악몽 따위는 꾸지 말고........ 푹 잘 자...." <딸깍> 양호실 문이 닫혔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닫혀진 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길.. 최지훈.. .너 독심술 하니? 어째서...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역시.. 너에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짜증이 났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있다. " 예. 강은우입니다." " 자고 있었던 거야?" " 아.. 은영이구나..." 나의 동생. 나의 사랑하는 여동생 은영이.. 그러나 나는 은영이를 두고 도망쳐 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은영이가 나를 버렸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나는 여기서... 이 삭막하고 좁은 옥탑 방에서 굶주리며 혼자 살고 있고.... 그녀는 증오스러운 아버지와... 나보다 겨우 8살 많은 재수 없는 여자와 60평 짜리 넓디넓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쓰며 살고 있다... ' 너는 어머니에게 미안하지도 않니?' 라는 말이.. 언제나 은영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 버린다.. 분명 그녀는 이렇게 대꾸하겠지.. " 엄마가 하늘에서... 과연 오빠처럼 집안에 적응 못하고 뛰쳐나와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을 바랄까? 아버지는 돈 많아. 난 아버지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돈은 좋아. 쓰고 싶은 것 쓰게 해 주니까 그냥 옆에 붙어 살아주는 거야. 그 여자도 마찬가지야. 내 눈치 슬슬 보며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하는데 내가 구태여 오빠처럼 집안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박살내고 미친개처럼 발광을 한 뒤에 집을 나가길.. 바라 실까? 사실.. 말이 좋아 오빠가 집을 나온 것이지.. 말은 바로 하라고... 쫓겨 난 것 아니야?" 잔인한 년... 하지만 고것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말 할 아이다... 하지만.. 난 그 애를 사랑한다.. 내 하나뿐인 여동생.. 그리고 그녀 역시.. 나를 하나뿐인 오빠로 사랑하고 있겠지.. 비록 같이 살고 있지는 않아도 우리는 오누이 인 것이다... 그리고 서로 떨어져 산다는 것이 오히려 그 애틋한 정을 한층 북돋아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 왠일이니? 네가 전화를 다 해주고. 황송하구나." 말이 삐딱하게 나간다... 연 4일 동안 계속 내리는 비 탓이랴... " 일요일인데 전화도 못해?" 그래. 너 역시 내 동생이라고 무척이나 상냥하게 되받는구나... " 그래... 오늘이 일요일이었네..... 쿠쿠쿠.." 잠을 못 잔 탓인지...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엊그제... 양호실에서 단잠을 자고 난 뒤에는 한숨도 자질 못했다... 온 몸이 자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사실 회백색의 뇌는 자고 싶어 못 견뎌 하고 있는데... 다른 모든 신체가 협조하고 있질 않다... 잠이 들 만하면... 심장이 까닭 없이 두근거리질 않나... 근육들이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지 않나... " 잠 못 잤구나......." 은영이는 안다.. 내가 잠을 못 자면... 정신병원에 끌려가기 딱 좋을 상태를 하게 된다는 것을... "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 꼭 무슨 일 있어야 전화하나... 뉴스 봤어... 신문도 봤다구..." " 나무꾼 이야기 말하는구나..." " 나무꾼이라니?" " 그 도끼 들고 설치는 놈 말야..." " .............꼭 그렇게 말해야 해? 나무꾼이라니..." 나의 삐딱선에 은영이 조금 심술이 난 모양이다. " 미안해. 은영아.... 오빠 이틀 째 못 자서 그래...." " 그럴 줄 알았어... 잠귀신이.. 잠을 안 자니까.. 그 모양이지..." " 그래.. 그런가 보다." " 오빠............" 갑자기 은영이의 목소리가... 진지해진다... 좀 전의 심드렁함도... 나와 맞장구 치던 삐딱함도...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렸다... 은영이는 지금 하려고 하는 이 말 때문에 전화를 했을 것이다.. 나는 숨죽이고 가만히 듣기로 생각했다. 은영이는 절대로 허튼 소리를 늘어놓는 아이가 아니다... 내가.. 지금처럼 변하기 전의 모습과 가장 흡사한... 모습을 꼽으라면.. 지금의 은영이.... 나는 은영이가 좋다.. 내 잃어버린 자아의 일부 같다고 수도 없이 되뇌어왔다. " 오빠.... 꿈에... 엄마가 보였어... 그리고 오빠도 보였어... 기분이 안 좋아.. 오빠... 무슨 일 있는 것 아니야? 엄마가 .... 돌아가신 엄마가 저 멀리서 쪼그리고 앉아있는 오빠를 가리키며 나에게 뭐라고뭐라고 하시는데 울고 계셨어... 울고 계셨다구.. 나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그저.. 오빠만 .. 오빠 이름만 계속 불렀는데... 오빠는 뒤를 안돌아보더라구... 마치 귀머거리인 것 마냥... 아니면 오빠가 아닌 것 마냥..." 등골이 오싹했다... 척추를 따라 식은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 어머니.. 어머니도 알고 계신 예요? 제가 꿈 속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셨던 거예요?' " 글쎄... 아무 일도 없어...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야..." " 오빠......" " 정말이야. 아무 일도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 알았어... 그럼 그런 줄 알고 있을게. 하여간 조심해.. 알았지? 그리고.....잠 좀 자둬..." " 그래..... ...........은영아." " 응?" " 오빠가 너 얼마나 예뻐하는 지 알지?" " 응." " 미안해... 오빠 멋대로 너 혼자 거기 둬서..." 난 반년 째 이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은영이도 이제는 제법 지겨울 만도 할텐데.. 변함없이 웃음 띈 목소리로 다정히 대답한다... " 오빠가 데려간다고 해도 난 안 갔어..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나 먹여 살릴 수 있게 되면 그 때 갈게... 가게 되면 기념 선물로 빨간 스포츠 카도 하나 사내야 되는 것 잊지마..." " 응. 잘 지내." " 오빠도 잘 지내." <뚜뚜뚜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끊어버린 은영이 조금은 매정하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난 한번도 남보다 먼저 끊어 본 적이 없다... 이런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하는 것은 왜 일까... 그래.. 잠이 부족해서 일거야... 자야 해... 자야 해... 나는 옥탑 방의 조그마한 창으로 밖을 내다본다... 여전히 진회색빛 구름으로 숨막힐 듯 뒤덮인 하늘... 그 사이로 쉴 새없이 쏟아지는 빗줄기.. 굵기도 하다.. 빗줄기가 굵기도 하다... 창을 깨부수어 버리고 싶다는 듯 거세게 두들겨 댄다. 나는 매트리스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자고 싶어... 정말 자고 싶어.... 악몽을 꾼다 해도 좋아... 단 5분이라도 편히 잘 수 있다면... "자고 싶어... 자고 싶어.. 악몽을 꾸어도 좋아.. 자고 싶어..." 나는 그것이 주문이라도 되는 양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중얼거렸다. 천장이 흔들흔들 주저앉는 것 같다... 악! 비 때문에 결국 천장이 무너지는 건가? 망할 집주인! 이런 것도 방이라고 빌려 주냐!! 라고 고함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이 들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나는 기꺼이 수마의 손에 몸을 맡겼다.. " 재미있었어.. 아하. 재미있었어... 또 하고 싶어.. 또 하고 싶어... 이번엔 또 어느 장난감을 골라볼까? 끼끼끼끼..." 멀리서... 아주 멀리서... 끼끼끼 거리는 괴상한 웃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에게 속삭인다... 이 새끼야... 잠 좀 자자... 잠 좀 자게 내버려 둬. " 끼끼끼.... 그래... 골랐어.. 골랐다구....." .............맙소사..... 이걸로.... 두 번 째인가...............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허억... 허억.. 허억..." 이 짐승 같이 거친 숨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바로 나의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또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다만 즐기기 위해 여기에 와 있을 뿐... 기다리고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유희를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여전히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다. 차가운 빗줄기. 그리소 싸늘히 식어 가는 나의 피부. 그러나 그 와중에도 또렷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불덩이라도 실어 나르는 듯 이글거리는 나의 피... 그래.. 나는 지독히도 흥분해 있다. 오늘도... 비에 흠뻑 젖은 채 끼득끼득 거리며 나에게 소름이 돋을 만큼.. 너무 좋아서 육두문자를 남발하고 싶은 만큼 상쾌한 유희를 제공해 줄 장난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일단... 나는 더럽기 그지없는 물웅덩이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쯤이야...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즐거움을 위해 이 정도 더러움을 참는 것은 일도 아니다.... <또각또각> " !!!" 멀찍이서 들려오는 구두 소리에 나는 하마터면 환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찾았다... 찾았어... 나는 안다. 구두 소리만 들어도 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해 줄 존재를 감으로 느낄 수 있다. 그래. 와라. 아름다운 나의 장난감아. 얼른 와라. 부단히 움직이는 두 개의 젓가락 같은 다리몽둥이를 바삐 놀려라. 나에게... 와라.. 어서 와라... 오늘도.... 함께 놀아보자꾸나... < 무엇을 하고 논다는 거야?> '내'가 묻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미 이것은 경험해 본 일이다........... 언제? 어디서? 비슷한 상황. 비슷한 물음. '나'는 그가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묻고 있다. 왜?????????? 모르겠다. 그래.. '나'는 듣지도 못할 대답을 왜 물어보는 것일까? 그것은..... 나와는 달리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지 전혀 알 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느껴지는 것은 앞으로의 일에 잔뜩 흥분해 당장이라도 펑하고 폭발하며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 같은 나의 신경세포 하나하나와 까닭 없는 즐거움이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조차 '나'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한데... 어째서 '나'는 나와 같이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덧없는 생각일 뿐이다... '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끼끼거리며 혀를 날름거리는 나의 뒤에 숨어 이 상황을 그저 함께 지켜볼 뿐이다. 아니... 그저 함께 즐기고 싶은 것 아닌가? 기억만 해낸다면.. 지금 '나'에게 내면 깊숙이 묻어 놓은 기억의 상념들을 하나씩 끌어내어 늘어놓는다면.. 나는 충분히 지금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 상황들이 익숙한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왜 드는가. <쩌정> 머리 속에서 거대한 물체가 갈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주위로 노오란 미친 고양이의 눈깔이 빙글빙글 춤을 춘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리자 드러나던 턱선... 입가에 맴돌던 슬픈 미소. ..........그리고 그의 목소리....... < .................................ㅜ.......야......> 그래.... 그래.. '나' 당신을 알아... 그런데... 당신은 누구지? 기억이 날 듯 말듯해... 난 알아........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당신 누구야....... 누구지........ 누군지 몰라도 '나' 좀 도와주지 않겠어? 도와 줘........... 제발... 나 좀 도와 줘............. 이 미쳐버린 녀석에게서 '나'를 꺼내 줘... '내' 영혼을 꺼내 줘... '나'를 구원해 줘.......................... 그러나..........'내'가 이렇게 절실히 도움을 바라는 이유를 왜?..........................라고 묻는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왜 도망치려 하는가... '나'는 왜 도와달라고 애원하는가.......... 그러게 말이야... 그럴 만한 하등의 이유도 없는데.......... 쿠쿠쿠... 갑자기 등골이 오싹오싹 거린다... 무서워서가 아니야.... 저것이 거의 다 왔기 때문이야... 예상했던 대로 그것은... 더러운 물구덩이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유심히 쳐다보지 않아. 아마도 흔하디 흔한 비렁뱅이로 생각했나보지... 발소리가 점점 다가와....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시계 초침소리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아주 유쾌하다. 그래. 울려라. 시계에 대롱대롱 매달린 종아. 울려서 그에게 죽음이 다가왔음을 알려다오.... <죽어? 누가 죽는다는 거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또 묻는다... 그런데............ 우습게도 구두 소리가 멈춘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들어서는 안 된다. 얼굴을 보였다가는... 지금 웃음을 참지 못해 어릿광대 마냥 기묘하게 뒤틀린 나의 얼굴을 본다면 그는 분명 달아나 버릴 테니까... 왜 멈춘 거야? 네가 대답해 줄 거야? 응? 응? 무릎에 거의 파묻은 고개를 살짝 들어 몰래 눈을 치켜 뜨니 그의 구두가 보인다... 하! 웃긴다... 백구두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도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번질거리는 백구두라니.. 그가 다시... 움직인다... 아마도 대답을 해 주지 않을 작정인가보지? 쿳. 그래. 네가 뭘 알겠어...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나는 그제야 슬쩍 몸을 일으켜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백구두라... 깨끗하고 잘 닦여진 백구두라니... 제격이야.. 너야말로 제격이야. 오늘을 위해 특별히 그 구두를 신었으니까... 나는 붉은 혀로 입술을 낼름 핥으며 천천히 그를 따라 걷기 시작 햇다. 아... 맛이 짭짤하다. 간이 딱 되어 있구만.............................. 이라는 느닷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갑자기 저만치 앞서가던 그가 훽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제기랄!!! 제기랄!!! 어째서 돌아본 거야? 어째서 돌아본 거야? 이대로 놓치는 건가? 이대로 말야? 신중하지 못했어.... 신중하지 못했다구!!! 너무나 당황하여 화장실에라도 가고 싶었다. 으윽.. 초조함과 긴장감에 질질 싸버릴 것만 같아. 젠장. 이렇게 빨리 뒤돌아보리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 어째서 돌아봤냐구? 몰랐어? 그는 알고 있었어......... 그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 '나'의 자조 섞인 말을 귀담아 경청할 인간이 아니다. 나란 인간은....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진다. 나는 토끼를 쫓는 사냥개의 심정으로........................라고 말하고 싶지만 비유가 그렇다는 것이지 정말 사냥개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모른다... 그를 뒤쫓기 시작한다. 우스운 것은 도망가는 자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공포와 두려움. 초조함으로 온 몸이 굳어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석화의 주문에 걸린 양.. 차츰차츰 굳어져 나중에는 뛰는 것인지 걷는 것인지조차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쫓는 자의 입장은... 처음에는 다급하고 놓쳐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속도가 나질 않지만.. 적절한 흥분과 열기는 온 몸의 근육을 활성화 시켜 평소보다 몇 배의 운동량을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공포영화에서.. 어설픈 인물들이 모두 도망다니다가 어처구니없이 잡혀 죽임을 당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까? 두려움에 떨며 쫓겨 보았는가? 아니면 므흐흐흐... 괴기스러운 웃음을 흘러가며 쫓아 본적이 있는가? 물론 주인공들은 살더라.... 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지금 도망가는 하얀 구두의 인형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커녕 초반부에 이름도 없이 사그라지는 희생양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 이 칠흙처럼 깜깜한 어느 한 동네의 외지고 음습한 골목길에서만큼은 바로 내가... 내가 영화 속의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나는 놓치지 않는다. 놓칠 리가 없다. 입에서 흥얼흥얼 노래가 흘러나온다. 악어떼를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지나서 가자~♪ 늪지대를 지나서 가면~♪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가사가 맞는 지 틀리는 지 알게 뭐람. " 크크크크크크" 나는 일부러 발소리를 더욱 더 크게 울리며 그를 뒤쫓기 시작한다. 그는 단단히 겁을 집어먹은 것이 분명하다. 마치 "나를 잡아 먹어주시오."라고 하는 것 마냥 그의 도망가는 발걸음은 느릿하기만 하다... 그가 갑자기 어느 골목길로 꺾어 들어간다. 놓칠 소냐... 나도 재빨리 골목을 홱 잡아 돈다. 그러자 어느 작은 뒷문에 매달려 열쇠 꾸러미로 열심히 문을 따고 있는 그가 보였다. " 음훼훼훼....." 나의 입에서 정상적인 사람의 웃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문의 손잡이를 움켜 쥔 채 나를 돌아본다... 머리 바로 위에 작은 백열등이 끽끽거리며 흔들리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백열등의 불빛으로 붉은 오렌지색으로 반짝이는 구두뿐이다. 나는 왼손을 품안에 넣어 뭔가를 딱딱하고 가느다란 손잡이를 움켜쥔다. 그리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꽈앙> " 으아아아아악!!!" 비명을 지른 것은 그가 아닌 바로 나였다. 제길! 제길! 아..아프다. 팔뚝이 끊어질 것만 같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문을 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회를 노렸던 것이 분명했다. 얍삽한 새끼. 잔머리나 굴리다니. 내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재빨리 문을 열고 몸을 피한 뒤 나의 손이 문안으로 들어오자 있는 힘껏 쳐 닫은 것이다. " 제기랄!!! 죽여 버릴테다!!!" 감히!! 감히!!! 네가 감히 나에게 이 따위 짓을 해? 좋아. 이 버러지 같은 것. 네 골통을 부수어 버리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죽여 주마. 더더욱 잔인하게 죽여주마. " 우헤헤헤헤... 끼끼끼끼." 나는 쇠문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나의 피를 바라보며 아주 즐겁게 웃었다............. 우라질! 뭐가 즐겁단 말이야! 나는 하나도 즐겁지 않다. 웃고는 있지만 간신히 살려놓은 똥개새끼에게 뒷덜미를 물린 듯한 배신감으로 머리가 터져 머릴 것만 같다. 하마터면 팔뚝이 끊어질 뻔 했단 말이다! 벌을 받아야 해... 너는 벌을 받아야 해... 아주 그 벌을 톡톡히 받게 될 거다. 문을 거세게 열어 젖혔다. 이런~ 이 뒷문은 큰 음식점의 뒷문이었던 모양이었다. 레스토랑 급 허연 주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온통 하얀 타일. 신난다. 신이 난다. 이렇게 즐거울 수가!! 온통 하얀 벽과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주방용품들과 냄비들. 하얀 식기들. 아무래도 그 놈은 여기서 일하고 있던 주방장이었나 보군... 이봐. 맨 날. 주둥아리에 음식이나 쑤셔 넣으면서 음식에 대한 험담이나 늘어놓은 사람들에게 해다 바치는 것도 지겹지 않나? 오늘은......... 그래. 오늘은 푹 좀 쉬라고. 내가 너를 요리해 줄테니.... 놈이 홀로 통하는 듯한 문을 따기 위해 또 열쇠 꾸러미를 뒤지고 있다. 어쭈... 이번에는 안 놓쳐...... 얼른 왼손을 품 안에 집어넣어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인디언 전사 마냥 멋들어지게 도끼를 날렸다. <퍽> " .........." 도끼날은 그의 등에 빨려 들어가듯 박혔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열쇠 꾸러미가 바닥에 떨어지면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이상한 것은... 분명 그는 미친 듯이 입을 벌려대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데... '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 돼지 새끼처럼 그만 좀 꽥꽥대!"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그렇다면 저 사람의 비명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닌 나인가? 여하튼..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까닭에 '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햇다. 뭐.. 어떠랴. 그의 얼굴 따위 봐서 무엇하랴. 지금은 모델 감상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가 뒹굴 때마다 하얀 타일 바닥에 피칠갑이 더해진다.. 마치 그는 거대한 붓이라도 되는 듯 바닥에 아라베스크 문양을 아름답게 그려 놓는다. 나는 하마터면 그의 노고에 감동하여 그가 내 팔뚝을 뭉개 놓았다는 사실을 잊을 뻔 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열쇠 꾸러미를 들어 올렸다. "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심심해도 참으라구." 그리고 뒷문으로 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아.. 이제 완벽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쉰 채 바닥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그에게 벌을 줄 물건들을 찾는다. 도끼 따위는 부족하다. 저 자식에게는 더욱 더 어울리는 것을 써야 한다. 그 순간 내 눈에 띄는 것은.. 깔끔하게 닦여져 있는 스푼과 포크 꾸러미다... 오호라. 신이시여.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저에게 응답을 주시나이까. 나는 반들반들 닦여진 뭉치 속에서 딱 스푼 하나와 포크 하나를 집어들었다. 지문 따위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이미 가죽장갑을 끼고 있으므로... 뭐.. 즐거움이 덜 하거나... 늘 습기가 안에 차기 때문에 찝찝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필히 지켜야 할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이다. " 너..... 감히 내 팔을 이 지경으로 해 놔?" 나는 피가 질질 흐르고 있는 나의 팔뚝을 들어 그의 코앞에 흔들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머리를 파묻은 채 반응도 하지 않는다. 그래. 꽤 재미있는 반응이로군. 나는 죽은 개구리 마냥 납작 엎드려 있는 그를 흥미롭게 관찰한다. 하얀 손... 매끈한 하얀 손이 타일 위로 쭈욱 펼쳐져 있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포크를 들어 그의 손등 위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킥. 이것은 마치.. 중학교 때 과학실험의 한 종류 같다... 바로 반응이 온다. 그는 몸을 움찔하더니 이윽고 두 다리를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발을 들어 그의 등에 박혀 있는 도끼를 지긋이... 아주 지긋이 자근자근 눌러준다. 도끼날이 살을 가르고 척추에 박히는 것이 발바닥을 통해 느껴진다. 제길... 신발과 양말을 모두 벗어 던지고 맨발로 그 느낌을 느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나는 허리가 망가져 버린 장난감을 벽에 다 조심스럽게 앉혀 놓았다. 흠뻑 고인 피 때문에 두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다. 어차피 묻은 피는 밖에 나가 미친 듯이 퍼붓는 빗 속을 한 두 시간 걷고 나면 다 씻겨 내려갈 터이지만 그래도 피 웅덩이에 뒹구는 것만큼은 삼가 할 일이다. 갑자기 그 자식의 얼굴을 보고 싶다... <왜?>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은 '나'인가.. 나인가... 혹시 그가 '나'의 의문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나는 그저 죽음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그 얼굴 자체가 보고 싶을 뿐이다. 어차피 사람 얼굴이라 하는 것은 눈 두 개요 코 하나요 입 하나이다. 간혹 그 수가 모자라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지. 그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나는 조심스럽게 쪼그리고 앉았다. 6c랄... 오늘은 완벽한 장소를 제공받는 대신에 내가 수난을 당해야 하는 날인가보다.. 그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자식이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 아아악! 이 새끼! 이거 못 놔!!!" 내 머리를 민둥산으로 만들 작정을 한 모양인지 미친 듯이 잡아당긴다. 제기랄!! 아프단 말이다!!! 그 놈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내 머리를 자신의 얼굴께로 끌고 온다.. 죽기 살기 작정한 탓인지 힘이 엄청나다. <두두둑> 제기랄. 머리가죽이 벗겨지려 한다. " ..................우......야." 뭐라고 지껄이는 게냐? 순간 명치 한 가운데가 써늘한 것이 얼음 덩어리가 와 박힌 기분이다. 분에 못 이겨 버둥거리는 내가 그런 느낌을 받았을 리 없다... 지금...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내가 아닌 '나'일 것이다.... <알아... 이 목소리 귀에 익어.... 귀에 익어... 나는 당신을 알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둘 달린 뱀.... 그 뱀 대가리 중 하나는 이제까지 비몽사몽 꿈 속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지금은 깨어날 때인가? 그럼 나를 깨우는 당신은 누구지? " 이 새끼야!!! 이거 못 놔!" 격분한 나는 쥐고 있던 숟가락에 온 몸의 무게를 실어 그의 명치 한 가운데를 푸욱 찔러넣는다! 쉽사리 들어갈 리가 없다. 상상도 못할 것이다. 인간의 가죽이 얼마나 질긴지 아는가? " 오징어 뒷다리보다 더 질겨." 비단 이 자식의 살가죽뿐만이 아니다. 그의 무지막지한 힘에도 내 두개골과의 연을 끊고 떠나기가 싫어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 나의 머리가죽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르 떨고 있다. 손아귀의 힘이 더 들어간다. 그가 우악스럽게 한번 더 나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 " 이 새끼야!!! 놓으라고 하잖아!!" 놓으라고 해서 놓으면 살려줄테냐? 이건 '나'의 말이 분명하다. 내가 듣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만약 들었다면 '내' 입을 찢어 놓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아니 자기 입을 찢어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노여움이 나의 몸을 낼름낼름 핥고 지나간다. 앙 다문 입 사이로 빠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흘레 붙은 수캐 마냥 몸을 앞뒤로 흔들며 숟가락을 더 쑤셔 박는다. 아니 여기는 보아하니 한식집이 아니지. 정정한다... 나는 스푼을 더 쑤셔 박는다. <우두둑> 뭔가가 갈라지고 부러지는 듯한 유쾌한 둔탁음과 함께 갑자기 숟가락 아니 스푼이 쑤욱 들어간다. 빌어먹을! 아름다운 대한민국. 스푼이고 나발이고 숟가락이 쑤욱 들어간다. 하마터면 그 놈의 가슴이 내 손까지 집어삼키는 줄 알고 순간 당황했다. 그의 손에 힘이 빠져 간다. 나는 승리감에 도취되어 미친 듯이 웃어댄다. " 크하하하하!! 죽어라! 이 더러운 것아! 죽어버려! 이 새끼야! 내 앞에서 죽어버려!!" " ..................은....우......야." 속삭인다. '나'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비릿한 피냄새와 함께 따스한 숨결이 나의 귓바퀴를 감싸고돈다. 그리고.. 금속성의 이 비릿한 피 냄새 사이로.. 갑자기 다른 무언가의 향이 연상된다.. 알싸한... 그리고 흐릿한... 담배 냄새.......... 그 사이로 스며드는.... 향긋한...... 그래.. 향긋한 섬유유연제의 향기... 보송보송..... 하얀 수건.... 건네던 손.... 나를 바라보는 밤의 눈동자............................ <지.....훈?>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온다. 아니 내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아니....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 일련지도 모르지. 꿈 속을 헤매던 뱀 대가리는 이제 눈을 떴다. 다른 한 쪽에 질질 끌려가던 자신의 머리를 발견한 것이다. 가시밭에 스쳤는지... 모가 난 조약돌 밭에 끌렸는지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 죽어!!! 죽어!!!" <하지마!!! 멈춰!!! 하지마!!! 이 犬새끼야! 그만 멈추란 말이야!!!> '나'의 비명은.................... 의미가.... 없다....... 나는 펌프질을 하는 사람처럼 헐떡이며 숟가락을 위아래로 마구 흔든다... 작은 지렛대가 되어 버린 숟가락은 그의 명치를 쩌억 벌려 놓고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던 붉은 빛의 액체를 토해 놓게 한다. <울컥 울컥> 그의 가슴에서 그런 소리가 난다... 많은 양의 피를 한꺼번에 내뱉다 보니 숨이 막혔나... 쿠쿡... <툭> 나의 머리를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볼 수 있다. 짧은 듯 하면서 늘 앞으로 흘러내리던 앞 머리칼.... 늘 건강해 보이던 까무잡잡한 피부... 고집 세고 완고해 보이는 짙은 눈썹과 각진 턱.... 단단하고 잘생긴 콧날...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나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제대로 본 적도 거의 없었던... 눈동자.. 그 까만....... 겉 표면의 냉랭함 안에는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듯한 따뜻함이 감춰 진 밤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왜 그런 슬픈 표정을 짓는 거지? 보지 마!! 보지 마!! 나를 보지 말란 말이야!! 제발 보지 말아줘!!!! <딸깡>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비로소 나임일 알아차렸다... 이제까지 일을 벌인 그 녀석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나'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니.. 아니다... 처음부터 그 녀석은 없었는지도 몰랐다... 이것은 모두 내가 벌인 짓이다... 나는 그저 그 녀석을 앞세워 나 스스로의 비난을 피하고자 한 것 일지도... 그런데.. 그런데... 왜 하필... 너여야만 하는 거지? 비난을 피하고자 그 무지막지한 녀석을 앞세웠다면... 끝까지 밀고 나갔어야 할텐데.. 어째서 나의 이 미칠 듯한 살기를 너에게 분출하여... 결국 나까지 이 지경으로 몰고 왔냔 말이야... 끝까지 모른 척 했으면 좋았을 것을... 끝까지 모른 척 했으면 좋았을 것을... 어째서 늘 마지막 순간에 너 임을 깨닫고 정신을 차리는 걸까... " ..........지훈아......" 나의 목소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벌벌 떨리고 있다. " 지훈아! 지훈아! 지훈아!!" 나는 치밀어 오르는 울음으로 컥컥 거리며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이.................닿는 순간......................................................................지훈이가 녹아버렸다.. 지난 번에... 상상했던 것과 똑같이.. 나의 손이 닿는 순간... 앙상하게 녹아버리는 살... 그러나 남는 것을 뼈가 아니다... 지훈이의 키보다 훨씬 작은... 지훈이의 체구보다 훨씬 작은... 백구두... 아니 이제는..... 빨간 구두의 노인이.........나를 보며 웃고 있다....... 빨간 구두... 갑자기 빨간 구두를 보고 있자니...웃음이 터져 나온다. 나는 노인과 마주보며 깔깔거린다. 숨이 막힌다.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픈 거야? 하지만... 하지만... 왜 나는 지금 포크로 내 배를 찔러대는 거야? 왜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거야? 어머니... 살려줘요... 도와 줘요.. 이 꿈에서 나를 꺼내줘요..................................... " 이봐. 젊은이. 나하고 여기서 영원히 살자구." 노인이 껄껄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넨다. 노인이 말할 때마다 핏덩이들이 튀어나와 바닥을 기어다닌다. 쿡쿡쿡.. 도와줘. 누가 나 좀 도와주지 않겠어? 도와주기 싫음 말구............................................ " 허억!!!!" 어둠 속에서 키 큰 청년이 숨을 거칠게 내쉬며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우우우욱!!" 청년은 쿵하고 바닥에 떨어지더니... 가슴을 움켜쥐며 신음했다... " 제길... 제길...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거기에 남아 있는 거야..."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허리뼈가 툭하고 빠지는 듯한 느낌에 청년은 다시금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 제길! 제길!! 아파!!!" 청년은 곧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청년은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전화 수화기를 낚아챘다. 또 다시 허리에 뼈를 쪼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 아악... 이런... 오늘은... 정말.. 유별나군..." 청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벨이 십여 번은 넘게 울리고 나서야 졸린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아.... 함.. 여부세...요." " 나야." " 나라니?" 상대는 아직 잠에서 떨 깼는지 몽롱한 목소리였다. " 나라구!!" " 야! 너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새벽 세시야. 이 시간에 왠 전화질.." " 닥치고... 너 은우 전화번호 빨리 말해 봐." " 엥? 누구?" " 은! 우! 강은우 말이야! 네가 반장이니 반 아이들 연락망 가지고 있을 것 아니야!" 청년이 갑자기 흥분하며 버럭 소리를 지르자 상대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라 허둥대며 대답했다. " 아.. 알았어. 자..잠깐. 아.. 찾았다. xx34-x2342. 그..그런데 은우 전화번호는 갑자기 왜 묻는 거야? 그것도 이 새벽에 혹시 무슨 일이.." " 재준아. 고마워." " 야! 지훈아! 지훈아!" <딸깍> 지훈은 얼른 플래쉬 버튼을 누르고 머리 속에 기억해 둔 번호를 꾹꾹 눌러댔다.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리 리리리리-> " 으아아아아악!!!" 나는 방 안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 으아악! 으아악! 으악!!" 손이 벌벌 떨린다. 아직도 피냄새 뿐이다. 배가 갈기갈기 찢겨진 양 엄청나게 아프다. 만일 멀쩡하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내장이 다 튀어나와 너덜거리는 살점과 함께 덜렁덜렁 댄다고 누군가 이야기하더라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 우웩!" 미쳐 화장실로 달려가기도 전에 시큼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와 방바닥에 쏟아진다. 머리 속이 하얗다.... 말끔하다. 누군가 지우개로 싹싹 지워 놓은 듯하다. 나의 사고 기능은 비정상적이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나는 미쳤다.. 그래 이제는 완전히 미쳤다. " 아하하하... 하하.. 큭큭큭.." 몰라.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그냥 웃자.. 웃기만 하자.. 좀 웃다가 잠이 들면 그만이다. " 싫어!! 싫어!!" 나는 불 구덩이에 던져진 사람처럼 팔짝 팔짝 뛰며 온몸으로 방금 내뱉은 말을 거부했다. " 자지 않아! 자지 않을 거야!!!" 내가 토해 놓은 위액에... 발이 미끄러져 나는 그대로 나자빠졌다. <꽈당> 머리부터 부딪힌 모양이다. 순간... 나는 정신을 잃는 줄 알고 혀를 깨물어 버리려고 했다. 기절을 하던지... 잠을 자던지... 다시는 눈을 감지 않을 꺼야... 죽는 것 이외에는 1분 이상 눈감을 일없어....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리리리리리->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울리고 있는 것일까... 내가 이렇게 누워 있는 것도.. 한 5분은 족히 흐른 것 같은데........ <도와줘. 누가 나 좀 도와주지 않겠어? 도와주기 싫음 말구.> 뒤 이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나는 깨어났다... 그 빌어먹을 노인네와 단 둘이 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누구지... 누구야.... 나를 도와 준 것이 누구야..... 나는 비틀비틀 기어갔다가 굴러갔다가를 반복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 여...." 갑자기 목이 콱 막혔다.... 긴장감이 풀린 탓일까... 몸이 벌벌벌 떨린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는다.. " 여보세요........." 나는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만일 이것이 장난 전화라면 아마도 상대는 화장터의 처녀 귀신이 흐느끼는 소리로 알고 기겁을 하며 당장에 끊었을 것이다... " ..............................................................................................." 긴 침묵.... 상대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침묵이... 서럽도록 살갑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침묵은 세가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견딜 수 없이 불편하거나...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게 관심도 없거나... 아니면...... 그 안에 폭 파묻혀 숨만 쌕쌕 내쉬고 싶을 만큼 아늑한 것.... 나에게 그런 침묵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일리는 없다... 그 애는 의외로 건성건성 넘기는 것이 많은 타입이다... 벨이 한 다섯 번만 울리면 벌써 끊을 준비를 하는 성격이다. 내가 아무리 걱정이 된다 하더라도... 이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거는 성격의 아이가 아니다... 불안은 하더라도..." 정 안되면 내일 찾아가보지." 라고 중얼거리며 잠을 청하는 그런 타입이다... 나의 여동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은영이니?" " ..............." 왈칵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혼자다.... 완벽하게 혼자다.......... 은영이가 나의 상황을 알 리가 없다. 그녀가 무당이 아니고서야.... 어머니... 어머니라면 아실까...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도와주실 수 없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시니까... 그런데 도대체 누가... 누가.. 나를 도와준 것일까.. 누가 나를 도와 준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혼자야.... 혼자야.... 아무도 나와 같이 할 수 없어.......... <딸깍> 상대편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역시 은영이가 아니었다.......... 그래..... 은영이가 아니었다.. 그럼 누구............ 누구야........ 쿡쿡쿡.. 도와줘. 누가 나 좀 도와주지 않겠어? 도와주기 싫음 말구............................................ 아니... 제발.. 나를 도와 줘....................................................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교실 뒷문에 서서 30분 동안이나 멍하니 서 있다... 좁은 방구석에 청승맞게 홀로 앉아 단순한 꿈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싶은 그 망할 악몽을 떠올리며 벌벌벌 두려움에 떠는 것보다는 넓은 교실의 창가에 앉아 하나 둘 씩 등교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내가 꿈의 세계가 아닌 현실. 바로 이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이라는 존재감을 느끼는 편이 백 번 낫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새로 산.. 검은 우산 - 왜 하필 검은 우산이었을까... 무의식중에 나는 하얀색이라면 치가 떨리는 것 같다... 빌어먹을.. 이것은 다 그 꿈 탓이야.. 하얀 레인코트.. 하얀 구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린다.-을 쓰고 여전히 들이붓듯 쏟아지는 빗속을 헤치며 좀비 마냥 몽롱한 눈으로 비틀비틀 등교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왜 그가 먼저 와 있는 것일까... 이 이른 새벽에... 이제 막 동이 튼... 새벽 6시도 못된 이 시간에 어째서 그가 먼저 와 있는 것일까... 그의 자리는 교실 정 중앙의 맨 뒷자리.. 뒷문의 자그마한 창으로 그가 보였다. 어째서... 어째서.. 와 있는 거야. 학교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을 염려 안 한 것은 아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으며 나의 공포감으로 짓눌릴 듯한 그 옥탑방을 나서며 지훈과 마주칠 것을 가슴 떨리게 걱정한 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악몽일 뿐이고.. 그와는 상관없으며.. 나의 이 미칠 듯한 죄책감과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마음 속으로.. 나의 마음 속 깊이 삭힌다면...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른 것이다.. 어째서 먼저 와 있는 것일까... 이 새벽에... 그가 있는 교실에 뻔뻔스럽게 낯짝을 들이밀며 교실로 들어갈 수 있을까...과연... 나는.... 머리통을 박살내놓고..... 등에 도끼를 박아 넣고 지근지근 밟고... 마지막으로 그 뭉툭한 숟가락을 그의 가슴 한 복판에 쑤셔 넣어 헤집어 댄 내가... 그와 단 둘이서 같은 공기를 들이쉰다는 것 자체가 나는 두렵다. 나의 이 감추어진.. 더러운... 끔찍한 살의가 그에게 그대로 들켜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그는.................... 놀랍게도 자고 있다....... 책상을 뒤로 뺀 채... 반쯤 누운 듯이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는 한쪽 어깨에 붙이고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눈을 감고 있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다..... ' 아프지 않니? 내가 그렇게 헤집어 놓았는데 아프지 않니? 어째서 너의 가슴은 멀쩡한 걸까. 왜 너의 그 하얀 교복 셔츠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리지 않는 걸까...' 병sin..... 그건 꿈이었잖아.... 늘... 단정하던 그의 모습이.. 오늘은 유난히도 초췌해 보인다... 교복 셔츠는 다림질도 되어 있지 않고 구깃구깃 했고... 단추도 제대로 잠겨 있지 않다... 게다가.... 그의 머리칼은 엉망이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순전히 나의 탓이라는 생각에 또 두려움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른다... 너를 보기가 두렵다.. 지훈아... 나는 너를 보기가 무섭다...... 이대로.. 발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릴까.... 수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밖을 하염없이 쏘다닐까... 하다가.. 섬짓한 생각이 머리 속을 파고든다.. ' 또 누굴 죽이려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또 어떤 장난감을 찾으려고...' 꿈이야... 꿈일 뿐이야.. 현실이 아니야... 지난번의 일은.. 우연일 뿐이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라고 중얼거려 보지만.. 그 생각은 저주처럼 나를 옭아매고 또 옭아매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교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자고 있으니까.... 적어도 다른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오기 전까지는 깨지 않을 테니까............. 라는 것은 나의 바램이고... 나도 그저 자는 척 하면 그만이다. 책상에 죽은 듯이 머리를 쳐 박고 아이들이 오기 전까지... 꼼짝 않고 있으면 그만이다.... 그래.. 그러면 돼. 그러면 만사해결이야....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뒷문을 천천히 열었다. 중간에 끼이이익.. 하는 소리에 내가 놀라 하마터면 문을 쾅 닫고 도망칠 뻔했다. 하지만 그는 꽤 깊게 잠들었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이야....... 죄지은 고양이 부엌에 숨어 들어가듯 살금살금 걸어 들어간 나는 책가방을 내려놓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교실 뒤편으로 나왔다. 그가.. 깊이 잠이 들었다고 확신한 나는 조금의 안도감에 평상시보다 약간 조심스럽게 걸었다. 우산통 노릇을 하고 있는 커다란 양동이에 우산을 찔러 넣고... 이제는 엎드려 있어야지... 자는 것은 절대로 안되고.... 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렸는데..................... 왜.................... 왜.......................... 그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걸까................. 하얀 셔츠 사이로 그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슬쩍 슬쩍 보인다... 세상에... 가슴팍도 다갈색이네................................황당해... 남자의 가슴팍을 여자의 미끈한 다리인 양 넋을 잃고 보고 있다니.... 좀 전까지 그에게 죄책감이 드니... 그의 얼굴을 보기가 두렵다느니.... 그런 말들은 다 뭐였지? 순간 나는 저 탄탄하고 매끈한 가슴팍 한가운데 사람의 입 마냥 쩌억 벌어진 상처가 분명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이리 와. 이리 와서 나를 좀 봐. 그의 가슴에 나를 새겨 넣은 것은 바로 너야.> 옷 사이로 감추어진 그 상처가 입을 오물거리듯 씰룩거리며 나에게 말하고 있다..........아니.. 있는 것 같다란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나야. 내가 만들었어...........' 빈속에 술을 병째로 들이켰거나... 심한 감기로 독한 약을 거푸 먹었을 때처럼...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진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나는.... 그의 곁에 다가가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람... 가만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내가 내 무덤을 파는구나.. 강은우............. 정말 미쳤어...... 돌았어........ 잠을 못 잤다는 핑계 따위는 집어 치워........... 하지만... 정작 미친 짓은... 지금부터였다................ 내가 왜 이럴까.... 정말 돌았나보다..... 쿠쿠쿡... 돌지 않고서야................................................................. 돌지 않고서야... 내가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셔츠 사이를 들추어 볼 리가 없지 않는가................. 나는 정말 그 순간만큼은... 숟가락으로 헤집어 놓은 상처가 있다고 믿었으며.... 그 상처가 계속 나에게 자신을 보아달라고 말을 건네는 환청을 들었다................. 잘 보이지 않는다.... 단추 사이의 틈이 너무 좁다.. 갑자기 짜증이 났다. 확인하고 싶은 거야... 그가 무사한지 그냥 확인만 하고 싶은 거야... 그런데 왜 못하게 방해하는 거야? 미친 것...............누가 방해를 한다구? 이 회색빛 쬐끄만 단추가 지금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까짓 것... 풀어버리면 그만 아니야......... 그래..... 풀어버리면 그만인데.....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단추를 풀었다. 만약 그가 깨어난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라는 걱정 따위는 아예 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나는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없다면...........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없길 바라는 것이다.... 당연하지... 있을 리가 만무하지... 그러나 확인해야 해... 정말 없다는 것을... 자꾸만 머리 속에서 내가 자신을 만들어 냈다고 하는 저 염병할 환청을 사라지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만약 있다면? 있다면.......... 상처가 나 있다면 과연 나는 어찌 해야 할까? 그 상처 속에 손을 쑤욱 집어넣어 볼까? 나의 시선이 닿자마자 피가 분수처럼 용솟음치면 이를 어떡하지?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꾸역꾸역 눌러가며 억지로라도 피를 멈추게 해야 하나?? 웃긴다... 만약 누가 이 광경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놀라고 황당해 할까.... 어떤 미친 녀석이 자고 있는 사람의 셔츠를 퍼렇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풀어헤치는 꼴이라니...... 하하하... 아하...... 지극히 정상적이지 못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며 나의 지치고 늘어져버린 뇌를 조여된다..... ...................................................단추가............하나.............풀렸다..............................잠깐................망설인 뒤...............................셔츠를.................. 열었다..................................................................................없다... 없다... 없다.... 상처가 없다.... 하느님.......... 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계시다면 정말 감사드립니다.. " 우웁..." 갑자기 울음이 복받쳤다. 이 무슨 추태랴.......... 이 무슨 미친 생각에 혼을 팔아... 그의 가슴팍을 훔쳐보고 안도하며... 그것도 모자라 질질 짜기까지 하다니... 소리 없는 울음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목구멍을 타고 솟아오른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순정 만화에 나올 법한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결코 소리내어 우는 법이 없었으므로.... 그 날 이후로.... 어머니가 나를 떠나버린 이후로.... 아버지를 평생 증오하기로 마음먹은 이후로... 은영이를 거기에 버려 두고 나온 이후로.... 나에게 엉엉 소리를 내며 통곡하는 것은 사치나 다름없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도 사치일 뿐이야....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그렇게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니? " ..................." 온 몸의 세포가 순식간에 얼어붙어 자각자각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까맣게 윤기 나는 눈동자가... 밤의 호수처럼 소리 없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깨어버린 것이다......... 어떡해 해야하지? 뭐라고 말해야 하지? 단추가 풀린 셔츠에 대해서는 뭐라고 변명하지? 가슴을 훔쳐 본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변명하지? 지금 울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고 변명하지? 고양이가 가지고 놀다 내던져 버린 실타래 마냥 머리 속이 복잡하게 엉켜간다. 가위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들을 싹뚝싹뚝 나각나각 다 잘라버릴 텐데....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두렵다. 나의 저 안 깊숙이 숨겨놓은 영혼의 찌꺼기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은 저 시선도 두렵다. " 지...지훈아.. 난.. 그..그냥.."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간신히 꺼낸 말이라고... 늘어놓는 게냐.. 지금.. 그냥이라니... 벼랑에서 사람을 밀어버리고서도 그냥이라고... 말하면... 만사가 해결 된다더냐... 나는 그러고도 남을 놈이야.. 그러고도......남을...... 돌아서라... 돌아서서... 창을 바라봐... 그리고 달려가는거야... 뛰어내려버려... 강은우........................... 뛰어내려버려!!!!!!!! " ........참지 마." 지훈이...... 내 말을 잘라버린다.... 뜬금없는 그의 말... 무엇을 참지 말라는 거야? " ...........참지 말라구..." " 무..무얼... 나..나는 그냥 나는 그냥 확인을.." " ...............소리내어 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지 말란 말이야." " ....................." 나는.........멍청이..... 정말 멍청하게........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런 바보같으니... 내가 무슨 수도꼭지라도 되냔 말이냐.... 멈춰라... 멈춰라.. 제발... 우는 것 좀 멈춰. 강은우.... 그만 울어.. 그만 좀 울어... 왜 하염없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거야... 제발 그만 좀 짜란 말이야........... " 크.....크윽.. 으흐흑..." 지훈의 말은.. 언제나 주술이 되어.. 나를 이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되어....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래... 네 말대로 하고 싶어... 어째서 너의 말이면... 나는 모조리 따르게 되는 걸까........ 억지로 참으려고 해도...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고 해도.... 한번 터져 나온 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떨군 채 길 잃은 어린 아이 마냥.... 울어댔다... 껄떡껄떡 숨이 넘어가기도 하며... 콧물을 들이키며 터져 나오는 오열을 서럽게 토해내며.... 지훈의 앞에서 하염없이 울어댔다. " 그래... 그렇게 우는 거야.............. 참지 마........" 지훈의 팔이.... 나를 안았다... 잘해 주지마. 지훈아.. 잘해 주지마.. 나는.. 나는 말이야.. 너를......... "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울고 싶을 때 울어....." 너 말야..... 독심술 하니? 최지훈?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나는 너에게 마음을 놓아서는 안돼... 그럴 자격도 없고... 그래서도 안돼....... 하지만... 늦었나보다... 늦어버렸나보다........ 한참이나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나니.... 가슴 저 한 켠 에서부터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해묵은.. 나의 서러움과 괴로움이 약간 빛이 바랜 느낌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지..................... .........눈물과 콧물과... 침으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을 지훈의 가슴에 부비부비 부벼대다가 퍼득 정신이 든 나는 고개를 들어 어리버리한 표정..........- 제길... 십중팔구 그런 표정을 지었을 것이 확실하다.. -을 지으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아악....................아아악.... 창피하다... 얼굴이 뻥 소리를 내며 터져나갈 것 같다...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내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지훈의 허벅지 위에 달랑 올라앉아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오호라...... 이런 것이 바로 "꼴사나운 짓거리" 인 것이다... 다 큰 남정네 둘이서 이렇게 오...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보는 사람이 없다하더라도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며 일시적으로 사고기능을 마비시킨다..... " 쿡." 내 얼굴을 멀뚱이 바라보고 있던 지훈이 짧게 웃었다. 머리에서 김이 화르륵 솟아오른다. 나를 보고 웃는 지훈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지훈을 웃게 만든 나의 이 참을 수 없는 또는 용서할 수 없는 부끄럽고 멍청한 행동을 한 나에게 화가 났다. 게다가.... 순간 그가 보았을 나의 그 무방비 상태인 표정... 내가 늘 쓰고 다니는 가면을 모두 잃어버린 채 나의 깊숙한 곳에 꽁꽁 감추어 두었던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었을.. 그 표정... 제에에에기ㄹ... 분위기에 취해... 이게 무슨 짓이람.... 잠을 못 자서야... 잠을 못잔 탓이라구...................................라고 나를 달래보았자... 나는 이미 자괴감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다...... " 왜 웃는 거야?" 이 혼란스러운 상황과... 추스리기 어려운 감정들 때문에... 용의주도하게 늘 유지해온 나의 가면들은 여기저기 흘려버리고... 그 누구도 이제껏 보지 못했을... 나의 짜증스럽고 유쾌하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나의 실수다.... 이것은........ " ............역시.... 역시 그랬구나." 지훈의 눈은 마치 "호오~"라고 말하는 듯하다. 호오? 호오? 지금 네가 나에게 호오? 라는 감탄사를 은연중에 내보이는 이유가 뭐지? " 여...역시라니?" 나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나는 다시 칠칠맞게 흘려버린 가면을 훌러덩 뒤집어쓰고... 묻는다... 수줍게.. 숫기 없게..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러나... 나는 대충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짐작하고 있다.... - 너희들은 그 애가 웃으면 그런 느낌이 드나보지? - 그래... 애시당초 지훈은 내가 만든 가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용의주도하게 만들어 놓은 가면일지라 해도 그는 그것이 거짓임을 다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라 함은.... 내가 그에게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시켜준 데에 대한 대답이겠지. " ...........졸립지?" 갑자기 그가 물었다. 표정은 예전처럼 무표정하지만... 눈만은 웃고 있다... 저런 느낌이었나? 지훈의 눈이 저런 느낌을 주던가? 사각사각 얼어붙어 가는 호수의 표면 같다고 느꼈던... 그 눈동자가 저 안 깊숙이 있던... 따스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누구에게나 가면의 얼굴을 대하며 꽁꽁 숨어드는 나와는 다르다. 그는 보여주고 싶을 때 보여주고 그렇지 않을 때는 보여주지 않는 자기소신주의이다. 그는 남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으며 자신에 관한 것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그런 멋진 녀석인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너의 그런 면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거야? " 자면 안돼." 나는 갑자기 단호하게 말했다.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 담긴 단호한 어투에 나 자신도 놀래버렸다. 순간... 지훈의 얼굴이 무섭도록 어둡게 느껴진 것은 착각일까? 너무나 순식간에 스쳐간 그 느낌에 나는 착각이라고 단정지었다. " ..지금은 자도 돼.... 그리고... 말야. 좀 일어나 봐... " 지훈이 나의 엉덩이를 팡 소리가 나도록 때린다. 헉.... 이런.. 나는 이제까지........ 일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로군......... 나는 뭐하다가 들킨 놈처럼 기겁을 하며 부리나케 일어났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의자에 몸을 제대로 일으켜 앉는 지훈이..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당황하는 것은... 나 하나로 족하다 이거지... 지훈은 갑자기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꺼내든다.. 엉뚱한 놈... 담배다.... 담배를 책상 서랍에 넣어 두어서 어쩌겠다는 것인지 원......... 그리고 책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또 뭔가를 꺼낸다................... ............................수건이다.... 보기만해도.. 보송보송하고.........부드러운.........수건.... 그러고보니.. 지난번에 지훈이 준 수건을 가고 오지 않았다.. 빨기는커녕... 오늘 새벽에... 토해 놓은 것을.. 그걸로 닦아 버렸다.. 맙소사.... " 아... 지..지훈아.. 네 수건..." " .........그거 하얀색이었나?" 지훈이 담배 한 개피를 입에 꼬나 물었다가 다시 빼며 물었다. 하얀색................. 하얀색.................. 왜 너까지 하얀색에 집착하는 거지? " 응." " 하얀색.... 나 대신 네가 버려 줘." " 뭐?" 나의 대꾸에 지훈은 그저 씨익 웃을 뿐이다... 뭐야... 자..잠깐만... 뭐가 어떡해 돌아가는 거야? ......................하얀색이기 때문에.... 버리라는 거지? 그렇지? 역시.........너.............. 뭔가 알고 있어? 알고 있는 거야? 갑자기 싸한 두려움이 몰려온다. 이 녀석은 도대체 어떤 녀석이지? 알고 있는 거야.. 모르고 있는 거야... 왜 그 수건을 버리고 싶어하는 거야? 단지... 하얀색이기 때문에? 사실..............버리고 싶어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지독한 결벽증이어서 내가 쓴 수건을 다시 쓰는 것이 싫기 때문에...... 그렇다면 애당초 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의 셔츠에 눈물은 둘째치고 콧물과 침까지 묻혀 놓은 것을 잠자코 참았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걸레 대용으로 써 버렸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에........ 그것은 말도 안돼는 이야기고....... 그가..... 들고 있는 수건은................ 푸른빛이다. 파스텔 풍의 연하디 연한 푸른색의 수건이다. 그가 알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은 나만의 꿈이다.. 나만의 악몽이다. 내가 꾸고 내가 잊는... 나만의 정신세계인 것이다... 나는 이제껏 무의식의 세계를 공유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의 말에 뭔가가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 일까? - 나 대신 네가 버려 줘 - 좀 과장을 섞어서 말하면.. 그는 마치 그 수건이... 그 하얀빛의 수건이 자신의 손안에 들어 있다면 발기발기 찢어서 불태워 버리고 싶은 것을 억누르는 듯한 말투였다. 하얀 색.................. 하얀 레인코트..................... 하얀 타일의 주방..........................하얀 구두....................... 미친 고양이의 오렌지 빛 눈깔... 퀴퀴한 녹빛의 쓰레기 수거함. 번뜩이는 은빛의 도끼날. 은빛의 포크. 숟가락.... 찐득거리는 적갈색 뇌수. 뿜어져 나오는 선홍색 핏덩어리.......................... 또........ 속이 울렁거린다..... 참아라. 이 놈의 뱃속아.... 들은 것도 없는데 기어코 게워내야 속이 시원하겠니? " 은우야?" 내 창백한 안색 때문인지 지훈이 손을 뻗어 내 팔을 가볍게 잡았다. 순간 나는 악몽 속의 낭자한 선혈과 나의 웃음소리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쳐내버렸다. " ............" 아무 말도 안 한다..... 기분이 상했을까..... 화가 났을까........ 황당할까......... 그런데... 그 침묵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 그냥 아무런 뜻도 담겨져 있지 않은 침묵........ 오늘 새벽의 침묵이 갑자기 떠오른다... 그래.. 그것과 동질의 것......................이라고 말하면 비약이려나? 나는 잠깐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서는 -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다만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 내 자리에 앉았다. 그가 수건을 반듯하게 잘 접더니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 ....베고 자면 얼굴 안 아파...." 쿡...... 경험자의 이야기라 이거지? 나는 갑자기..... 그가 수건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비단 태권도 부의 활동으로 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삐죽삐죽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 ......네가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 지 아니까. 그만 웃어..... 맨날 잠만 자는 건 아니라구. 땀 닦을 때도 쓴단 말야..........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지훈은... 꽤나 많은 말을 늘어놓고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문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불을 붙인다... 나는 책상 위의 그 푹신한 수건 위로 옆 얼굴을 살며시 대며 그런 그의 행동을 그냥... 그냥... 바라보았다. 그래... 그와 같은 말을 은영이도 했었는데................... 아............. 향기가 난다.... 섬유유연제의 향긋한 향기가 난다..... 마치.... 꽃밭에 파묻힌 기분이다... 그리고.......그리고... 지훈이 피우고 있는 매캐한 담배 냄새도 느껴진다.... 지훈은 그저 말 없이... 내 옆의 의자에 기대어 앉아... 정면을 응시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졸립다............................... 졸립다................................. 자면 안되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자지 않겠다고... 했는데......... 작심삼일.... 하.. 작심삼시... 로군.......... 작심.......삼...시.........야..... .........자면.......안....돼...... 지금.......자면...... " ........자... 지금은 자도 돼..........." 지....훈의 큰........... 손이 가..볍게...... 나의 뒷머리.....를 어루어........... 만...져...준다... 아....... 기분 좋다......... 가끔 어머니가..........이....렇게..... 해주셨.....던가........ " ..........지금은 자도 돼. 만약... 네가 악몽을 꾸게 되면........내가... 깨워줄게......... 옆에 계속 있다가....... 반드시 깨워줄게..............그러니까.... 지금은.. 자도 돼... 은우야......." 응........... 그래...... 나 잘래........... 너의.........말은......... 언제나........... 주술이.........되어...........나를..............................이 끈 다.....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나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형용 색색의 꽃들로 둘러 쌓여 있다. 이 세상의 색이란 색은 모조리 여기다 가져 놓은 듯 하다.. 아름답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바람이 분다. 따스하면서... 상큼한 바람 한 줄기가 내 머리칼을 살짝 쥐었다 놓는다. 분명 이것은 꿈이다... 꿈이 아니고서야.... 이런 세상이 존재할 리가 없다. 은은한 향기가 나를 부드럽게 어루어 만진다. 그 그윽한 향은 하나의 형상이 되어... 후각이 아닌... 촉각으로도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손처럼 느껴져... 나의 머리를... 목을... 천천히 감싸고... 쓰다듬고... 다정히 만져준다... 기분이.. 좋다.. 아주 좋다.... 나는 사방으로 펼쳐진 지평선 너머로 이어진 꽃밭의 한 가운데에 가만히 서서.... 그 손길에 모든 것을 내 맡겨 버렸다. 멀리.... 저 멀리 아련하게.. 그리고 흐릿하게... 잿빛의 우중충하고도 기괴한 구름층이 보인다. 때때로 강렬한 하얀빛의 번개가 지평선 위로 번쩍 내리꽂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섬찟섬찟 몸을 부르르 떨며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선다... 알고 있다... 저것이... 나의 악몽인 것이다... 내 악몽의 실체는 바로 저 기괴하고도 끔찍한 잿빛 비구름에게 먹혀 들어가는 바로 저 공간인 것이다.. 언젠가... 내가 서 있는 이 곳도... 저 구름들에게 먹혀 버리겠지. 독으로 가득 찬 비는 꽃들을 녹여버리고 하얗게 번뜩이는 강렬한 번개는 땅을 태워버리겠지.... 음산한 암흑 속에 갇힌 나는 두려움의 족쇄에 채워져 헐떡이며 비명을 질러대겠지... 아니면.... '내'가 아닌 나에게 먹혀버린 후 환희 찬 웃음을 터트리며 춤을 춰 댈까나? 그래. 춤추자. 그 공포와 두려움의 이빨을 갈아대는 암흑 속에서 죽은 자들의 뼉다귀를 장작 삼아 모닥불을 피우자. 포크와 스푼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치렁치렁 목에다가 걸고 도끼를 휘두르며 빙글빙글 춤을 추자. 그래. 노래도 부르는 거야. 무슨 노래를 부를까. 쿠쿠쿠... 역시 그 노래가 제격이야. 악어 노래 말이야... 저기 저 악몽이 악어 마냥 입을 쩌억 벌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아? 순교자의 심정으로 저 아가리 속에 한발 한발 다가가자. 악어떼를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지나서 가자. 늪지대를 지나서 가면.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그러나.... 그러나... 다행하게도... 보이지 않는 그 손이 나의 안아든다.... 손은 하나에서 둘이 되고... 또 두 팔이 되어... 나를 껴안는다... 저 악몽의 독기에 홀려 발걸음을 옮기려 하는 나를 붙잡는다.... <가지 마. 가면 안돼.>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이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련하고 그리운 목소리. " 비켜." " 비켜." " 비켜." 이것은... 나의 목소리인가? 그 말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 속을 이리저리 후벼 놓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말.. 내가 한 말이야? 내가 한 말이야? " 비켜." ......................................................................화사한 꽃들 뒤로.. 흐릿한 영상이 겹쳐 보인다... 순간 깊은 터널을 가득 채우는 듯한 허밍 소리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허밍소리는 한층 더 깊어졌고 한 층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나는 그 소리 속에서 귀에 익은 몇몇 목소리를 구별해 냈다. 발소리. 말소리. 심지어.... 누군가가 코 푸는 소리.... 다채로운 소리들이 명멸했다가 사라지면서 우렁찬 허밍 소리가 갑자기 한플 꺾였다. 그와 동시에 구체적인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하나하나를 구별해 가며... 흐릿한 영상에 눈의 초점을 맞추어 갔다. " ........야! 수학 숙제 좀 내놔봐라. 임마. 형님이 당구채에 시련을 당해야 속이 시원하겠냐?" " ........그런데 갑자기 그 애가 그러는거야. 나 폭탄제거반이야. 아쒸. 쪽 팔려 죽는 줄 알았어." " ........숙직실에 숨어 있다가 학주가 잠들면...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버리는거야. 그럼 나 죽겠지?" 아.... 나는 지금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 얌마. 비키래두." 나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나의 몸은 아직 잠에 취해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아... 아까의 비켜... 라는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잠결에 들은 소리를 내가 한 말이라고 착각을 했나보다.... 그런데... 누구보고 비키라는 거지? 순간... 나는 누군가 여전히 나의 뒷머리를 천천히.. 조심스럽게... 마치 아기를 달래는 듯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내 자리에 잠깐 앉아 있어." 최지훈...... 지훈이의 목소리이다.... 다시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얼라... 전혀 편안해 해서는 안되는 상황이란 말이다.... 헉... 갑자기 심장이 콩닥콩닥 거린다... 여어.. 심장군... 진정하시게... 아이들이 십 여명 정도 와 있다... 아마.. 나는 한 시간 정도 잠을 잔 모양이다.. 나의 짝은 늘 일찍 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내 짝이 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훈은 여전히 자리를 비키지 않은 채.....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어째서 내 머리를 깜찍한 소녀가 곰인형 조물락거리듯 쓰다듬고 있느냔 말이다..... 뭐...........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것이 정말 싫다. 눈에 띄는 행동도 하기 싫고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도 싫다. 하지만 지금의 경우. 지훈은 나를 내가 극도로 싫어하는 그러한 처지로 몰아 넣고 있었다. 알 만한 아이들은 다 안다. 나는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아이가 없다. 더더군다나 지훈과는 얼마전까지 말 한마디 오고가 본 적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비를 쫄딱 맞고 오더니 졸도해 버린 어리버리한 녀석을 들쳐 없고 양호실로 가질 않나... - 성혁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 이제는 자장자장 잘도 잔다.. 재우면서... 임자 있는 자리를 떡 하니 차지 한 채 '내 맘이야' 라고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알면 알수록... 그에게 다가갈수록... 혹은 그가 내게 다가올수록... 그는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 햐. 지훈이 너 언제부터 은우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냐?" 갑자기.. 성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크윽... 저 녀석까지 와 있었단 말인가... 아아... 반 전체에... 살이 붙는 것도 모자라 기름기까지 잘잘 흐르는 소문이 도는 것도 머지 않은 일이로군.. " ..............은우 자니까. 조용히 해." 지훈이 딱 잘라 말한다... 갑자기 주변이 썰렁해진다... 보고 있지 않아도 나는 상상이 간다... 상상하기 싫어. 상상하기 싫어... 라고 마음 속으로 부르짖어 보았자....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그 광경을 싹싹 지워버리기는 힘든 노릇이다.. 지금... 주변에 있는 모든 녀석들은... 반쯤 얼빠진 얼굴로... 지훈과 나를 번갈아 보고 있겠지. " .......할 이야기 없으면 각자들 일 보고... 너는 잠깐 내 자리에 가 있어. 은우 일어날 때까지만 네 자리 빌리자." 지훈의 무덤덤한 말투.... 그러나 그 무덤덤한 것을 더 이상하게 받아들여 확대 해석하는 놈이 한명씩은 꼭 있는 법이다. " 오오~ 최지훈~" 그래... 바로 너!!!! 너!!! 너!!! 너 같은 놈이란 말이다. 이 성혁........... " 분위기가 야릇해~~~" 놈의 목소리가 배배 꼬인다... 듣는 나까지 꽈배기가 되는 기분이야. 젠장.. 내 몸 꼬이면 네가 풀어줄테냐. 이 상황에서 일어나면 뭔가 내가 다 수습하고 감당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좀 더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이라고 말하고 싶으나 실상 내 마음은... 지훈의 손길을 더 오래오래 느끼고 싶었는지도................ ................나는.... 설마... 욕구불만인가? 여하튼.... 저 능글능글 맞은 목소리와 느끼한 분위기를 주도하는 놈의 말투에 " 네 놈의 사고방식이 더 야릇해!!!" 라고 고함을 치며 벌떡 일어나.....................는 것은 희망사항이고........ 이제 막 일어난 듯... 눈을 비비며.... 졸린 목소리로 - 실제로도... 졸렸다. - 사태 수습에 나섰다. " ............나... 깼어." 음................... 이것은 사태 수습이 아니다.... 나는 나를 저주했다... 나 깼어.... 라니.. 좀 더 그럴 듯한 말을 없었느냔 말이다.... 나 깼어... 나 깼어... 나 깼어... 라니... 깼으니 어쩌란 말인가....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는 것은... 늘 힘들다. 그리고.. 늘 엉뚱한 결과를 가져온다. 엉뚱한 결과란... 바로 이것이었다............. 지훈은 나를 바라보더니.... 손을 들었다. 나는 그가 도대체 무얼 하려고 그러나.... 싶어 멍하니 그가 하는 행동을 쳐다보았다. 지훈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또한 역시 주위의 녀석들도 그의 행동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 손을 들어... 손을 들어... 손을 들어............... 나의 입가에서부터 턱까지... 주르륵 묻어 있는 잠의 흔적을... 엄지로 쓰윽 닦았다. 그래. 그래. 좋아. 좋아. ...................................거기까지만 하렴... 거기까지만 하렴...........거기까지만 하란 말이다!!! ...........어째서.. 어째서.......... ...........그 엄지 손가락을.... 네 입술에 쓰윽 문대는 것이냐.............. 뻥! 뻥! 뻥! 나의 뇌와.. 나의 얼굴과... 나의 가슴이 터지는 소리이다. 이것은... 황당함...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나의 머리가 뻥 터져버렸고.... 화르르륵 달아오르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의 열기에 나의 얼굴이... 뻥 터져버렸고... 가슴은... 가슴은.... 가슴은................... 나도... 모르겠다... 주위의 입들이 떠억떠억 벌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너무나 당황했다. 나를... 나를... 아이들의 우스개로 만들 셈인가? 단 둘이서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 갑자기 그의 다리에 앉아 품에 포옥 안겨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던 것은 왜 떠오른 것인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네가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모르겠어! 간신히..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는 척 하며... 은근슬쩍.. 얼굴을 붉히며 "장난치지 마.. 이런 장난은 재미없어."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지훈이 씨익...........웃었다. 약 올리는 듯한... 또는 나쁜 장난을 치는 듯한...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마치 이제 막 수줍은 고백을 한 어린 소년의 뿌듯하고도 가슴 설레는 그런 미소였다고 하면... 누군가 배를 잡고 깔깔대며 비웃을까? 철 없는 아이의...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또는 주위의 시선.. 그런 것은 애시당초 신경쓰지 않은 채.. 그저 좋아하기에....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열에 들뜬 철 없는 아이의 웃음이다. 그것은... 노여움이 확 치밀어 올랐다. 나는! 너의 그런 철 없는 행동을 받아 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안 그래도 그 놈의 악몽과... 또 그 빌어먹을 꿈과 연관이 된 너와... 네가 보이는 그 알수 없는 행동들도 나에게는 버겨워 죽겠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영화 찍냐?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엿 같은 짓이야!! 나의 노기는 나의 견고한 가면 조차 녹일 만큼 거세었다. 왜? 왜?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게 과격하리 만큼... 도가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는 걸까.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 도 없이 나는 막 입술에서 손을 떼는 지훈의 손목을 잡아 챘다. " 이 자식. 그 따위 짓 두 번 다시 하지마." 하............. 어쩌면........... 나는 지훈의 술수에 넘어갔는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면... 그 녀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므로.... 나는 또 다시... 내 무덤을 내가 파 버렸다... 지훈의 도발에... - 그것이 도발이었을까만은...- 넘어가... 또 다시 나의 가면들을 질질 흘려버리는 짓을 하고 만 것이다.... 사슴처럼 순진하고 동그랗고.. 멍한 듯 해도... 부드럽고 선한 눈에 배시시 맹한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나는 이 가면을 만들기 위해 그 얼마나 치밀하게 연습하고 또 연습했던가.... 내가...... 고양이처럼 눈을 치켜뜨며....... 눈썹을 사납게 찌푸리며.... 거칠고 잔뜩 힘이 들어가 노여움에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이들이 굳어 버렸다. 쿡. 그래. 이게 내 본 모습이다! 어쩔래!!! c8!!! 지겹다! 지겨워! 네 놈들에게 헤죽헤죽 대며 착한 사람 노릇하기도 이제 지겹다! 허구언날 똑같은 미소를 지어가며 수줍은 척... 어수룩한 척...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나의 존재감을 짓눌러 뭉개버리는 이 짓도 정말 못해먹겠어!! 못 참겠단 말이야!!!! " .............그래. 참지 마." 갑자기 지훈이 손가락으로 나의 이마를 투욱 밀어버리며 말했다. " ....참지 말란 말이야. 지금처럼.." 느닷없는... 그의 말에 나는 전의를 상실했다..... 지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주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 쪽으로 걸어가버렸다.... " .............." " 야. 강은우. 너도 한 성깔 하잖아?" 나의 짝이 신기하다는 듯 나를 유심히 살핀다.. 나는 또 얼른 예전 버릇대로 필살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약간 눈을 찌푸린 채... " 글쎄..." 라고 말했다... 오호~ 글쎄라... 이 분위기 파악 전무한 나의 말솜씨 만큼은 변함이 없다. " 흐음.. 지훈이 녀석..." 성혁이 빙글빙글 거리더니... 피식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네가 남희석이냐.. 하회탈처럼 웃게? 추하다.. 그 얼굴 돌려라.... 성혁은 어깨를 건들건들 흔들며 지훈에게로 가 버렸다. 성혁이 그에게.. 뭔가 이야기를 건네어 보지만.. 지훈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더니... 또 다시 의자에 반쯤 눕다시피 앉아 눈을 감는다. 너도 많이 졸렸던거구나.... 나 때문에 자다가 깨고... 나 때문에.. 이제야 잠을 청하고... 그런데... 그런데... 최지훈.. 너는 어째서 잠이 부족한 거야? 어째서..... 나와 같이 이른 새벽에 학교에 와서.... 부족한 잠을... 채우는 거지? 나는 또 다시.. 가슴이 섬뜩하여 숨을 천천히 들여마셔 본다...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지훈아.. 도대체 너는.... 무엇을 알고 있고.. 또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 거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막연한 추측과 상상은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 뿐이다. 나는 창문 쪽으로 의자를 바싹 붙여 앉았다.. 비가 들이치지만... 이 정도야... 맞는다 해도.. 안 죽으니까.. 어둡다... 어둡다... 저 짙고 두터운 비구름은... 해를 먹어 버린 지 오래. 그래. 언제 뱉어낼거냐.. 언제 뱉어 낼거냐... 이상하게도.... 저 구름이 해를 뱉어내지 않는 이상... 나의 악몽도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반대로.. 나의 악몽이 끝나는 날... 이 지겨운 장마도 끝이 날까나... 역시.... 나는 ..... 조금 머리가 이상해 져 있다... 교실에... 등을 돌린 채... 창문과 마주보며... 바람과 마주보며... 들이치는 빗물과 입맞춤하며.... 깜빡깜빡 졸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부른다. " 강은우?" 고개를 돌려보니... 반장인 재준이다... 무슨 일일까... 내가 왜 불러? 라는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 재준이가 뺨을 긁적긁적 거리며 대답한다.. " 아.. 그게 말이지...." 쑥쓰럽니? 조금 껄끄럽지? 그래. 당연하다. 재준과 나는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고... 반장과 학급학생으로서의 대화 이외에는 일상적인 말조차 나누어 본 적이 없는 그런 사이다. 그렇기에 당연히... 말을 건넨다는 것은 쑥쓰럽고 껄끄러운 일이지. 하지만... 지훈이는... 전혀.. 그렇지 않았잖아.. 아주.. 자연스럽게...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하! 이제는 모든 걸.. 그와 결부지어 버리는군..... 확실히 중증이야..............라고 생각하며 나는 재준에게 물었다. " 무슨일이야? 재준아?" 내가 약간 친근감있게.. 반장. 이 아닌 재준. 으로 부르자 그는 조금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맘에도 없이... 친한 척 할래니 속이 뒤틀리긴 하지만... 나 역시 그의 웃음에 어색한 미소로 답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 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얼레? 이게 또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냐구? 그래. 무슨 일 있으면 니가 어쩔래. 한번은 도끼로 사람 머리통 뭉개놓고... 한번은 숟가락으로 가슴팍 헤집어 놓았는데... 이 정도면... 무슨 일일까?? 현실이 아니라서... 무슨 일 리스트에서 탈락이라구? 현실이면......................어쩔건데? " 아무일도...... 없어..... 왜?" 나의 대답에 재준이 다시 뺨을 긁적인다. " 그게말야. 오늘 새벽에 지훈이가 다짜고짜 나한테 전화를 해서...." " 전화를 해서?" 나는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리고 호흡이 떨려 평소와는 달리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대뜸 그의 말을 낚아챘다. 막연한 추측과 상상은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 뿐이다.................그러나.. 이것이... 두려움을 일으키는 나의 착각일지... 아니면 기대일지.... 나는 모르겠다. 무엇을 기대하는 것이냐... 무엇을.... 재준이..... 나의 의문에 답을 해준다..... " 네 전화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하잖아. 일단 가르쳐 주긴 했는데... 둘 다 아무일도 없는거야? 뭐... 아까보니까 아무일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언제 둘이 그렇게 친했어?" 은영이가.......................아니었다. 은영이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지훈일 줄은..... 지훈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이 봐.. 거짓말 따위는 집어 치워.... 아까부터 계속... 그였길를 바라고 있었지 않아? 너였어.... 너였어.... 우연이라고말하기는 기가 막히는군..... 나는 나도 모르게.... 지훈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거야... 나는...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을 듣고 싶은거야... - 나는 네가 지난 밤에 한 일을 알고 있어 - 라는 말이라도 듣고 싶은건가? 혹은... - 나는 네게 죽는 꿈을 꾸고 있어. - 라는 말을 듣고 싶은건가? 둘 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다.... 실현불가능성 99.9% ...................그러나 만일... 0.1%의 가능성이라면... 나는 어찌해야 되는 걸까... 어찌해야 되는 걸까.. 만약 알고 있다면... 왜 너는 그렇게 나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지? 왜 좀 더 확실하게 말하지 않는거지? 비난이라도 해 봐! 미워라도 해 봐! 이런 내가 꼴사나워 보이지도 않아? 동정이니? 너 지금 나를 동정하는 거야? 최지훈? 지훈은 그저 눈을 감고 있다.... 무작정 나의 몸을 타고 올라오는 의심. 너는 자고 있지 않아. 그저 눈만 감고 있을 뿐이야. 그렇지? 나처럼 너역시 자는 것이 두려운 거야. 미친 자식.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 누구보고 자라마라야... 네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어? 단지 동!정! 때문에? <벌컥> 누군가 앞문을 떼어내고 싶기라도 한 듯 거세게 열어젖혔다. 그 아이의 상기된 얼굴. 잔인한 호기심. 나는 순간..... 마음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오늘 새벽 이후로 묻어 두었던 불안감과 두려움이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 야!!! 사람이 또 죽었어!!" .........신은 왜 있는 걸까.... 나를 괴롭히기 위해 있는걸까? 웅성웅성... 아이들이 각자 떠들기 시작했다. " 왜 학교 앞 골목 맨 끝에 있는 레스토랑있잖아!! 거기 주인 할아버지가 죽었대!!" - 이봐 . 젊은이. 나하고 여기서 영원히 살자구. - 노인의 끈적끈적한 웃음 소리가 다시금 들린다. 그래... 쿠쿠쿠... 이봐요. 할아버지. 나 그냥 당신이랑 그 곳에서 눌러 살아버리는건데 말이지... 숟가락으로 어쨌네.... 도끼로 등을 아작냈네.... 따위의 말이 귓가에 그냥 흘러넘어가버린다. 곧 이어... 정적... 아이들이 입만 벙긋거린다.. 그래.. 차라리 아무 소리도 듣지 않는 것이 나아. 나는 천천히 일어선다... 주변의 아이들은 그 빌어먹을 소식을 가지고 온 아이에게 옹기종기 모여들어... 내가 움직이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사뿐사뿐... 나는 흡사 나비가 된 것 마냥 가볍게 발걸음을 놀린다. 나가자... 나가자... 어디론가 멀리 가버리자... 하얀 레인코트의 아가씨와 백구두의 할아버지와 셋이서 여행을 떠나는 거야. 어디로? 어디긴. 퀴퀴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납골당은 어떨까. 새하얀 백골을 갈아 당신들이 흘린 피와 저 독기를 머금은 빗물에 섞어 사약 마시듯 비장하게 들이켜 버리자. 그냥 지나치려 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지훈을 외면하려 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그가 눈을 떠 버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어 똑바로 앞만 본 채 그대로 뒷문을 나서려고 했다. 그것은 예지였을까... 웃기게도 나는 그를 외면하지 못했고... 그 또한 나의 예상대로 눈을 뜬다. 주리를 틀 놈... 역시 너는 자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 새벽에도.... 그 텅빈 교실에 홀로 잠을 자고 있던 것 처럼 보였지만 넌 자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 고요한 시선이 나를 붙잡는다. ' 아무데도 가지마.' 훗. 웃겨... 그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시끄러. 이 미친 자식아. 나보다 덜 할지는 모르지만 너도 결코 정상이 아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묵묵히 걸어나갔다. 그와 엇갈리는 순간... 그를 내 등 뒤의 세계에 남겨두고 문을 나서는 때... 나는 혹. 그가 나를 붙잡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럼 어떡하지? 어떡해 반응해야 하지. 하하... 아마도 그의 손을 뿌리치며... 아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미친 듯이 발광을 하겠지. " 네 놈은 다 알고 있지? 다 지켜보고 있었지? 그렇지? 10새끼야!!!" 라고 울부짖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책상이나 걸상.. 혹은 대걸레 자루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다 부셔 버리겠지.. 아마도... 그 때처럼.. 그 때처럼.. 자신을 이해해 달라며... 그 여자를 새어머니로 불러달라며 아버지가 나를 붙잡던 때처럼 말이다.... 박살 나던 유리창. 그 큰 통유리들이 와르를 부서져 내리며 비명처럼 토해내던 파열음. 나는 그 소리를 상상하며 뒷문을 나섰다. 하지만..............그는 붙잡지 않았고... 나는 왠지... 가슴 한 켠이 시리다.... 안녕이다... 안녕이야.... 나의 꽃밭아, 안녕이다... 나는 더 이상 온전한 정신으로 머무를 수 없다. 가자.. 가자.. 가자!!! 저 사악한 독기를 토해내는 나의 악몽속으로 가자!! 강렬한 백색의 번개에 내 몸을 태워버리자!!! 나는 나를 죽이고 싶다! 악몽의 족쇄에 걸려버린 나의 손과 발을 단숨에 끊어버리고 싶다! 나의 목을 졸라 이 빌어먹을 세상에 남겨진 나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싶다! 뒷문을 나서자 마자 나는 미친 듯이 달렸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무슨 대수랴... 너희들과는 두 번 다시 볼 일도 만난 일도 없을 것을... " 헉. 헉...." 숨소리.. 거친 숨소리.. 극도의 피곤과 굶주림에 지쳐버린 나의 이 허약한 심장이 내지르는 비명소리. 갑자기 나는 '내'가 아닌 나의 숨소리를 떠올라 입을 틀어막았다. 쉬지 마!! 숨도 쉬지마!!! 죽어 버려!!! 거의 뒹굴다시피하며 계단을 뛰어내려 와 후문을 향해 내달렸다. 제정신이라 말할 수 없는 나의 이 정신상태 속에서도.. 나의 이성은 아이들이 한창 등교할 정문은 피하자고 결론 지은 모양이다. 그래.. 제길. 후문이다... 정문과는 달리 학교 건물에서 몇 배는 떨어져 있는 그 을씬년스러운 후문쪽으로 달아나자. 건물 밖으로 나가는 유리문 너머로 비가 쏟아지고 있다. 황갈색의 물이 땅 위를 흐르고 있다. 질퍽질퍽한 진흙물... 마치.. 나의 손에 늘어붙는 뇌수처럼? 제기랄! <꽈당!> 10!!!! 염병할. 아주 깨끗이도 닦아놓은 유리문에 나는 몸통의 절반을 갖다 박아버렸다. 어떤 놈이 문을 반만 열어 놓았을까? 유리 문에 머리 박아 되져버리라구? 참으로 단단하기도 하구나... 금 하나 가지 아니하였도다. 박살이 난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유리문에 몸통의 반이 걸린 채 달려나가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내 몸뚱이는 걸레짝 마냥 바닥을 뒹군다. " ......크크...크크큭..." 나는.............. 진흙탕 속에 빠져죽은 쥐새끼마냥... 대(大)자로 엎드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그래.. 웃어라... 이게 웃음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찝찌름하고 씁쓸한 흙탕물이 내가 낄낄거릴 때마다 입 안에 한 가득 들어왔다. 깔깔한 알맹이도 씹히고.. 뭐 나쁘지는 않군... 가슴이 아프다... 배가 아프다... 머리가 아프다... 부딪혀서... 아니면 넘어져서... 아니면... 또 뭔가 다른 이유 때문에? 닭똥 같은 빗방울들이 "이 미친놈아. 이거나 맞고 정신차려!"라고 꽥꽥 거리듯 내 머리통을 꽤나 아프게도 후려친다... 그러고보니.. 우산을 가져오지 않았다... 하... 가져오면 무엇하랴... 이미 흠뻑 젖어버린 것을...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벗어나자는 마음 뿐 일어나 걸어야 한다는 논리적인 사고는 이미 나의 곁을 떠난 지 오래. 하기야.. 내가 정상적인 사고기능을 한 적이 지난 며칠간 과연 얼마나 되는걸까... 빌어먹을. 비릿한 금속성의 비린내가 입안에 진동한다.... 캭하고 침을 뱉자.... 물 웅덩이 안으로 붉은 덩어리가 통~하고 떨어졌다. 팔뚝으로 코와 입가를 쓰윽 닦으니... 빗물과 섞인 피가 질질 흘러내린다... 그러고 보니 코가 얼얼하구만... 아마도 문에 부딪힐 때... 아작이 난 것은.. 비단 몸뚱이 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길래... 쓸떼없이... 왜 붙어있느냔 말이야... 코선생. 상처입은 짐승 마냥 네 발을 허우적 거리며 비가 쏟아지는 땅위를 열심히 기어가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워리워리... 그래... 나는 정말... 인간이고 싶지 않아.. 차라리 개였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워리워리는... 아니었다... " 강은우!" 누구? 그게 누구야? 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다급함과 조급증에 나는 미친 듯이 네 발을 놀렸다. 가야 돼. 도망 가야 돼. 어디로든지 도망가야 돼. 나에게서 도망가자. 피에 물든 도끼질에서 도망가자. 또 누구를 죽일거야. 나는... 이번엔 도끼로 사지를 나각 나각 절단낼까? 학생의 본분에 걸맞게 샤프나 볼펜을 심장에 쑤셔 박는 것은 어때? " 은우야!" 누가 내 목덜미를 확 잡아채며 내 몸을 돌렸다. 헉!! 잡지마! 막지마!!! 갈꺼야! 놓으라구!! 바둥바둥대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뺨이 화끈하다. 웃기게도 짜악 하는 경쾌한 살울림 소리는 그 뒤에 울렸다.. " 은우야!" 아하... 이게 누구야. 지훈이구나... 나의 사랑스런 장난감. 지훈이구나. 나를 늘 즐겁게 해 주기 위해 날마다 몸을 바치는 지훈이로구나. 그래.. 내가 으깨어 놓은 머리는 이제 안 아프니? 내가 자근자근 쪼개놓은 허리는 이제 안 아프니? 내가 헤집어 벌려놓은 가슴팍은 이제 안 아프니? 쭈쭈쭈쭈... 이제 안 아픈 모양이지? 네가 나를 치게? 우라질! 염병할! c8! 이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 주리를 틀 놈! 10새끼! 犬좆같은!! 썅! 이 ㅆ ㅏ ㅇ 놈의 새끼야!!!!!!!! 더 심한 욕 아는 사람 나 좀 가르쳐 주겠어? 죽어라! 죽어라! 이 새끼야! 그래! 나의 주먹아! 그의 얼굴을 뭉개버려라! 나의 다리야! 그의 몸뚱이를 짓밟아라! 헉헉!! 이 자식아! 일어나! 일어나! 그 똥물 구덩이에서 뒹굴지 말고 일어나!!! 안 일어나? 안 일어나? 이 염병할 놈아! 안 일어나? 내 운동화가 네 갈비뼈를 딱따구리 마냥 쪼아대도 안 일어날래? 이렇게 말야!!! 내 무릎이 너의 가슴팍을 찍어누르는데도 안 일어날래? 이렇게 말야!!! 내 주먹이 네 눈깔을 뭉개놓는데도 안 일어날래? 이렇게 말야!!! 이 자식아!!!! 뭐야!!! 네 놈이 도대체 뭐야!!! 뭔데 나를 이렇게 괴롭혀!! 그만 해! 그만 해! 다시는 내 꿈에 나타나지 마!! 나한테 얼마나 죽어봐야 속이 시원하겠냐!! 모든 게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미친 헛소리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거 아냐? 말을 해! 말을 해! 나는 이미 미쳐있어!! 미쳐있단 말이야!!! " 하아.. 하아... 어때... 따라 나오길 잘했지?" 나는 지훈의 멱살을 움켜 쥔 뒤... 겨우 입을 열었다..... 내 마음 속의 비명과 절규의 아우성은 가슴 저 안에 묻어 놓고... 웃음 섞인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었다... 킥... 지훈의 얼굴은 가히 엉망이다. 나 예술가해도 되겠어..... " 은...우..야." 그가 힘겹게 대답한다. 그 목소리! 제기랄!!! 그 목소리. 그 느릿하고 내 가슴을 후펴파는 목소리! 너 내 꿈에서도 늘.. 그런 목소리로 나를 불렀어! 알아! 그거 알아!!! " 부르지 마!!! 내 이름 부르지 마란 말이야!!!" " 은우야..." 이 새끼가 청개구리 고기를 처먹었나???? " 부르지 말랬잖아!!! 너 정말 죽어볼래? 한 번 죽어볼래?" 그것은...... 그것은..... 그냥 홧김에 한 소리다........... 누구나..... 정말 살의를 가지고.... 죽일 마음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 홧김이라는 것이.. 마가 씌웠는지.... 정말 실행에 옮겨져... 평생을 후회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억누르지 못한 감정의 발산으로... '죽인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그것은 계획된 의도가 아니다... 폭발하는 감정의 응어리이다... 나는....... 나는....... 정말 무언가를 생각하고.... 말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대답했을 때..... 쿡...쿡.... " .....이미 두 번이나 죽어봤어...." ........................................................아. 네 눈은 참으로 고요하구나....... 네 눈에 비친 나의 모습까지 환히 보일만큼..... 그렇게 까만데... 그렇게 까만데.... 어째서 그토록 투명하니....... 너의 눈에 비친 나는.... 야차......같다....... "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 나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리듯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말이지... 떨리는 것은 비단 목소리 뿐만은 아니야.. 나의 몸도.. 나의 가슴도.. 나의 머리 속도 아파서... 너무 아파서... 울고 싶을 만큼... 떨려온다..... 떨려온다..... 아파... 아파... " 은우야..." 지훈의 손이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닿는 것 같아서? 아니야!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라구!! 나에게 손을 뻗지마... 나에게 손을 뻗지 말아줘... " 알고 있었으면서...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나한테.... 잘해..... 준거야........" 아.. 눈 앞이 흐리다... 빗물 때문이야... 응. 그래. 빗물 때문이야.. " 은우야. 그건!" " 다가오지마!!!!" " 꿈 속의 너는 네가 아니야!! 강은우!! 그건 네가 아니란 말이야! 너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네가 느끼고 있어도! 진짜 네 모습이 아니야!!!" 지훈아.... 네가 말하면... 정말 그런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 하지 마.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나의 죄책감에서 도망가고 싶지는 않아... 안 들린다... 그래 안 들려... 지훈이 무어라고 하는지 나는 몰라.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그에게서 달아나 버렸다. 다시는 너의 곁에 가지 않을거야... 다시는 너를 바라보지 않을거야... 다시는 너와 함께 있지 않을거야... 나를.......... 이끄는.... 너의............ 주술에서....................... 벗어나기 위해..................... 쿡쿡쿡.... 도와 주지 마. 누구든지 나를 도와 주지 마... 제발.... 도와 주지마....................................... 나는............ 너에게서................도망갈거야..............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각성제 - 覺醒劑 stimulant drug 프로파민 또는 메틸프로파민이라고 불리는 중추신경계의 흥분제, 대뇌피질의 자극에 의한 각성작용이 있으며 소량은 상쾌감·활동감을 가져오지만 과용하면 중독증상을 일으키고, 습관성이 된다. 사용을 중지하면 금단증상이 나타나게 되어 의사·정서면에 변조를 가져오고, 무기력·불안·환각을 일으킨다. 각성제에 관한 범죄는 각성제의 상용에 의하여 습관성·금단성이 되어 동물적인 욕망에서 범하는 것과 중독성의 정신장애증상에서 범하는 것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절도·공갈·강도·매춘 행위가 행해지나, 후자의 경우는 폭행·상해·살인 등의 범죄에 이르는 일이 많다. 한국에서는 <향정신성 의약품 관리법>에서 각성작용이 있는 의약품의 제조·판매·사용 등을 규제하고 있다. ...............................이라고는 하지만..... 맘만 먹으면 각성제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 방 서랍장을 힘껏 열어젖혔다. <꽈당> 제기랄. 서랍이 아예 통채로 빠져 버렸다. 쿠쿠쿠... 내가 이렇게 힘이 세던가? 제대로 서 있을 힘 조차 없는 줄 알았더니... 어디서 이런 힘이 불끈불끈 솟아 오르나... 바닥에 나뒹구는 서랍 안을 나는 미친 듯이 뒤지기 시작한다. 뭐야... 이건 마치 동물의 왕국에서 본.... 모습과 비슷하다... 사자가.... 굶주린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 맨 먼저 어딜 먹는지 아는가? 그래... 배다... 그 통통한... 비정상적으로 통통해 보이는... 마치 못 먹어서 배가 부른 소말리아의.. 어느 아이처럼 배만 볼똑 튀어나온 얼룩말.... 사자는 그 배에 주둥이를 파묻고... 쩝쩝 피를 흘려가며... 내장을 아그작아그작 꺼내어 먹는다.. 커다란 앞 발을 이리저리 헤쳐가며.. 더 맛있는 부위를... 더 많이 먹기 위해.... 나의 꼬락서니가 지금 그러하다.... 얼룩말의 뱃가죽을 파헤치는 사자처럼 나는 서랍 안에 머리를 쳐박으며 쓰잘떼기 없는 것들을 마구 헤치고 있다... 무얼 찾느냐구? 어지간히도... 둔감하구만... 내가... 찾고 있는 것은... 각성제이다... 만약 당신이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매우 중요한 시험일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도 그 중요성을 하루가 멀다하고 다그치고 있다... 그러나... 졸립다.... 그럴 때는 자도자도 지치지 않고 괴롭히는 것이 바로 잠이다..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눈 앞에 보이는 각성제를 먹지 않고 배기겠는가? 물론... 나는 약물중독자가 아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에게는 각성제 따위는 듣지 않는다... 약은 물론이거니와.... - 듣지 않는다고... 수십 알씩 먹었다간 골로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게... - 커피를 사발로 들이켜도.... 그 지킬 것은 지키자는... 달콤새콤한 뻑갔스를 박스 채 들이부어도.. 잘 건 다 잔다...... 그리고......... 나는 각성제 따위를 먹어가며... 시험 공부를 할 만큼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시험이고 나발이고... 잘 보면 그만이고 못 보면 또 그만이다... 나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사람도 없거니와.... 뭔가 해 보겠다는 꿈조차 잃었으며.... 가지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어째서 각성제를 가지고 있느냐구? ................................................글세.... ...................................... 왜 가지고 있을까....... 자는 것이 무섭다던 어머니..... 자다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날까봐.. 못 자겠다 하시던 어머니.... 이 한 박스가 넘어 들어 있는 각성제는... 어머니의 유품이다... 황당하다고? 이 작은 각성제 상자를.... 어머니의 유품이라고 고이 모셔둔 내가 웃기다고? 그래.. 웃겨.. 웃기다.... 어머니의 기억 대부분은....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에 겨워 했을 때.... 어머니에 대한 최근의 기억을 떠올리면... 늘 함께 연상되는 것이.... 각성제이다... 결국엔..... 마지막 유언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잠을 자고 싶다..... 라는 것은.. 지독하리 만큼... 서글픈 아이러니 아닌가? 그래... 그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나 뿐일지도... 도대체... 나는 누구에게 궁시렁궁시렁 거리고 있는걸까.... " 하... 또 알아... 누가 듣고 있을지..." 피부가 차다.... 그러나... 몸 속은 바짝바짝 새까맣게 타 들어갈 정도로 뜨겁다... 방바닥은... 이미 물로 흥건하다... 나는 물귀신이다.. 그래 물귀신이다.. 누구 나와 함께 이 더럽고 지저분하고... 토사물의 악취로 가득차 있는.... 흙탕물의 방바닥에서 유유히 헤엄치지 않겠어? " 자면 안돼. 자면 안돼... 자면 안돼... 자면 안돼... 자면 안돼... 자면 안돼..." 나는 미친 놈... - 이미 미쳤지... - 마냥 웅얼웅얼 대며 새하얀 알약을 하나 까서... 입에 톡 털어넣는다... 그러고보니... 물은? 물 따위는 없으면 어때.... 아그작아그작..... 사자가 얼룩말의 내장을 씹어먹듯... 시장 골목 귀퉁이에서 한 아주머니가 순대를 맛나게 먹듯... 나 또한... 알약을 아그작거리며 씹어 먹었다. 무슨 맛인지... 나도 궁금해.... 그냥 약 맛이야... 또 하나를 깐다.... 그리고 또 입에 넣는다... 왠지... 구토증이 인다.... 안되지.. 안돼... 아깝잖아... 침을 잔뜩 입안에 모아... 함께 씹어 삼킨다... 무슨 맛이냐구? 그냥 약 맛이야.... - 이미 두 번이나 죽어봤어. - 환청... 나를 괴롭히는 환청... 이것은 내 죄의식의 말로에서 비롯된 것... 무시해 버리자... 그러나... 자꾸 눈물이 난다... 써서.. 그래.. 약이 지독하게 써서 그래... - 이미 두 번이나 죽어봤어. - 그가 알고 있었다... 역시............... 그였다... 그였던 것이다..... 나의 악몽 속에서... 죽어간 그는.... 꿈 속의 그였으며... 실제의 그였다.. 지훈아.... 내가.. 너를 죽일 때마다.... 너는 무슨 생각을 했니? 너의 그 악몽 속에서 매번 끔찍하게 죽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니? 나의 악몽은 너의 악몽이었고... 너의 악몽은 나의 악몽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가해자였고.. 너는 피해자였으며... 너는 희생자였고... 나는.......살인자였다.... 그래.. 나는 살인자다... 지금 너는 숨 쉬며 살아있지만... 너는 매번 죽어갔다.... 어떤 식으로? " 머리가 으깨지고... 등이 조각나고... 가슴이 파헤쳐졌다지 아마.. 쿡쿡...." 나는 또 알약을 하나 깐다... 하얗다... 제길... 푸르스름하다면 더 맛있게 먹을텐데... 이건 각성제가 아니라 삐약으라... 라고 자기 최면을 걸면서.. 말야... 푸른 색... 파스텔의 은은한 푸른색.... 지훈이 책상 위에 잘 개어 올려주던.... 푸른 색 수건... 향기... 마치.. 꽃밭에 서 있는 것 같던... 착각을 느끼게 한 그 향기... 그 속에 파묻힌.. 지훈이의 담배 냄새.. 채취.... 아작아작... 나는 이빨이 부서져라 알약을 으깬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하얀 냉장고 안.... 놈이 벼룩의 간을 빼 먹어라... 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 안에 든 것이라고는 벼룩의 간 마냥... 자질구레 한 것 몇 몇 개가 덜렁 들어앉아 있다... 뭘 먹어본지가 언제든가... 나도 사람이라고... 동물이라고.... 이 순간에도 먹을 것이 떠 오른다... 먹어보았자 소용없잖아... 어차피 둘 중 하나야... 뒤로 나오던가... 위로 나오던가.. 물론 형태는 변형되어서 말이지... 나는 끼득거리며 안에서 홍차 가루가 든... 통을 꺼내든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 티.. 레몬맛이 나는 냉홍차... 그 통을 들고 부엌 - 부엌 좋아하시네... 방 한 구석에 싱크대와 가스레인지가 덜렁 있을 뿐이다.. - 으로 갔다... 가다가... 내 옷에서.. 흘러내린 물이 흥건히 고인 곳에서 미끌하여... 머리통을 깰 뻔 했다.. 끼득끼득.... 깨면 또 어때.... 누가 이런 나의 상태를 본다면... 대낮부터 단단히 취해 있으리라 생각하겠지.. 그래.. 난 취해 있다... 이 비정상적인.... 그리고 감당하기 벅찬... 몽롱한 현실과 악몽의 독기에 취해 있어... 국그릇에.... 수돗물을 받아... 아.. 그러고보니... 먼지가 둥둥 떠 있다... 설거지를 한 지가 언제더라... 먹고 죽기야 하겠어... ....... 홍차가루를 들이 부었다... 쿠쿠쿠... 뿌연 암갈색의 가루알갱이들이 스스스스스스 소리를 내며 물에 빨려 들어간다... 새콤한... 레몬향과... 달착지근한 향이 동시에 몽글몽글 솟아 올라 후각을 자극했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나는 물반... 가루 반인... 그 정체불명의 음료를 꾸역꾸역 마셨다.................... 마셨다? 아니.... 손으로 떠 먹었다... 으.. 시다... 셔... 입에 침이 잔뜩 고인다... 셔.. 셔... 시다... 하지만... 맛있다... 달콤도 한 것이.... 이제 무얼 할까.... 그래.. 나가자.... 밖으로 나가자... 나를 죄여드는 이 무시무시한 옥탑방에서 탈출하자... 좋다.. 자지만 않는다면.... 내가 자지만 않는다면... 죽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야... 내가 잠 만 안 자면.... 그 누구도 죽지 않을거야... 내 악몽의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긴 채 기회만 노리고 있을 나... 그 시뻘건 혀를 뱀마냥 쉿쉿 날름거리며... 내가 자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네 뜻대로 되게끔 내가 그냥 나둘 줄 알아? 나가자.... 가슴이 뻥 뚤린 채 하염없이 비를 쏟아내고 있는 잿빛 하늘 아래를 거닐자... 걷다가 지치면... 기어서라도... 나의 악몽 속에서 벗어나자...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다 하더라도.... 걸어가자.. 걸어가자... 뫼비우스의 띠 마냥 끝도 시작도 없을 나의 악몽 위를 거닐어 보자. 흥겹게 산책하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비에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갔다.. 물론 우산도 없다... 어차피 묻은 흙탕물은 밖에 나가 미친 듯이 퍼붓는 빗 속을 한 두 시간 걷고 나면 다 씻겨 내려갈 터.... - 어차피 묻은 피는 밖에 나가 미친 듯이 퍼붓는 빗 속을 한 두시간 걷고 나면 다 씻겨 내려갈 터 - 레스토랑의 주방... 하얀 타일 위에 흥건하던 붉은 피... 나는 바지 주머니에 한 가득 들어있는.... 각성제 꾸러미를 만지작 만지작 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어둡다.... 어둡다... 내 마음 만큼이나.. 어둡다... 해가 중천에 떠 있을 시각이지만... 저 시커멓고 음흉한 비구름은.... 빛이란 빛은 낼름 집어 삼킨 뒤... 도통 뱉어낼 생각을 않는다.... 해야... 해야..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잡아 먹겠다.... 이미... 네가 잡아 먹었다구? 쿠쿠쿠.... 그래... 무슨 맛이야? 비구름이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응.......................................... 그냥 약 맛이야... " 야.... 너... 혹시 은우한테 맞은 것은 아니지?" 성혁이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서는 스스로 부정하는 듯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 그 샌님이... 너를 이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나는 그 도끼 살인마겠다." 성혁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주위에 있던 녀석들도 덩달아 혀를 찼다.. " ..........." 지훈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은우의 빈 자리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던 성혁은...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 갑자기.. 은우가 나가버리고... 너도 따라나가고... 그러더니.. 너는 그 꼴이 되어서 돌아오고... 은우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는데도... 안 돌아오고.... 재준이가 전화했는데 은우 집에 없나보더라. 짜식. 책가방하고 우산도 내버려두고 어딜 간거야 참나..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오늘 학주가 맡은 국사 시간이 들은 날인데... 미쳤어... 미쳤어." 순간 지훈의 눈썹이 움찔했다. " 그나저나.. 너 어떡할거냐? 지금까지 선생들 들어오는 족족 네 얼굴 보고 왜 그러냐고 계속 묻잖아... 태권도부의 유망주인 네가 순순히 얻어 맞았을리는 없는 노릇이고.. 울 학교 짱도 너한테 손 못대는 데 도대체 누가 그 짓거리를 해 놓은거야? 아주 볼만하다. 볼만해... 너 학주가 계속 꼬치꼬치 물으면 어떡할래?" " 혹시... k고 짱이 울 학교에 뜬 것 아냐? 은우가 재수 없게 걸려들어서 네가 구해주려다 얻어 터진 것 아냐?" " 정신 나간 놈. 너 소설 쓰냐?" 성혁이 덜렁 끼어든 녀석의 뒷머리를 후려치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 ................" 지훈은... 묵묵부답이었다.. " 그런데... 말야... 좀 이상하다..." 성혁이... 지훈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입가에 배실배실 걸려있는 장난기로 보아... 시덥지 않은 장난으로 지훈에게서 이렇다 할 반응을 끌어내볼까... 시도해 보려는 모양이었다. " 어제 아무리 비를 흠뻑 맞고 와서 몸이 안 좋다해도 그 도끼 살인마 이야기를 듣고 까무라 친 것도 좀 그런데.... 오늘도 그 살인마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밖으로 나가버리다니.. 뭔가 수상하지 않아? 늘 배시시 웃기는 하지만 음침해 보일 정도로 말도 없고 게다가 아까 아침에 화를 내는 걸 보니까 한 성질 하는 걸 감추고 있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은우 그 녀석이 그 도끼 살인...마...." ............성혁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지훈이 정말.. 죽일 듯한 눈으로... 노여움으로 번뜩이는 눈으로 성혁을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 야...야.. 왜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쳐다 보는거야? 무..무섭잖아." 성혁이 난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이마의 식은 땀을 흠칫 닦아냈다. " 성혁아." 지훈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러웠다. " 응?" " 너............. 밤길 조심해라. 내가 도끼들고.. 너 찾아간다..." " 와하하하!! 최지훈. 네가 그 도끼 살인마였나?" 주변의 있던 아이들이 지훈의 어깨를 툭툭 쳐대며 웃었다. 그러나 성혁은 웃지 못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입은 묘한 웃음을 띄고 있는 듯 했지만 눈 만큼은... 지훈의 그 강렬하고 진한 눈동자는 마치 스스로 빛을 내뿜듯 번뜩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지훈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물론 그런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지훈과 정면으로 앉아 있던 성혁 뿐이었다. 갑자기 지훈은 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은우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 야! 너 뭐해?" 한 녀석이 묻자 지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은우의 책가방을 챙기고 양동이에서 검은 우산을 꺼내들고.. 자신의 자리로 와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 야. 너 뭐하냐니까? 곧 있으면 점심시간 끝나." " 재준아!!!" 지훈이 우렁찬 목소리로 반장을 불렀다. 아이들과 뒤늦게 밥을 먹고 있던 재준이 귀찮은 듯 숟가락을 휘둘러대며 맞고함 쳤다. " 왜 불러!!!" " .......네 수첩 좀 내놔봐라." " 왜?" " 은우. ....은우...집 주소 좀 알게." " 은우 집에 없어. 전화해도 안 받아." " 알아. 그래도 내 놔." 지훈의 단호한 말에 재준은 꾸물꾸물 거리며 수첩을 건넸다. " ... 선생님들이 어디 갔냐고 하면.. 은우 아파서 내가 집에 데려다 주러 갔다고 해." " 어라? 너 땡땡이야? 은우 핑계대고?" " ........나도 아파서 조퇴야...." 지훈은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신의 얼굴을 재준의 코 앞에 들이밀었다.. " 알았어. 알았다구.. 망가진 네 얼굴.. 밥맛 떨어져." " ...고맙다. 은우 일로.. 신세 지는 것 두 번째구나." " 갈려면 어여 가. 점심 시간 곧 있으면 끝나. 선생들 올라온다구." 재준은 숟가락으로 지훈의 명치 끝을 쿡쿡 찌르며 투덜거렸다. 지훈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반짝이는 은빛 숟가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지훈을... 성혁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좀 전의 그 섬뜩하리만큼 노기에 찬 시선을 떠올리면서... 여긴 어디? ......................................... 음산하리 만큼 한적한 공원, 나는 누구? ......................................... 미쳐버린 얼간이..... 강은우. 왜 있냐구? ......................................... 쿠쿠.. 갈 때까지 다 갔거든. 우거진... 또는 푸르른...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내 입으로는 미친 女 머리마냥 제멋대로 자란 나뭇가지 사이로.... 까맣고 작은 팥알만한 눈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제기랄... 그만 봐. 이것들아... 사람 첨 보냐... 아니면... 내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대머리 독수리마냥 달려들어 허겁지겁 내 속살을 파먹을거냐? 그래봤자... 네 놈들은.... 참새일 뿐인걸... 그래.. 그 안에 들어가 있으니 아늑하니? 옹기종기 붙어 앉아 무슨 이야기들을 그리도 속닥거리니... 나도 좀 알려다오. 너희들은 날개가 달렸으니 어디든 날아가겠지. 혹시.... 어스름한 골목길을 지나가다... 나를 본 녀석은 없니? 어디 아는 척 좀 해보렴. 도끼들고 피에 절은 장아찌 마냥... 밤을 헤매던 나를 본 녀석은 없니? 아하.. 그렇지... 너희들은 밤에 자야지... 그리고... 이렇게 비가 오는데.... 죽기 살기로 날아 다니는 골빈 녀석들이 어디 있을까... 너희들 머리가 아무리 새대가리라지만... 그래.. 내가 너희들은 너무 무시했나? 미안해... 미안해... 예전에 네 친구를 먹은 적 있어. 맛있더라. 꼬챙이에 끼워진 채 가무잡잡하게 잘 익은..... 나 배고픈가 보다... " 우욱!" 또 속이 울렁거린다.... 꼬챙이... 꼬챙이... 갑자기... 그 꼬챙이에 끼워진 것이 참새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들자 놀란 나의 위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벤치 아래로 몸을 숙인 채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누가 들으면 임신한 여인네가 비관자살하러 공원 왔으리라 생각했을까나? 먹은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지.... 싶은데... 뭐가 식도를 타고 울컥 치민다. 아!!! 먹긴 먹었군... 이미 늦었다.. 다 게워 내버렸으니까... 남김없이 깔끔히.... 내가 토해낸 물은... 비에 씻겨 벌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 아니 춥진 않다... 물 속에 계속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따뜻하다... 나는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과 다름없다. 장대비가 쉴새없이 나를 후려치고 있으니까... 내가 추위를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수십만개 아니 수백 만개.. 아니 수천만개? 여하튼... 양동이로 연신 물을 붓듯... 빗방울이 나를 감싸고 있으니까... 공원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혼이 나간 듯... 퀭한 눈에... 거렁뱅이나 다를 바 없는 몰골의 녀석 하나가 나무 벤치에 앉아... 비를 맞고 있을 뿐이다.. 그래.. 그 녀석이 바로 나야...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조용히 좀 해.... 머리가 아프니까...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그만 좀 해... 머리 아파..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파.. 너희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내 머리를 쪼아 대. " 닥쳐!! 몽땅 구워 먹어버리기 전에!!!" 순간 녀석들이 입을 다문다... 그 팥알 같은 까만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제길.. 다 파내버릴까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또 각성제 하나를 까 먹는다... 몇 개 째지?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고.. 결국에 내 피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들은.. 한 두 개도 안될텐데... 강은우.... 사탕 먹듯 먹는구나... 맛있냐? " 그냥.. 약 맛이지... 쿠쿠쿡."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저 애 좀 봐.> 쿠쿠쿠... 달리 새대가리일까... 그 새 또 까먹고 입을 나불대는구나... 너희들의 뇌는... 호두알보다도 작겠지? 그렇지? 얘들아? 입 좀 다물어.. 입 좀 다물어... 입 좀 다물어!!!! " 주둥아리 좀 그만 나불대!!!!!" 가득이나... 힘도 없는데 악을 썼더니.. 숨이 차다... 그러나 속 시원하다... 하... 다 내쫓아버렸다... 놈들은... 그 파내고 싶을 만큼 얄미운 눈으로 날 노려보며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 <미친 놈. 우리가 먼저 왔는데.> 놈들이 날아가면서.. 나에게 톡하니 쏘아붙인다.. .... 내 맘이야....... 아... 너무 악을 썼나.... 정말로 힘이 빠진다... 나는 벤치에 벌러덩 드러 누웠다... 이왕이면 정갈하게 눕자.... 무슨 미친 생각...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며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양손을 맞잡아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마치.... 관 속에서 작별을 고하는 시체마냥... 그 백짓장 같은 얼굴로.... 그 푸르스름한 입술로.... 남은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자신은 멀리 멀리 너울 너울 가버린다... 편안한 얼굴로.... 어머니... 어머니도 가실 때 편안하셨어요? 내가 이렇게 누워 있으면... 혹시... 지나가던 사람이... 말뚝을 찾아 내 가슴에 박아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송곳니를 번뜩이며 비명을 지를까? .................................................재밌다... 그래... 재밌다.. 미치도록 재밌다... 재미있어서.... 코웃음이 다 나온다... 눈을 뜨고 있으려니까... 빗방울이 눈알을 후려쳤다.. 윽... 뭉개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눈을 감는다... 잘려구? 아니 안 자.... 나는 눈을 감은 채... 또 각성제를 꺼내든다... 둔해질 때로 둔해진 손가락을 놀려... 알약을 까는데.... 제길.. 제길... 제길... 놓쳐버렸다... 이 놈의 손이 얼어붙었나? 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거지... 하긴... 지난 며칠 간 내 뜻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었을까.... 이것이 인생이랴....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비켜 간다... 그리고 최악의 것을 가져 온다.... 그리고는 사탕 발림 마냥... 가끔 좋은 일도 주곤 하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의 악몽.... 계속되는 슬픔. 분노. 원망..... 지난 몇 년간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 한 일은 도대체 몇 개나 있었을까... 나에게... 이성은... 한가닥의 가느다란 실과 같아서.... 버티기가 이제는 힘이 들다... 똑~하고 끊어져 버리면.... 어찌 될까... 이 세상과 작별? 그러면 왜 나는 미리 죽지 못하는 거지? 지금이라도 한강으로 달려가 다리에서 퍼런 강물에 뛰어들면 그만인데.... 장마 때라... 물이 불어나.. 시체도 찾지 못할거야... 한참 후에나... 저어기 서해 앞바다의 새우잡이 어선의 그물에 팅팅 불은 내 시체가 올라오겠지... 나의 뻥 뚫린 눈구멍과 콧구멍과 입 안에... 가느다란 실치들이 득시글득시글... 귀와 배꼽에는... 해삼이 머리를 쳐박고 꿈틀거릴까... 해삼이 맛있는 이유는 시체를 먹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그러고보니... 칼치도 그래서 맛있다지.. 냠냠쩝쩝... 내 살은 너희들에게 먹히고 너희들은 또 누군가에게 먹히고.. 오호라.. 공수래 공수거... 인생은 덧 없어라... 그러나............내가 죽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어머니를 뵐 면목이 없어서........... 둘.... 은영이... 때문에... 내가 죽는다면... 은영이는 그대로 나의 전철을 밟아... 또 하나의 강은우가 되어..... 결국은 아버지와 그 여자 손에... 정신병원에 가게 될거야.... 셋.... 가끔..... 아주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미리... 힘든 일을 겪고 있는거야... 이것만 참아내면... 이것만 이겨내면... 좋은 일이 있을거야... 언젠가...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잖아?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거야... 지금 죽어버리면.... 내가 다 느껴보지 못한... 내가 다 얻지 못한.. 그 행복들은 어떻하지? 아깝잖아.. 억울하잖아... 억울해....... 억.......울..........해........억.................울............................................................................................. .......................................................................................................................................................................................... ............................................................................................................................................................. ............................................................................................................................................................. ....................................음.................................................................................................................. 나는.... 몸이 날아갈 것 같다.. 오호라. 이것이 바로 각성제의 효과? 히히히.. 헤헤헤.. 흐물흐물한 웃음이 입가에 뭉그러지며 나는 두 발을 바삐 놀렸다. 오른 팔이 욱씬거리기는 하지만... 뭐 괜찮아... 나는 왼손잡이니까....... 왼손? 음... 내가 언제부터 왼손잡이 였더라? 몰라서 물어? 잘 생각해 봐.... 도끼로 그 년의 머리를 내려칠 때 사용한 손은? 정답!!! 왼 손입니다! 그럼... 그 늙은이의 등짝을 향해 멋들어지게 도끼를 내던진 손은? 정답!!! 그것두 왼 손이지요.............. 그래.. 왼손이었구나... 그것 봐.... 나는 왼손잡이야.... 무엇을 찾았냐고? 바로 저 것이야... 저것.... 보이지? 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말이야.... 이 오밤중에... 오밤중? 아직 한 낮이 아니었던가................ 여하튼.....이렇게 비가 오는데... 왠 술을 저리도 먹었을까....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그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지난 번처럼 미행을 들켜 일을 그르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치명적인 오점이 되어버렸다. 두 번의 실수는 안된다. 저 인간.... 주변의 사람이 누가 누군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코가 삐뚤어지게 마셨지만... 그래도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지? 끼끼끼끼... 여기가 어딘지... 시간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필요는 없다. 어디든 간에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기 마련이고.... 지금 시간은... 모두가 잠든 깊고 깊은 밤.... 잠이라....... 잠? 잠? 헉! 저 남자가 몸을 돌리.............려고 하는 듯 보였으나... 단지 비틀거린 것이었다.. 하얀 우산이 빙글빙글 돈다... 그는 마치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 아이마냥... 우산을 돌리고 있다.. 끼끼끼... 하얀 우산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도 빛을 발하며 뱅글뱅글 잘도 도는 하얀 우산이 나에게 최면을 거는 듯 느껴진다. <나 잡아봐요~ 나 잡아봐요~> 그래. 조금만... 잠시만 기다리렴... 잡아 줄게... 잡아서 발기발기 찢어줄게. 기다려. 기다려. 네 주인도 찢어줄게. " 하악 하악." 숨이 가빠온다. 이것은 나의 짜릿한 흥분으로 인해서이다.. 멀리 하얀... 조금은 푸르스름해 보이기도 하는... 윽.. 갑자기 불쾌해지는 이유는 무엇? 가로등의 불빛이 보인다... 하지만 워낙 멀기에 여기까지 밝게 비추어 지진 않는다... 갑자기 조바심이 난다.. 예전의 조바심과는 차원이 다르다.. 뭔가 불길한.....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은... 그것은... 순수한 하얀빛이 아닌.... 푸르스름한 백색의 가로등 빛 때문인가? 미신 따위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육감은 믿는다...... 인간에게는 눈. 코. 입. 귀. 피부.... 오관으로는 느낄 수 없다고 생각되는 감각..... 사물의 신비한 점이나 깊은 본질을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육감... 그 육감이 지금 나에게 말하고 있어.... 주의하는 것이 좋아... 라고.....................................내 쪽에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 게다가... 저 하얀 우산이... 나를 유혹하고 있다. <나를 잡아 줘요~ 나를 잡아서 발기발기 찢어줘요> 오냐오냐... 알았다.. 보채지 말아라... 어련히 알아서 내가 귀여워 해줄까... 나는 운이 좋아... 나는 미치도록 운이 좋아.... 불길한 감 따위는.... 나의 운으로 이겨내자...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 나가는거야." 끼끼끼... 멋지다... 망설이지 말아야지. 저 예쁜 우산이 나를 유혹하는 데 내가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 으으으으으으아아악 쌔애애애애애~♪ 쓰으으으을피이이이이우누느으으은~♪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만은...................................나는 잠깐 멈칫했다.... 목구멍부터 따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음치이다... 나는 저 녀석이 질러대는 비명소리를 미리 상상하며 혐오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포기할까.. 포기할까... 다른 녀석을 찾아 볼까... 주위를 두리번 거렸으나... 이 한적한 공원에 저 악악 거리며 노래도 아닌 괴성을 질러대는 녀석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여기.... 언젠가.. 와본 듯한....> 게다가 나는 이 공원을 버스 타고 자주 지나치기는 했지만... 안으로 직접 들어와 본 적은 처음이다.. <아니야... 와 본 적이 있어... 언제더라....> 여차 길을 잃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래도.... 목부터... 따야 겠다... <잠깐... 기다려... 여기.. 처음 와 본 것이 아니야....> " 이봐요. 아저씨." 나는 그를 불러 세운다. " ............." 그가 빙글 몸을 돌린다... 위태위태 하다... 당장이라도 균형을 잃고 꽤꼬닥 쓰러질 것만 같다. 왜 대답을 안 하지? 그 하얀 우산에 가리어... 그의 얼굴은 보이질 않는다... 보이는 것은..... 감색 양복과.... 반쯤 풀어진 물방울 넥타이... 센스한번 끝내주는 군... 물방울 넥타이라니.... 게다가... 역시 노래 뿐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꽤나.... 신경을 거스른다. 목소리라니? 목소리라니? 무슨 목소리? 저 사람은 대답을 안 하지 않았어? " 아.. 다른게 아니고 아저씨 이 지갑 아저씨 것 아닌가요?" 나는 오른손을 들어 작은 지갑을 내밀어 보이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물론 이것은 저 사람의 지갑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 지갑도 아니다... 어딘가에서 주웠을 뿐이다... " .................." 또 침묵... 그러나... " 어. 아저씨 것 아니라구요? 분명히 아저씨가 떨어뜨렸는데요."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나는 지금... 원맨쇼를 하고 있나? " ......................" 보인다..... 보인다.. 보인다. 새하얀 우산 아래로 그 남자의 입이 보인다! 그는 분명히 입을 우물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내 귀에는 안 들리는거지? 나는 왜 못 듣는거지? 순간 나의 오른 손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 쥐고 나의 왼손은 품에서 도끼를 꺼내들고 목에다 들이 박는다! < 그만 둬!! 그만 둬!!! 제발 그만 둬!!!> 내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야!! '내' 귀에 들리지 않았을 뿐이야!! '나'는 자고 있었어! '나'는 자고 있었어!! 깨자! 깨자! 이 악몽에서 깨자!! 깨고 싶어!!! 깨어나고 싶어!!! 그의 벌어진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뜨거운 피가 왈칵 내 얼굴에 와 닿는다. 뭔가 이상하다... 손이 따로 논다... 손이 따로 노는 이유는.................. <으아아아아악!!!! 으악! 으악!!> " 끼끼끼끼끼 " 나!는 오른 손을 빙빙 돌리며 쥐고 있던 것을 멀찍이 던져 버렸다. 데굴데굴... 그것은 바람 빠진 공처럼 굴러가... 멀찍이 있는 벤치 쪽으로 향한다.... '나'의 계속되는 비명!!! 나!는 손도끼를 들고 끼득끼득 거리며 우산대를 부수고 그 하얀 방수천을 갈길갈기 찢은 뒤.... 남자의 몸뚱이 위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그리고... 생선가게 아저씨... 생선 토막 내듯..... <으아악! 으악!! 으아악!!!> '나'의 비명은 멈출 줄 모른다. 숨이 컥컥 막혀 온다.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않아!! 시선을.. 헉헉.. 시선을 돌려야...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 않단 말야!!!! 순간... 나의 눈은 네 개가 되어버린 걸까... 나의 눈은 감기고 '나'의 눈이 뜨여진걸까... '나'의 시선은 합체로봇 분리모드 마냥... 분해된 남자에게서 벗어나.... 아직도 구르고 있는 그것을 향한다... 왜... 마주쳤을까... 왜 마주쳤을까.... 왜 하필.... 구르고 있는... 그의 눈과 마주쳤을까... -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봤어 - 이제야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봤어 - 아니야.. 아니야.. 두 번이 아니야... 이 번은.... 세 번째야... 세 번 째라구!!! 지훈아!!! 지훈아!!! 어서 깨어버려!! 어서 일어나!!! 나의 악몽에서 달아나!!! 숨이 막혀. 숨이 막혀. 격하게 움직이는 응어리들이 '나'의 가슴 속을 틀어막으며 꿈틀거린다. 지훈아!!! 달아나! 나의 악몽에서 달아나! 어서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순간..... 그 무표정하던... 피에 젖은 지훈의 얼굴... 그의 시선은 '내'가 아닌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꺼지는 불꽃마냥 사그러 들었고.. ...............그의 얼굴은.... 곧....... 중년 남자의 지치고... 창백한 얼굴로 바뀌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낯선 얼굴... 낯선 중년 남자의 얼굴... 신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온 몸으로 울었다... 소리내어 우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안도감... 그가 '나'의 악몽에서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죄를 용서받은 듯한 느낌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지훈아... 지훈아.... '나'는 목 놓아 지훈이를 불렀다... 가슴 속으로... '나'의 입은 제 기능을 할 수가 없으므로.... 이제는 '나'만 깨어나면 된다.... 나는 '나'의 이런 고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전히 열심히... 아마도 이 빗속에서도 땀을 뻘뻘 흘려가며.... 해부실험에 열을 올리고 있다.... 나의 그 끝없는 열정과 탐구력과 인내력이 '나'는 경외롭기 까지 하다... 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나갈까.... 지훈이가... 또 전화를 해 줄까? 아니면... 여기서 저 남자와 아니... 저 남자들과 살아야 하나. 여기서? 이 악몽 속에서? 오손도손? 저 남자의 손군을 껴안고... 저 남자의 머리군과 마주보며 노래를 부르다가.. 저 남자의 발군과 함께 춤을 추어야 하나?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나'는 영원히 여기서 갇혀 있어야만 해...... 왜냐구? '나'는 집에 있지 않으니까... <언젠가 와본 듯한.....> 그럴 수 밖에... 여기는 '내'가 잠들어 버린 그 공원이니까... '나'의 시선은... 지훈이 응시하던... 그 곳으로 향한다... 벤치 위... 그 남자의 머리가 굴러간 그 바로 위... 누군가가 벤치 위에.. 누워 있다... 가지런한 자세로.... 두 발을 모으고..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나 죽었소.... 관 속의 시체마냥.... 그가 누구인지... 안다... 알어... 알고 있어.......................................저 사람은..... 저 사람은.... ...........................................'나'...................................... 벤치 위에........ 내가 누워 있다..................................................................... '나'는 이제 나이다.... 나는 이제 '그'이다... - 꿈 속의 너는 네가 아니야. 그건 네가 아니란 말이야. 너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네가 느끼고 있어도. 진짜 네 모습이 아니야. - 이런 때 지훈의 말이 떠오를게 뭐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그'의 시선이... 나의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그' 역시....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다. " 얼레? 저건..." '그'의 첫마디.... 뭔가...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 끼끼끼끼끼...." '그'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살점이 묻어 있는 도끼를 다시금 고쳐쥔다... 꽤나... 세게... 왼손의 근육이 흥분으로 바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무슨 짓을 하려는거야.. 이 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아니... 나를 향해 걸어간다....... 싫어! 싫어! 안돼! 안돼!! 가지 말란 말이야!! 가지 마!! 나에게 가지 마!!! 죽음의 공포!! 내가 죽을 때!! 내가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해낼 때 나의 눈동자에 박히는 것은 또 다른 내 모습일까? 적어도 적어도 죽는 순간에 나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으면!!! 이 나무꾼 녀석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일까? 나는 나무가 아니야!!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가지 마! 나에게 가지 마!!! 가지 말란 말이야!!!! " 끼끼끼끼.. 다음은 네 차례야." 비 속에 누워 있는 나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양 편안하게 자고 있다. 편안하지 않아!! 편안하지 않아!!! 일어나야 해! 일어나야 해!! 이 빌어먹을 악몽에서 깨어나야 해!!! 나는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 어떻게 죽여줄까나?" 그가 아주 흡족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 오로지... '그'의 안에 갇혀 있는 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도와 줘!!! 도와 줘!!! 누가 나를 도와 줘!! 제발!! 나의 머리 속은 한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한 채 오로지 그 한 단어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공기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것만이 소리는 아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내 안의 모든 감정을 다 실어... 소리쳤다.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최지훈!!! 지훈아!!! 지훈아!!! 지훈아!!! 도와 줘!!!!!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물 속을 부유하는...... 해파리..... 너울너울.... 투명하고 물컹거리는 촉수를 흐늘흐늘 흔들며.... 목적도 없이... 갈 곳도 없이.... 흐느적.... 흐느적.......... 나의 의식은.... 그것과 같다....................... 나는...... 그 짧은 찰나.... 발걸음 하나를 떼는 그 1초도 안될 법한 그 시간 속에서.... 누워 있는 나... 죽음을 기다리는 나.... 의식은 내 몸을 떠나 나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데.... 나의 육체는 지금도 눈을 감은 채 조용히 누워 있을 뿐이다.. '그'의 도끼날이 나의 가슴을 쪼개놓아도.. 혹은 머리를 갈라놓아도... 또는 사지를 자른다하더라도...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나는 살아있어.. 여기 이렇게 살아있어! 봐! 봐! 숨쉬고 있잖아. 저 파리한 입술로 숨을 내쉬고 있잖아. 나는 살아있어! 살아있어! 죽을 순 없어! 죽고 싶지 않아! 지훈아! 도와 줘! 지훈아 도와 줘! 누가 나를 도와 줘요!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 맹목적인 삶에 대한 욕구. 늘 나태하고 허무했던 나의 영혼이 삶에 대한 갈망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대로 새하얀 재가 되어버린 다면 나는 신조차 죽여버리고 말겠어! 나는 죽고 싶지 않단 말이야!!!!!! " 은우야!!!!!!!" 환청일까? 나의 이 격렬한 삶에 대한 갈망이 불러일으킨 환청일까? 그러기엔 너무나도 강렬한 목소리! 누군가 멀리서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깨어나야 해! 깨어나야 해! 나를 부르는 저 소리에 이끌려 이 악몽에서 깨어나야 해! " 은우야!!!" 깨어나고 말꺼야! 깨어나고 말꺼야! 하느님! 당신이 나에게 의지란 것을 심어준 이상 나는 이 악몽의 족쇄에 붙들린 채 신음만 하고 있진 않겠어!! 나의 의지는 나의 것! 나의 꿈도 나의 것! 그 무엇에도 휘둘리지는 않겠어! 이 빌어먹을 악몽 따위!!! 설사 나를 구속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 영혼까지 집어 삼키게 나둘수는 없어!!! 나는 목!각!인!형! 이 아니야! 살아숨쉬는 인간이라구!! 나의 의지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되어!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물보라가 되어! 나를 일깨운다!! <꽈앙> 머리 속에서 푸르스름한 번개가 작렬한다. 나의 뇌를 태울 듯이! 그것은 나의 의지이자 나의 영혼. 이 악몽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몸부림이다. " 허억!" 나는 눈을 떴다. 앞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섭게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거무스름한 인영이 보인다. 그에게서 피냄새가 물씬 풍긴다. " 지훈아!!!" 어디서 용기가 나왔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작은 새가슴 마냥 쿵쾅거리던 나의 가슴 그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너의 이름이.. 너에 대한 생각이.. 주술이 되어 나를 이끈다.... 나는 왼손을 허공에 치켜드는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히려 그것이 나의 목숨을 구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어설프게 몸을 피하려 했다간 그의 왼손에... 아니 그가 왼손에 들고 있던 손도끼에 찍혀 세상을 하직했거나 피를 흘리며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 그는 누워있던 내가 발딱 일어나 자신에게 달려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어깨로 그의 배를 있는 힘껏 밀어붙였다. 마치 럭비선수가.. 혹은 아이스하키선수가 상대편을 짓뭉개고 싶어 안달하듯 말이다. 동시에 나와 그는 바닥에 뒹굴었다. <딸깡> 그의 손에서 날아간 손도끼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가 온 몸으로 토해내는 죽음의 냄새. 피냄새가 나의 심장을 죄어든다. 이 때다! 이 때다! 나는 도망을 쳐야 했다! 그에게 등을 보인 채 지훈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죽기 살기로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만일.. 그랬다면... 나의 등은 온전했을까? 그가 자신이 놓쳐버린 흉기에 손을 뻗는 것을 보며 나는 ...만일 그랬다면 끈적한 웃음을 보이며 자신과 같이 살자던 노인처럼 등에 도끼날을 박은 채 바닥과 강렬한 포옹을 했을거라 생각했다. 이 새끼야! 네 놈이었구나! 나를 그 악랄한 악몽의 세계에 초대한 것이 바로 네 놈이었어!! 그 여자의 머리를 수없이 난도질하여 으깨어버리고 - 지훈의 머리를 수없이 난도질하여 으깨어버리고 - 노인의 가슴에 숟가락을 쑤셔 넣어 헤집어놓고 - 지훈의 가슴에 숟가락을 쑤셔 넣어 헤집어놓고 - 저 남자의 몸과 머리를 나각나각 잘라놓은 - 지훈의 몸과 머리를 나각나각 잘라놓은 - 그 놈이 바로 네 놈이었어!!!!! <툭> 가슴 속의 실 한가닥이 부르르 떨리며 팽팽해지더니... 뚝 하고 끊어져 버린다.. 끊어져 버린 것은 나의 이성. 나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악의에 찬 본능과 치열한 증오 뿐이다. 나는 도끼를 붙잡으려는 그의 등뒤에 올라타 찰싹 달라붙어 그의 목덜미를 힘껏 물었다. " 으아아아악!" 그래! 이 개같은 놈아! 질러라! 소리! 너에게 죽어간 사람들과 똑같이 비명을 질러라! 네가 그랬지? 돼지처럼 꽥꽥 거린다고? 그래! 너도 어디 한번 돼지 목 따는 그 비명을 질러대 봐!!! 목 근육과 머리가 저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이 사이사이마다 불끈거리며 몸부림치는 그의 힘줄들이 느껴졌다. 나는 좀 더 내 이들을 효율적으로 박아 넣기 위하여 그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우두둑> 내 손에 한 웅큼 쥐어진 그의 머리카락이 뽑혀 나왔다. 그래! 어떠냐!! 이대로 네 머리가죽을 벗겨 내주랴? 적어도 나는 그 할아버지보다 힘은 더 센 모양이로군!!! 투두둑 끊어지는 느낌들과 함께 비릿한 피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순간 내 흐릿한 시야에 반짝이는 물체가 흠칫 지나갔다. 등 뒤가 서늘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이라는 걸 직감. 그의 목에서 떨어져 나왔다. 큭. 웃기다. 그는 손도끼로 자신의 등 위를 휘젓고 있었다. 그가 팔이 길었다면... 자기 뒷골을 후려쳤을 수도 있을텐데. 아쉽다.. 아깝다.. 정말 아까워.. 젠장.. " 은우야!!! 은우야!!!" 지훈아! 나는 그제야 내가 정말로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해! 갑자기 두려움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하지만... 아직도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는 그의 옆구리 께로 늘어진 오른 손을 본 나는 순간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띄었다. ' 이봐. 나무꾼 선생..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나는 말야.. 적어도 이것은 알고 있다구.' 손목과 팔꿈치의 그 중간.. 정확히 나의 발 사이즈 만큼의 팔뚝. 나는 발을 들어 그의 오른 팔을 힘껏 짓밟았다.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나에게 그 묘한 웃음을 흘리며 같이 살자던 할아버지의 볼에 끈끈한 키스라도 날리고 싶을 만큼 감사하다. 그래. 네가 그 어르신의 등을 밟았듯이 나도 자근자근 지긋이 밟아 네 상처를 터트려주마!!! ....................라고 말하고 싶지만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된다... 비가 갑자기 더욱 거세어 졌다. <도망 가! 도망 가! 더 이상 꾸물대지 말고 도망 가!> 빗방울들이 고함을 친다. 그래!! 너는 오늘 재수 옴 붙었다 새꺄!!! 그러길래, 불길한 기분이 들었을 때 돌아갈 것이지... 쿠쿠쿠.. 오늘의 운은 네가 아닌 나의 것이다. 저 빌어먹을 비도 오늘만큼은 나의 편이다. " 지훈아!!! 지훈아!!!"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힘들다고 비명을 질러대지만 ....참아.. 조금만 버텨 줘. 그에게 갈 때까지 조금만 참아줘. 마음이 앞선다... 마음은 이미 그에게로 달려가 안겨 있지만 나의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게 다.... 그 엿같은.. 각성제 탓이야... 흐느적거리는 다리 탓에 몇 번이고 넘어졌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냥 뛰었을 뿐이다. 뛰지 못하면 기어가다가 도로 일어나 달리고 또 넘어져서 뒹굴다가 다시 일어나 달렸다. 저 멀리 푸른 빛의 가로등이 보인다. 밝다. 밝아. 저 푸른빛. 저기까지만 가면 돼... 이유없는 안도감. 저기까지만 가면 모든 것이 끝이 날 것만 같은 안도감. 왜? 글쎄.. 왜 일까... 푸른 빛. 그가 나에게 건네 주었던 푸른 색의 수건. 푸른 빛의 번개. 나의 의지. 단지 푸른 색이란 이유만으로 서로 얽혀드는 연관성없는 것들... 그러나 나는 저 환하게...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내 영혼조차 환하게 밝혀 줄 것만 같은 저 푸른 빛의 가로등을 향해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왜 이렇게 멀게도 느껴지는 걸까.. " 지훈아!!!" 누군가 서 있다... 가로등의 기둥에 몸을 기댄 채 누군가 서 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가 서 있다.. 그가 서서 나를 보고 있다.. 역시 너 였어.. 너 였어... 내가 들은 것은 환청이 아니었어... 서..설마 너의 모습을 환청이 아니겠지.. 내가 너에게로 달려드는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겠지... 나의 염려와 불안은 비와 함께 씻겨져 내려갔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고... 나의 손이 그의 팔에 닿았을 때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고... 나의 몸이 그의 품에 안겼을 때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내가 맹렬한 기세로 그에게 안겼기 때문에 함께 넘어졌을 뿐이었다.... " 으흐흑.. 흐흑..." 몸이 벌벌벌 떨렸다. 아까의 그 기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나무꾼 녀석에게 달려들어 땅바닥에 패대기 치던 나는... 그의 목덜미를 굶주린 들개마녕 물어뜯던 나는. 그의 오른 손을 히죽 웃음까지 지어가며 짓밟던 나는 그런 나는 어디로 가고 또 다시 그의 품에 안겨서 서럽게 울어대는 것일까.. 왜 또 이런 부끄러운 짓을 하는걸까... 나는 울면서... 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겨버리자... 그냥 넘겨버리자...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그냥 이러고 있고 싶어.... <두근 두근> 이것은 나의 심장 소리... 그래.. 나의 심장소리다... 마치 터져버릴 것 같이 힘겹게 뛰어대는 것은 나의 심장 소리.. 그리고... 나의 가슴과 맞닿아 있는 그의 가슴에서 나는 소리.. 그의 심장 소리.. 그의 가슴 역시... 격렬하게 뛰고 있다.. 뭔가 이상해.. 뭔가 이상해... 나는 그제야 지훈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제껏 내가 떨고 있었기에 그의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 지훈아?" 나는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 쉬고 있는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의 숨소리가 이상하다.. 마치.. 심한 천식을 앓고 있는 듯한 사람의 숨소리... 지훈의 얼굴이 새하얗다... 비단... 저 푸르스름한 가로등 불빛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안색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핏기가 없다. 마치.. 시체처럼.. 죽은 사람처럼. 나는 가슴이 갈갈이 찢기어나가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 지훈아! 지훈아! 왜 그래!!!" 갑자기 지훈이 섬뜩하리만큼 깊은 기침을 하더니 뭔가를 뱉어냈다. 아.. 이런 제기랄!!! 피다.. 적갈색의 핏덩어리를 그가 뱉어냈다. 지훈이 목을 움켜쥐며 신음하자 나는 그제야... 그것을 떠올렸다. 날카로운 도끼날... 그대로 목에 박혀버린... 하지만.. 하지만... 실제로 당한 것은 지훈이 아니잖아!! 연이어 떠오르는 또 다른 생각... 노인과 단 둘이 악몽 속에 갇혔을 때... 나는 포크로 내 배를 찔러대는 자해를 했었다..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나자... 실제로는 멀쩡한 배가... 살점이 찢겨져 너덜거리는 것 마냥 엄청난 고통을 몰고 왔지.... 도끼날... 목에 박히고... 피가.... 뿜어져... ' 그 뿐만이 아니야.' 생선가게 아저씨. 생선 자르듯... " 지....지훈아?" 나는 약간 겁에 질린 - 약간? 그것이 정말 약간이었을까? -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 괜...찮아... 소리를.... 너무.. 질러서..." 말할 때마다 쒹쒹... 거친 바람 소리가 함께 나온다.. 소리라니.... 나는 그제야 그가 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 댔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도대체.... 그 아픔을 어떻게 참고.... 그건 그렇고.... 너.... 너....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그 몸으로? 네 몸은 지금...조각조각이 난 것이나 다름없을텐데.... 그 몸을 대체 어떻게 끌고 온거야? 내가.... 불러서? 내가... 도와 달라고 해서? 내가 너를 불렀기 때문에? " 일어나." 나의 목소리는 차갑다... 나의 복받치는 울음과 너무 뜨거워서 가슴이 녹아버릴 것 같은 이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숨기고자... " 그 놈이 아직 여기 있을지 몰라. 환한 곳으로 나와 자기 모습을 드러낼만큼 어리석은 놈은 아니겠지만 내가 그 놈 목덜미를 물어 뜯어놓은데다가... 오른팔도 짓밟아 주었으니 또 모르지. 이번만큼은 죽기살기로 덤벼들지?" 나는 거의 쓰러져 눕다시피한 지훈을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지훈아.. 난 이런 놈이야.. 이렇게 싸가지 없는 놈이 내 본 모습이다... 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너에게 매달려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싶은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렇게 되면.. 난 너에게서 빠져 나오지 못해... 아니... 내가 너를 놓아주지 못해... 너를 내 안에 가두어 놓고 옭아매어 버릴거야.... 스토커처럼 말이야.... 나는.... 제정신이 아니거든.... 늘.. 언제나... 그 날.. 이후로... 지훈이 나를 올려다 보았다... 까만 눈... 그 검고 검은 눈이... 빗물에 젖은 물기 때문일까.. 아니면.. 가로등 불빛 때문일까... 유난히도... 빛났다... 나를 꿰뚫어 보는 눈동자.. 내 영혼 저 귀퉁이의 버려진 조각까지도 바라보는 눈동자.. " 일어나. 둘 다 죽고 싶진 않아. 여기서 계속 널부러져 있을 거야?" 내가 얼마나 매몰찬 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는 꼼짝도 못해... 여기까지 온 것조차도 그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 그에게 나는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지? 강은우... 너란 인간은... 참으로 지독해... 지독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거야? 이렇게 까지? 갑자기... 지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 뭐야. 일으켜 달라는거야?" " ....이리 와." " .............." " 은우야.... 자꾸 도망가지 말고... 이리 와..." " 내가... 내가 어디로 도망간다는거야.. 난... 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걸까.. 강은우... 그만 좀 울어.... 왜 지훈이 앞에서는 정말로 수도꼭지가 되어버리는거야... 울면 안돼..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는 약해 빠진 놈이 아냐.. 그에게 매달리고 싶지도 않아. 울지 마. 울지 마. 그에게 우는 것을 들키지 말자. " ....가면 뒤로... 도망치지 말고... 이리 와.." 지훈이.... 참으로 다정히... 그리고 편안히... 고요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가슴이 시리다....... 가슴이 시려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 너의 말은...........주술이 되어.... 나를 이끈다.... 나를.... 이끌어.... 이끌어.... " 내가... 내가.. 개야? 목소리가 떨린다.. 그래.. 난 울고 있구나.. 아예 눈물을 펑펑 흘리며..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구나.. 에라.. 이 가지과의 일년초로 당초. 고초. 본초로도 불리는 매운 채소 떨어질 놈아..... " 이리 와. 하면 냅다 안기게?" " ........." 지훈은 그저 웃기만 한다... 언제나 늘 무표정 하던 그가... 웃으니 전혀 다른 사람같다... 너도... 그렇게 웃을 수가 있구나... 그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웃을 수가 있구나.. 왠지 심통이 났다. 그리고.. 그의 그 혀를 내두를 만한 낙천성에 화도 났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오. 묘. 한. 분위기로 실랑이 할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란 말이야. 나는 일단 주위를 둘러 보았다. 비가... 마치 비가 어둠의 장막처럼 주위를 감싼 탓에 세상이 온통 흐릿할 뿐이다.. 그러나 일단 특별한 인기척이나 움직임은 없는 듯 하다. 여기서 벗어나야 해. 일단 달아나야 해. 그 놈이 머물러 있을지도 모르는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도망쳐야 해. " 빌어먹을." 나의 느닷없는 거친 말에 지훈이 눈썹을 치켜 뜬다. 그래.. 간혹.. 그가 보이는 그만의 특징. 당황하거나... 못마땅할 때... 너는 그런 표정을 짓지... 그러고보니.. 나는 그의 세세한 것 까지 알고 있는 듯 하다.. 큭.. 뭐야... 그런 것 까지 알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나는 그의 팔과 옷 뒷덜미를 붙잡고는 힘껏 잡아당겼다. " 우윽!" 나의 거칠고 배려없는 우악스런 행동에 지훈이 눈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었지만 나는... 사실.. 즐겁다. 그러나.... 나보다 큰 놈을 끌고 가기란.. 아마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겠지. " 그 몸으로 여기 까지 왔으니까.. 돌아가는 것도 할 수 있어." " ......쿡...... 역시........" 지훈이 이를 씨익 드러내며 말끝을 흐린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하면서 그런 여유있는 웃음과 말투를 보이다니.. 역시... 너야 말로 이상한 녀석이야. " 역시 뭐?" " .......아니야.. 가자." 하지만... 나는 안다.. 지훈이 무얼 말하려 했는지... 역시... 나는... 소심하고 수줍고 숫기없는 가짜 강은우와는 영 인연이 먼 것이다............................... 내가... 지훈을 들쳐엎다시피하여... 집으로 향했다..... 라고 말하면.. 믿을 사람이 있겠냐만은... 하긴... 사실.... 내가 그를 끙끙거리며 끌고 간 것은.. 공원 입구까지.... 어느 정도... 그 실제하지 않는 상처로부터의 고통에서 벗어난 지훈은... 더 이상 나에게 부축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부축을 받은 것은.................................................나. 갑자기 나의 신경세포들을 취기에 몰아넣은 각성제의 효과로 나는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다.... 그것보다는.... 갑작스런 안도감에 온 몸의 힘이 빠져 나가버렸다는 것이 옳을까... 그래서.. 꼴사납게도... 나는 집까지 그의 등에 업혀 가는..... 자존심 상하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음... 그래.. 자존심이 상했다... 상했어.... 하지만 솔직히.... 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지만.. 그래도 나 역시 작은 키는 아니기에... 그가 얼마나 끙끙거릴지는 심히 짐작되는 바이나.... 그가 자초한 일... 내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좋아... 그의 등이 따뜻하다.. 이미 둘 다 흠뻑 젖었는데... 연이어 쏟아지는 빗줄기 속을 걷고 있는데... 내 뺨에 닿아있는 그의 등은 따뜻하기만 해서... 추운 것을 잘 모르겠다.. 그의 체취가 난다.. 그 향긋한 섬유유연제의 향은 사라졌지만 언제나 그에게 배어 있는 흐릿한 담배 냄새와 그만의 향. 나는 지훈 몰래 킁킁 거리다가 마치 내가 개가 된 것 같은 기분에 그만 둬 버렸다. 다시는 각성제 따위 안 먹을테야... 누구에게 마음을 놓아본 것이 언제던가... 은영이에게조차.... 맘 편히 쉬어보지 못한.... 나의 영혼이... 그의 등에서 슬그머니 미소지으며 늘어진 것은.... 아마도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그 때... 아마.. 그 때 이후 처음일 것이다... " 지훈아..." 약간 어색하다... 아까는 미친 듯이 그의 이름을 불러 놓고서는... 왜 지금은 그의 이름을 부르기가 이리도 쑥쓰러울까? 쳇. 그는 내 이름을 넉살 좋게 잘도 불러대는 데 말이지.. 은우야.. 은우야... 하고... " ...............응." 그가 뜸을 들이며 대답한다.. 왠지 그가 느릿하게 대답하는 것이 난... 참.. 좋다.. 짜증이 날 법도 한 데 말이지.. 오호라... 콩깍지가 씌인다는 것은 바로 이것? 헉.... 나는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나의 정신상태가 참으로 의심스럽다... 아직도 각성제의 기운이 내 머리 속에서 난동을 피우나보다... 성혁이에게 "네놈의 정신상태가 더 야릇해!"를 외치고 싶었을 때가... 바로.. 오늘 아침. 아니... 어제 아침이었는데 말이지... " 내가... 부르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 ........................불렀었어?" " ............." 젠장.... 지금 날 놀려먹자는 거야? " .........불러줬다니.... 기분은.... 좋은 걸." 지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어 있는 것 같다.. 안 봐도 뻔하다... 그는 지금 그 특유의 천진스런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내고 있겠지. " 그런데 어떻게 온거야?" 나의 물음에 갑자기 그의 등 근육들이 긴장을 했다. 나 역시 긴장했다.. 우리는.... 다른 녀석들처럼 연예인 - 특히나 그 환상적인 전지연. 정말 예쁘지.. - 이야기나 D.J D.O.C의 노래가 어쨌다느니 그래도 영원한 교주 신해철이 최고라느니 그런 현실적이고도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꿈이든 악몽이든 간에.. 우리는 살인사건에 휘말렸으며 특히나 나는... 그 도끼 살인마와 마주치고도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이겠지... " ........봤어... 벤치에서 자고 있는 널 봤어." 아.. 그래.. 지훈의 머리가.. 아니.. 그남자의 머리가... 내가 잠든 벤치 쪽으로 굴러왔었지.... 그 남자의 눈을 통해... 지훈은 벤치에 잠들어 있던 나를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그는 깨어났어... " 너는 어떻게 깨어나는거야?" " ..........숨이 끊어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지만... 바로는 깨어나지 못해... 숨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고... 듣고... 느끼지...." 지훈의 담담한 말투에 나는 오히려... 가슴이 아팠고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 역시 그 미친 새끼!!!를 통해 그 상황을 느꼈으므로... " ......잊지 마... 너는 아무 짓도 안 했어." " 응."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지훈이의 목소리가 더 잘들리거든...................................................정녕... 이 낯간지러운 말을 내가 했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데 지훈이 다시 입을 연다. " ....두 번째에는 무척 놀랬어... 첫 번째의 경우에는 내가 네 이름을 부르니까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졌거든... 그 다음은 기억이 안나.. 곧 이어 나도 잠에서 깨어났겠지... 그런데 두 번째의 경우에는... 소용이 없는거야... 너를 깨우기 위해.. 이름을 불렀는데 소용이 없는 거야.. 그리고 너보다 먼저 깨어나 버렸지... 네가 거기에 혼자 남아있을 생각을 하니까... 불안해서 견딜수가 없었어..." " 역시 전화를 건 사람은 너 였어...." " ..........응." " 그런데 왜 아무말도 안 했어?" " ..........그냥..." 그의 말이 약간 뾰루퉁 하게 들린다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왠지 지훈이 의외로 마냥 속 넓은 성격은 아닐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늘 무표정하지만 그 너머에는 온갖 감정의 표정들이 이리저리 들락날락 거리고 있겠지... 라는 생각을 하니 절로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 .......네가 은영이니? 라고 물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구." 그가 끝말 하나하나를 짧게 끊으며 힘주어 말했다. 참나.. 이건 대놓고 투정부리는 것 같잖아.... 나는 확신했다.. 이것은 맏이의 육감이다.. 지훈은.. 막내가 틀림없다... 어디서 봤는데.. 하도 더워서 은행에 갔다가... 여성잡지에서 봤던가... 아.. 내가 여성잡지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다.. ... 심심해서.... 그냥 앉아 있는 것이 지겨워서 뒤적뒤적 해 보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관계는... 차남과 차녀. -하희라. 최수종 부부가 그렇다나..- 또는... 맏이와 막내... - 가장 이상적인 성격의 배합이란다... - 그런데.... 지금... 내가 ... 왜 ... 이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냥. 그래..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이것은 그저 무의식의 발로야.... " 그런데 지훈아...." 나는 내가 가장 그에게 묻고 싶은 것 세 가지 중 세 번째 것을 물었다. " 네가 꿈을 꾸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나 역시 같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그건.. 그냥.. 너의 꿈 뿐일 수도 있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 .....그 날... 너 역시 일찍 왔고... 굉장히 불안해 보였어.. 다른 어떤 때보다 더... 게다가 그 날.. 네 모습이.. 평소와 같았다고 너 역시 말할 수는...... 없을거야...... 그리고..." " 그리고?" " ...........아냐. 아니야." 그가 말을 하다 만다... 뭔가 더 있는 걸까... 하지만 이미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 나는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기분이 어떤지... 티가 나니까... 이런 것은.. 상당히 불공평한 일이다... 특별한 때가 아니고서.. 늘 그 속을 알 수 없는 지훈의 경우를 생각하면 말이지...... 나는 내가 가장 그에게 묻고 싶은 것 세 가지 중 두 번째 것을 물었다. " 분명.... 너의 꿈에서 살인자의 모습은 나이지? 그러니까 네가 나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른 것 아니야.." " ........응." " 그런데... 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왜 아니라고 생각한거야?" " .............그냥." " 그냥?" 나는 그의 어처구니 없는 이유에 몸을 일으켰다. 그가 어어~ 소리를 내며 균형을 다시 잡는다. " 그냥이라는 게 어딨어." " .....따지지 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이라고 한거야.." 그가 또 다시 쿡쿡거린다... 이런... 왠지.. 나는 그의 밥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 놀려먹어라... 젠장.. 이해심 많은 맏이가 참아야지. " 너... 누나나 형있지? 동생은 없구." " 어? ....어떻게 알았어? 누나 하나에 형만 셋이지...." 대가족이구나... 약간 부럽다.... 분명... 행복한 가정일테지.. 나는 마지막으로...... 나는 내가 가장 그에게 묻고 싶은 것 세 가지 중 첫 번째 것.... 하지만... ' 너는 그 날 왜.... 그런 행동을 한거야?' 그가... 손을 들어... 내 입가의 잠을 흔적을 닦고서... 자신의 입술에 문질렀다... 그리고... 환하게 웃었지... 아이들의 시선따위는 상관도 하지 않고.. 마치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수줍은 고백을 꺼내 놓은 소년마냥.... 나는 그 질문은 그냥... 그래...................가슴에 묻어두었다...라고 표현하자..... " .......다 왔다." 나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기억해 내다가 다 왔다는 그의 말에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등에 찰싹 붙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런... 얼굴이 왜 붉어지는 거야. 쓸떼없이.. 이것두.. 일종의 병일까? " 내려 놔." " ...계단 까지 업고 올라 갈까?" " 내려 놔. 임마." 지훈이 내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손을 푼다... 그러고 보니.. 이것 참... 상당히 부끄럽네... 음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인 채 표정관리를 하다가 퍼득 떠오른 생각에 나는 지훈을 올려다 보았다. " 너. 그러고보니 우리 집 어떻게 안 거야? 아까 고개길에서부터는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 ....재준이에게서.. " 지훈이 들어가자는 듯 고개짓을 흘끔 한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먼저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올라가보니...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 앞에... 가방 두 개와 우산 두 개가 덩그라니 놓여있다...나의 가방. 지훈의 가방. 검은 우산. 푸른 우산.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지훈을 돌아보니 그는 계단에 서서 머리를 긁적인다.. " 너 기다리다가.... 깜빡 졸았어..." 그리고 곧...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를 내려다 보며...... 그 조용하게 나를 응시하는 까만 눈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든다... " ....아마... 졸게 된 것도.. 운명이었겠지.. 너를 지켜주려구." <따악> 나는 지훈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것두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낯간지러운 소리를 늘어놓는구나.... 목이 근질근질하다... 그는... 어렸을 적에 동화책을 너무 많이 보았나 보다.... " ...성질머리하구는..." 지훈이 이마를 문지르며 쿡 웃는다. 아... 좋다... 얼굴이 붉어지는 병 뿐만 아니라... 심장이 이유없이 콩닥거리는 병까지 걸렸나보다.. 심장군... 제발.. 진정 좀 하시게...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줘. 나는 그 철문 옆에 있는 커다란 화분의 밑에서 열쇠를 꺼내어 들었다. " .....으흠. 거기에 두는구나.. 열쇠." " 앞으론 갖고 다닐거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흡사 마치 ... 지훈이 화분 밑에 둔 열쇠를 뒤져 문을 따고 들어올 사람처럼 말이지... 그냥.. 아무 뜻도 없이... 한 말 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지훈은 별 반응 없이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린다... 내가 문을 열자... 그가 가방들과 우산을 들고 성큼 먼저 들어간다... 나는... 순간..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다.. 그가 나의 세계에.. 나만의 공간에 침범했다.. 그러나 그 거부감은 곧 그가 나와 함께 있다는 안도감으로 바뀌었고 나는 그런 그의 뒤를 얼른 따라 들어갔다. 참나... 안도감이라니.. 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것을 좋아했던가.. 나는 늘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왜 늘 외로워 해?> 나는 나의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그 따위 말에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그냥.. 그건... 치기어린.. 투정일 뿐이야... 여전히 옥상 위로 퍼붇는 피를 그대로 맞으며 열쇠로 문을 열다가 나는 손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방을 전혀.... 치우지 않았다..... " ....방 엉망이라는 것 알고 있으니까... 열어." 지훈이 내 머리를 손가락으로 토옥 누른다. 젠장... 넌 정말 독심술 하는 것이 틀림없어... 나는 최대한으로 뜸을 들이며 열쇠를 돌렸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지훈은.. 왜 너 혼자 이 작은 옥탑방에 살아... 따위의 말을 하지 않는다. 식구들은 어디 갔어.... 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번 쯤은 특별한 의도 없이도 물어봄 직한 말들을 지훈은 하지 않는다.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은 담임 뿐... 담임도 그저 내가 혼자 살고 있다는 것만 알 뿐 자세한 것은 전혀 모르는데.. 그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한다... - 그리고.... - 왠지.. 아까 그가 하다 만 말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것은.. 나의 과대망상? 물어 보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고 싶지만... 아직은 물어볼 수 없다... 왠지... 물어보기가 두렵다.. 그 이유는 내가 물어보지 못한 그 질문과 엇비슷한 맥락에서일지도... 나는... 상처 받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문을 열었다.. ..........................제에에엔장. 창피해서 미치겠다.... 당장이라도 문을 쾅 닫고 그를 돌려보내고 싶다. 아니면 옥상에서 밀어버리든지.. 아니면 내가 뛰어내리던지... 물이 흥건했던 바닥은... 거진 말라있었지만... 흙이 같이 증발할리는 없다... 온통 흙투성이에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고... 내가 어제 새벽 토해놓은 악취에.... 제길... 책상 서랍은 방 한 가운데에 덩그라니 엎어져 있고 사방에는 그 내용물이 널려져 있다.. 나는 흘끔 지훈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지훈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저럴 때는 정말... 감정도 없는 로봇 같다니까... 저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다양한 표정이 나올까... 그리고...................그런 표정을 왜 나에게만 보여줄까.. 순간 갑자기 지훈의 얼굴이 확 굳는다. " 너." 목소리 역시 경직되어 있어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치켜 뜨며 왜? 라고 대답했다. ............강압적으로 나오면 덩달아 격하게 반응하는 것은... 아마도 나의 천성이 되어가는 듯. 지훈이 내 손목을 와락 잡더니 방으로 끌고 들어간다. " 너. 약 먹어?" 지훈이 내 눈 앞에 들어보이는 것은.. 아... 각성제 상자... " 그래." 지훈의 다그치는 듯한 눈빛에 오기가 나서 일부러 심술궂게 대답했다. " ....먹지 마." " 왜?" 왜? 왜? 거기서 왜란 말이 도대체 왜!!! 나오는 것일까... 이것은 지난 번에도.. 비슷한 상황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미친 것... 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당연히 약을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사탕 까먹듯 까 먹으면 황천행이고... 게다가 각성제의 후유증을 단단히 경험하지 않았던가.. 참새와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담소를 나누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지훈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여전히 손목을 잡은 채... 나는 그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 - 이미 익숙해 졌으므로.. -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이 더 불편하다.. 이제 좀 놓으면 안될까... " ..................먹지 마...... 먹지마. 은우야....... 난 네가 망가지는 것 보고 싶지 않아. 계속 먹을거면 나랑 같이 먹어." 헉.. 이게 무슨 맛있는 캬라멜과 땅콩인 줄 알아? 같이 나눠 먹게? 그런 얼굴로...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그런 뜬금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네가.. 정말.. 나는... " 알았어... 안 먹을게..." 만일.. 지훈이 이렇게 이렇게 되니까 먹지 마. 절대로 먹으면 안돼! 라고 말했다면... 나는 분명 먹지 않을거면서... 싫어. 또는 왜. 생각해보고. 꼭 그래야 하나.. 등등...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반발했을 것이다.. " 안 먹는다구..." 나는 약 상자를 정리해 서랍장에다 집어 넣었다. " 먹지 않는다며.." " 어머니 유품이야." 그걸로 상황 종료. 지훈은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고개를 끄덕일 뿐. 나는... 그가.. 나에 대해서 뭔가를 많이.. 아주 많이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던가... 불쾌하다던가.. 불공평하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다... 잘 모르겠다.. 에라이.. 머리만 아파.. " ....먼저 씻어라." 지훈이 내게 말했다. " 너.. 여기서 자고 갈꺼야?" 나의 말에 지훈이 어깨를 으쓱이더니 두리번두리번 방을 둘러본다. " 자고 갈꺼냐구..." " .... 그래. 나도.. 오늘은.. 혼자 자고 싶지 않아.. " 거기에.. 나도.......란 말은 왜 붙이는거야.. 나까지 끌고 들어가는 이유는? 하지만... 나 역시 혼자 자고 싶지는 않다... 자는 것이 무섭다.. 그 악몽의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무섭다.. 같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동료애 비슷한 것에... 나는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자고 가. 집에는 말한거야?" " ... 나에게 신경 쓰지도 않을뿐더러... 형들 셋과 한방을 같이 쓰기 때문에 안 들어오는 걸 더 좋아해." 할 말을 없게 만든다... " 어... 저건." 헉... 지훈이 준.. 수건이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얼른 버리는 건데... " 그..그게." " 잘됐다.. 차라리 걸레로 써 버려... 하얀색 수건은... 왠지 기분 나뻐... 그렇지?" 지훈은... 정말로 독심술을 하는 것이 분명해... " .....어여 들어가 씻어..." " 으...응." 나는 옷장에서 옷과 속옷을 꺼내들고 종종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왠지.... 창피해... " ....어..." 정말.. 어! 였다... 그가 나 없는 내 방에서 무얼 할지 조마조마해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나와봤더니 그는... 그는.... 무릎을 꿇고 걸레로 바닥을 박박 닦고 있다. " 너.. 뭐하니? 지금." " .....방 닦어... 닦아야 빨리 이불 깔고 자지."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다... 그래 당연해.. 당연해.. 하지만... 이렇게 윤이 나게 닦아 놀 줄이야... 이것은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왠지.. 그가 그보다 덩치 큰 형들에게 구박을 당하며 걸레질 하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신데렐라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 쿠쿠쿡.. 쿡쿡.. 푸후후후." " .... 그래. 참지 마." " 뭐? 쿠쿡. 후후후. 우후훕.." " ...그렇게 웃는 거야. 너한테 어울리는 웃음은... 인형같은 미소가 아니야." " 와하하하하!!! 최..최지훈.." 나는 눈물을 흘리며 박장대소했다. 신데렐라만 떠 오른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온갖 종류의 동화책 속의 그럴싸한 주인공들은 모두 그의 얼굴과 겹쳐 떠올랐다.. " 지..지훈아. 너 동화책 너무 많이 읽은 것 아니야? ...쿡쿡.. 그런 말은.. 공주한테나 가서 하라구.." 나는 검지만 펴서 살래살래 흔들어 보이며 키득거렸다. " ...걸레 든 왕자도 봤냐?" 지훈이 내 얼굴에다가 걸레를 비빌 듯 갖다대며 중얼거렸다. " ......나도 씻는다...." 지훈이 걸레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나는 그가 쪼그리고 앉아 걸레를 빨 생각을 하니 또 웃음이 나와 한동안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 .........................아...................." 배가 아프다.. 너무 웃었다.. 그러나.... 기분은 날아갈 것 같다... 즐겁다. 행복하다. 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그 동안 소리내어 웃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늘 만들어낸 미소 속에 갇혀 정작 진짜로 웃는 법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주섬주섬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벌렁 드러누워 멍하게... 둥둥 두둥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몽롱한 기분으로 멍하니 누워 있으니.. 문이 딸깍 열리는 소리가 난다. " 은우야." " 응?" 나는 일어나지도 않고 그냥 고개만 빙글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너무 기분이 좋고... 편안해.. 꼼짝도 하기 싫다... 이대로 데굴데굴.. 평생을 굴러다녀도 좋을 것 같은 기분. " ....나 입을 것 좀 다오...." 지훈이 무표정하게.. 그리고 무덤덤하게 말한다. 나의 머리 속에 번쩍 스치는 어린 아이와도 같은 장난기. 나는 입가에 웃음이 배시시 흘러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 저기.. 옷 서랍장에서 맞는 것 꺼내 입어." " ........" 지훈이 가만히 있는다. 맨 어깨의 한 쪽만 문 밖으로 내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쿠쿠쿠. 왠지 흐뭇하다. 헉.. 흐뭇.. 그래.. 흐뭇해.. 흐뭇하다구...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 꺼내 입으라니까.. 난 꼼짝도 하기 싫어." " 그으래?" 갑자기 지훈이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순간... 나는 내가 또 다시 그의 앞에서 내 무덤을 내가 판 것이 아닐까.... 고민했다... 그의 그으래? 하는 말투가 왠지 미묘하다... 나의 장난기를 알아챈 걸까? 그가 빼꼼히 열었던 문을 벌컥 연다. " 옷 갖다 줄께!!!" ................................내 무덤을 내가 팠도다.... 지훈은 문만 벌컥 열었을 뿐... 그냥 그대로 서 있었을 뿐이다.. 내가 제 풀에 놀라 벌떡 일어나 옷 갖다 줄께!!!를 외친 것이다... ac...ac....ac...를 연발하며 나는 그에게 맞을 만한.. 그러니까 나에게 좀 헐렁할 티와 반바지를 찾았다.. 그냥... 같은 남자인데.... 목용탕가면 수두룩하게 보는 것이.. 다 그놈이고 그 놈인데... 뭘 이리 놀라나... 나는 옷을 화장실 문 앞에 투욱 던져주고는 다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 .......팬티는? 그냥 바지만 입으라구?" " 팬티를 어떻게 같이 입어?" " .........우리집은... 다 같이 입어..." " 우리 집은 안 그래." " .........나도 우리 누나랑은 같이 안 입어...." 나는 벌떡 일어나 서랍장을 열어 사각팬티를 꺼내 그에게 휙 던졌다. " 소원성취 해주마." " ....어찌 알았누?" 그가 애늙은이처럼 말하며 빙글빙글 웃는다. 젠장 말이나 못하면.... 그가.. 문을 닫고 옷을 입는 동안.. 그의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 나도 우리 누나랑은 같이 안 입어 - 그 말은... 너도 여동생하고는 같이 안 입어... 내가 여동생이 있다고 말했던가? 은영이.. 아까 은영이 이야기가 나왔잖아.. 하지만.. 그것 뿐인데.. 은영이가 내 여동생이란 말은 한 적이 없는데? 같은 은자 돌림이니까....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추측이라고 하기에 지훈의 말은... 확신에 차 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 .......배고프지 않아?" 지훈이 화장실에서 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래.. 배고파.. 배고파서 미치겠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의 위가 얼씨구나 대답을 한다. " .... 배고프구나." " 냉장고 열어 봐." " ...뭐가 있을까... " 그는 흥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연다. 그가.. 콧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또 나를 흐뭇하게 한다.. 흐뭇.. 흐뭇이라... 나 아직.. 약발이 가시지 않은거야? 각성제.. 정말 무서운 약이로군... " ............." 그가 조용히 냉장고 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 노려보았자.. 진수성찬이 생기는 건 아냐." 나는 그가 적잖이 실망했을 걸 상상하며 히죽 웃었다.. 나... 오늘.. 정말 많이 웃는 것 같아. " ....보이는 것은 홍차뿐이야.." " 맨 밑에 야채 박스 열어 봐. 거기에 먹을 것 있어. 그것두 많이." <드르륵> 야채 박스 열리는 소리와 함께 지훈의 어처구니 없는 미소를 띄며 나를 돌아봤다. " ..........너는 이게 주식이니?" 그의 손에는 요플레가 들려 있다. " 맛있잖아. 밥도 먹긴 먹어. 그것만 먹고는 배고파서 못 살아." " ...........그래." 그는 쿡쿡 거리며 대답을 하더니... 요플레를 팔 한가득 담는다. " 지훈아.. 그거 내 일주일 분이다." 지훈은 내가 누워 있는 옆 자리에 털썩 앉으며 요플레들을 와르르 쏟았다. " ....먹으면 그만이지. 너두 먹을 거지?" 나는 무척 배가 고팠으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배고프잖아." " ....먹으면... 다시 다 넘어 와." 나는 요플레의 그 새콤달콤한 맛과 은은한 향보다도 굳어가는 피와 뇌수를 떠올리는 걸쭉한 느낌이 더 강하게 남아 도저히 먹을 생각이 나질 않았다. " .....그건 꿈일 뿐이야." " 하지만... 실제로도 일어났던 일이잖아." " ....우리한테는 그저 악몽일 뿐이야." 지훈이 내 위에 얼굴을 들이밀며 조용히 속삭였다. " ....은우야.... 그건 그냥 악몽이야... 우리에겐 악몽일 뿐이야... 꿈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배를 곯는 것은... 네 손해야... 너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래..." 이 녀석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면 곧바로 승낙을 해버리는 맏이의 천성을 교묘히 이용하여 나를 괴롭히고 있다. " 자꾸 그 생각이 나서 못 먹겠는 걸 어떡하라구." 안 그래도 배가 고파죽겠는데... 그런데도 아무것도 못 먹어서 열불 터져 죽겠는데.... " ....그럼 그 생각 안 나면 먹을거야?" 지훈이... 자뭇 진지하게 물어온다. 뭔가 방법을 고심하나 보지? " 그래." 나는 반 포기겸 반 무시겸 대답했다. 그러나 지훈은 내 눈을 빤히 들여다 보더니... 그 짙고 짙은 검은 빛이면서도 투명한 그 눈동자로 내 눈을 한동안 들여다 보더니... 갑자기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심장이 콱 조여들어와 심근경색증이 아닌가 의심했다. 또 병이 도졌나 봐. 왜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쿵쿵 뛰는 거야. " .........눈 감아 봐." " 왜?" " ...최면을 걸거거든." " 최면 좋아하네." " ......배 고프지 않아?" " ......" 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최면이라니... 네가 정신분석치료의 대가라도 된다는 것이야? 정신분석치료의 창시자인 Freud도 나에게 음식을 먹게 하진 못할걸? 며칠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주워 들은 내용을 떠 올리며 머리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느낌이 이상하다... 목덜미가 근질근질하고 초조한 기분이 문뜩 들어 눈을 뜨니 지훈이 바로 코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 너... 너 지금 무얼 하..려.." " ............." 뭐...뭐야... 최지훈. 너 지금 뭐하는거야? 지훈이의 입술이...닿았다.... 닿았어! 닿았어!!! 거기까지만 해!! 거기까지만 해!!! 어째서! 어째서!! 집요하게 파고 드는거야!!!!!! 정신이 아찔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거지? 달콤하고......... 새콤한.......... 맛과.......... 은은한.......... 딸기향이 느껴졌다............... 그리고.......... 상쾌한............ 비누 냄새............ 그래........... 나는....... 꿈을 꾸고............. 있는거야................ 형용 색색의 꽃들로 둘러 쌓인.............. 이 세상의 색이란 색은 모조리 여기다 가져 놓은 듯 한............. 그 아름다운.................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운 꿈 속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머리를 쓰다듬는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 머리칼 사이로 파고 들어 살며시 어루만진다..... 그래............... 난...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 악몽에서............................. 벗어난 거야................................................... 그것만으로도...... 난.... 좋아.................................................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나는 늘... 특히나.... 요 며칠간은.... 제발 꿈을 꾸지 않았으면..... 설사 꾼다 하더라도 어서 깨어났으면..... 바라고 또 바랬다.... 꿈은 환상일 뿐이며.. 이루어지지 않는 것... 깨고 나면 허망할 뿐이므로... 게다가....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끔찍한 악몽일 경우... 또 그 악몽 속에서.. 이것이 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깨어나지 못하고 허우적 댈 경우.... 실컷 시달리다가 깨어 텅 빈 방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그 이유없는 서러움.. 서글픔... 나는 꿈이 싫다.... 이루어 질 수 없는... 혹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기에.... 그러나... 지금만큼은... 지금만큼은... 이것이 설사 꿈이라도... 그대로 깨어나지 말았으면....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그의 따뜻하고 물기어린 입술을 받아들이고...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으면.... 편안하다.... 그리고 마음이 아프다.... 그의 입술이 나에게 말하고 있어... 그의 숨결이 나에게 말하고 있어... 그의 심장이 나에게 말하고 있어... 너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야....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다는...느낌은 이런 것일까... 나는 애정결핍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순히.. 지극히 충동적으로 나에게 입맞추었을련지도 모른다... 그것을... 나에 대한 순수한 애정의 표현이라 느끼고는 숨조차 조심스럽게 내쉬며 가슴 떨고 있는 나는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랑받지도.. 또는 사랑하지도 못한 다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마음을 열고... 떨리는..혹은 수줍은... 애정을 받고 있는........................ 그러나... 그러나..... 이건 분명 정상이 아니야.... 둘 다... 지금... 뭔가에 홀려 있는거야... 나는 내 머리카락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는 그의 손목을 움켜 쥐었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겨 그의 얼굴로 밀어붙였다. 아쉬워..... 아쉬워? 무엇이! 무엇이 아쉽다는 거야! 난 지금!!! 그의 아래에 깔려 감긴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그의 충동적이고 정상적이지 못한 입맞춤을 더 오래 느끼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거야? " 너 무슨 짓이야....."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난 자리에 향긋한 딸기향이 맴돌았다. 제길.. 얼굴이.. 붉어지려고 해... 가슴이 찌릿찌릿 저며오는 것이 숨이 막히는 것 같다. " .........거봐. 맛있지?" 지훈이... 대답했다. 만일 그가 히죽이 웃으며 그 말을 했다면... 나는 웃으며 또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 따위 장난 하지 말랬잖아!" 라고 소리쳤을지도.... 그러나.. 지훈의 표정은... 이상하다... 나도 그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맛있지? 라고 묻고 있어도 그의 눈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나는 듣고 싶지 않다.. 무섭다.. 그의 눈이 나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듣는 것이 나는 두렵다.. 그것을 듣는 순간... 나는 너에게서 헤어나지 못할거야... " 내가 두 번 다시 이런 짓 하지 말랬지." 목소리가 콱 잠긴다... 좀 더 태연스럽게는... 왜 말하지 못하는 걸까... " ..................................어떤 짓?" 갑자기 지훈이 벌떡 일어나 내 옆에 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요플레를 또 하나 집어들기에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 역시 미묘하게 떨리는 것은... 나의 착각? 나의 바램? 나는 내가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그에게 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하지 못했다.. 혀끝에서 맴맴 도는 그 말을 다시 가슴 속에 새겨 넣었다... 아마도 어쩌면.. 영원히 하지 못할지도... 늘 가슴 속에 품고서... 그의 행동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을 졸이겠지. " ............................." 지훈은 요플레의 뚜껑을 벗겨내고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나는 순간... 그의 옆에 먹다 만... 요플레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보.... 옆에 두고 새로 또 딴거야? 어쩌면... 그도 이제 막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도 모르지... 그는 그냥... 가만히....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는다. " 내 놔." 나는 손을 불쑥 내밀여 말했다. 그가 나의 느닷없는 말에 고개를 들더니 뭘?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멍하고 어리벙벙한 얼굴에 난 킥하고 웃음이 나왔다. 저 얼굴에 그런 표정을 짓다니.. 안 어울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훈은 지금...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무엇 때문일까.. 나 때문에?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어... " 나 먹으라고 새로 딴 것 아니야? 내 놔." " .......아.. 아.. 그래." 지훈이 웅얼웅얼 거리더니 나에게 요플레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것을 한 입에 홀짝 털어넣었다. 맛있네..... 그것은 정말.. 지훈이의 최면이었을까... 어쩌면.. 정말 단순한 충격요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충격요법이었다면... 정말.. 확실하게 먹혀 들었어... 나는 쩝쩝 입맛을 다셔가며 맛나게 먹었다. 아니 맛나게 먹어야 했다. 적어도 먹는다는 그 행동에 열중하여 지훈의 그 느닷없는 입맞춤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여야 했기에... 그래.. 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아... 지훈은...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내가 짭짭거리며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그런 표정이 왠지.. 불편하다. 그런 모습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의 그런 모습에 묘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내색하지 않기 위해 더욱 맛있게 먹었다. " 왜 안 먹어? 배 고프다면서." " .......어? 아......... 아... 먹어." 지훈이.. 갑자기 걸신들린 사람 마냥 허겁지겁 들이켰다... 으음.... 역시... 이상해..... 마치... 누가 더 급하게 더 많이 먹느냐에 도전이라도 하둣 지훈과 나는 정신 없이 요플레를 원샷으로 들이키고 또 따고 또 들이키고를 반복하며 그 많은 것들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 무슨 바보같은 짓일까... 세상에 먹는 걸로 시합하는 것이 가장 아둔한 짓이다.... 라고 누가 말하던데... 승리는 지훈의 것. 그래. 너는 아둔함의 황제다... 그는 마지막 요플레를 후루룩 죽 들이키듯 마시더니 아아.. 잘 먹었다를 중얼거렸다. 그는 팔꿈치로 몸을 지탱해 반쯤 누운 자세로 고개를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하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게 뭐람. 나는 그를 외면하고 용기 밑바닥에 남아있는 요플레를 보며... 숟가락을 가져올까.... 하다가 귀찮아서 손가락을 쑤욱 집어 넣었다. 빙글빙글 돌려서 싹싹 긁어서 한 입에 냐암. 의외로 재미있다. 물론 맛있기도 하다.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쪽쪽 빠는데 왠지 옆 얼굴이 뜨끔하다. 그래.. 나 지저분하다... 사람이 어떻게 깨끗하게만 사냐구. 어쩔 수 없을 때는 가끔 이렇게도 살아야지. 네가 입으로 준 것도 쪽쪽 잘도 받아 먹었는데 이런 짓은 예사지... " 왜? 더러워?" 나는 또 다른 용기를 집어들어 손가락으로 알뜰살뜰히 긁어 쪽쪽 빨며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 .......................가끔..." 지훈이 나를 또 멍하니 쳐다본다. 너 왜 자꾸 그런 얼굴을 하는거야? " 가끔 뭐." " ................아냐... 쿡...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이상한 놈이지." " 뭔 생각?" 지훈이 키득거렸다. 멍한 표정은 금새 사라지고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연신 웃음을 지었다. " ..은우야." " 왜?" " ...........나도 주라." " 뭘?" " ........나도 좀 줘." " 니가 먹어." " .....나 지금 손 못 쓰잖아." " 일어나서 먹어." 지훈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싫어." " 네가 무슨 어린애냐? 숟갈 가져다 줘?" " ......나도 너 먹여 줬잖아............ 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딱 한번만.. 응? 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 아니던가?" 지훈이 빙글 웃었다. 그래.. 나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지. 눈 딱 감고 한번 먹여줘? ............................................라고 생각하다니... 내 손가락이 반들반들 닦아놓은 숟가락인 줄 알아? " ..........아." 지훈이 입을 딱 벌린다. 그 꼴을 보니.. 동물의 왕국에서 본... 뻐꾸기 새끼같다.. 지 양엄마보다 몸집은 더 큰 것이 "빨랑 줘요! 빨랑 줘요!" 지지배배 떼를 쓰며 입을 앙~ 하고 벌리는 아기 뻐꾸기 말이다... 미친 것.... 그리고 뻐꾸기 새끼에게 먹이를 넣어주는 어미새의 심정으로 그에게 요플레를 잔뜩 묻힌 손가락을 쑤욱 들이미는 나도 미친 녀석이다... " 냠" 지훈이 손가락을 덥석 물었다. 헉.. 순간 나는 지훈이 내 손가락을 싹뚝 잘라먹지 않을까.... 고민하며 손가락을 빼려고 했는데..... 지훈이 짭짭 거리며 혀를 요리조리 잘도 놀려대며 빨아댄다... 뭐야.... 네가 젖빠는 갓난 아기야? " 그만 좀 해라. 손가락 다 닳아빠지겠다." 내 심드렁한... 아니 심드렁을 가장한 말투에도 아랑곳 없이 쪽쪽거리던 지훈이.... 갑자기 눈을 감는다. 그리고는.....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몰캉거리는 혀로 내 검지를 문질렀다. 으악! 갑자기 목덜미가 근질근질거린다. 순식간에 부끄러운 탓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때문인지... 속에서 열기가 화악 치밀어 올랐다. " 야!" 나는 얼른 다른 손으로 그의 이마를 확 밀어버리며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 윽."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지자 그는 불만스런 신음을 내뱉으며 투덜거린다. " ...목을 부러뜨릴 셈이야?" " 그 정도로 부러질만큼 네 목이 연약하냐?" 크으윽... 기분이.. 묘하다.. 아까부터 목덜미가 왜 이리 근질거리지? 피부가 간질간질 하다면 손톱을 세워 박박 긁어버릴 텐데... 살 속이 찌릿찌릿하며 간지럽다.... 난 간지러운 것은 정말 못 참는단 말야. " 어서 자빠져 자." 내가 목을 벅벅 긁으며 투덜거리자 지훈은... 진지한... 그리고는 내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살짝 살짝 내비치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 .....목은 왜 긁어?" " 몰라! 간지러워. 너 때문이야." " .....나 때문에?" 그의 눈이 둥그래진다. " 그래. 너 때문에 목이 근질근질해. 나는 간지러운 것 못 참는단 말이야." " ....................은우야." 그가 나지막한 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토록 작고 조용한데도 울림이 있어 내 귀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그의 목소리가 웅웅 울려온다. 울림있는 듣기 좋은 목소리... " 뭐." " .......상처나. 긁지마... 그거..... 긁는다고... 시원해지는 것 아냐." 그는 왠지 약간 화가 난 듯한... 또는 무표정 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다. " 그럼 어떻해 하면 시원해지는데. 쓸떼없는 소리 말고 잠이 나 자!" " ..................그래. 자자." 지훈은 자리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한 쪽 팔을 주욱 뻗는다. 이 놈아.... 여기가 네 안방인 줄 알아? 그 팔을 치워야 내가 눕던가 말던가 하지. " ......자자며?" " 팔을 치워야 잘 것 아냐." " ...................네 베개를 내가 쓰니까... 내 팔 베고 자." 참나.... 내가 무슨 어린애야? 아님 네 마누라야? 네 팔 베고 코오코오 거리며 잠을 자게. " 아! 빨리 치워. 나 베개 안 베고도 잠 잘자." " .....베개 안 베고 자면 나중에 목이 뻐근해... 얼마나 아픈지 내가 경험해 봐서 안다구. ......내 팔 베고 안자면.. 나도 베개 안 베고 잘거야... 너 나 아팠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아까 그 망할 놈 때문에 목이 아직도 아프단 말이야." 거짓말... 나는 아직도 목이 아프다는 지훈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지훈은 나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막내란... 둘 중의 하나다. 천상 귀여움만 받고 자란 녀석이 그 하나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름대로 생존방식을 찾는 녀석이 다른 하나다. 지훈은 ... 분명... 누나와 세 명의 형 속에서 그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을 찾은 후자쪽이 틀림없다.... 이런 녀석은.... 맏이의 약점을 은근슬쩍... 아주 능구렁이 처럼 이용한다니까.... " 아직도 아파?" 분명...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래도 걱정이 된다... " .....그래." 지훈은 짐짓 아픈 표정을 지어가며 대답했다. 야... 너 배우해도 되겠다... " 내가 네 팔 안 베면.. 너도 정말 베개 안 베고 잘거야?" " ...응." 오호~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내가 순순히 " 그럼 하는 수 없지." 라고 네 팔에 안겨 잘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최지훈.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인줄 알아? 나는 그의 옆에 누울 듯 하면서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너 한번 당해봐라. 이 놈아. 나의 미소는 일종의 연막작전. 호오.... 나 역시 배우해도 되겠어.... 그가 내 수줍은 미소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나는 베개 끄트머리를 붙잡고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자!!! 베개야 나한테로 와라!!! ..........................그런데 왜 꼼짝도 안 하는거야? 나는 무거운 돌에라도 눌린 양 꼼짝달싹도 안 하는 베개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 ....쿡... " 지훈이 이를 씨익 드러내며 웃고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대로 다 보여준다니까..." 이런!!! 이런 발칙한 자식같으니.. 지훈의 다른 반대편 손이 배개를 꽉 쥐고 있다. 저러니까 잡아당겨도 안 빠지지. 분하다..... 왠지 허탈한 기분이 든다... 다 알고 있었단 말이지. " 됐어! 반대편으로 자면 돼! 내 발냄새나 실컷 맡으면서 자라구!" " ......나 잠버릇 심하다... 너 내 발에 채이면.. 어쩔려구?" 할 말을..... 없게 만든다.... 정말... " ........은우야." " 왜!" 나는 눈을 치켜뜨며 사납게 대꾸했다. " ...........은우야." " 왜 부르냐니까!" " ...............은우야." 갈수록... 다정하게 부른다... 뭐야.. 이러면 화낸 내가... 어린애 같잖아. 젠장... 아기같은 짓은... 자기가 다 해놓고서... " 왜 불러...." 나는 한층 풀이 꺾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이리 와. 나랑 같이 자자." 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엄마가.... 엄마가... 아이하게 하듯... 한 없이 다정하고... 애련한 목소리... " 은우야... 이리와." 그가 활짝 웃는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환하게 웃는다... 학교에선... 단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저렇게 웃어주지 않는다... 그래.. 나에게만이야.. 나에게만 웃어 줄 뿐이야... " 이상한 짓 하면 죽인다." 나는 마지못한 듯 그에게 등을 돌려 털썩 드러누웠다. " ....쿠쿡.. 죽인다구?" " 그래." " ....너에게라면 기꺼이..." 으악!!! 너 또 그 닭살맞은... 대사를!!! 나는 머리에 있는대로 힘을 주면서 그의 팔에 부비작부비작 거렸다. 흥. 좀 아플 것이다. " ............은우야." " 왜." " .............오늘은... 악몽 안 꿀테니... 마음 푹 놓고 자자." " 정말 안 꿀까?" " .....이미.. 오늘은... 그 놈이 일을 저질렀잖아... 연속으로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 녀석은.. 희생자를 꽤 신중히 고르는 듯 하니까..." " 그런데.... 갑자기 왜 나였을까... 그냥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니면 나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나무꾼 녀석의 "얼레? 저건-"이라던 말이 귀에 거슬린다.... 그냥.... 넘겨버리기엔... 그 미묘한 말투가... 신경이 쓰인다.. " ....네가 마음에 들었나보지.... 너는... 잡아먹고 싶을 만큼.. 귀엽거든. 쿠쿡." 난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착실히 반응하였다. " 잡아먹고 싶을 만큼.... 귀엽다구?" 지훈은 제 정신이 아닌 것이 분명해... 나는 아담한 키. 하얀 얼굴에 앵두같이 붉고 깜찍한 입술을 가진... 덥석 안으면 한 팔에 안길 그런 소녀가 아니란 말이다. 분명.. 지훈이보다는 작은 체격이긴 하지만.... 키 170 에... 눈을 치켜뜨면 성난 고양이나 다를 바 없는 나를.. 누가 귀엽다고 말하겠는다... 은영이가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기절하겠지... 학교에서의 별명이 목각인형이라고 말했더니 왜 장승이 아니구? 라고 반문했던 아이다. 그 부리부리한 눈에 나 성질났소... 라고 말하고 있는 장승... 말이다.. " ..............빗소리가.... 오늘은 시원하다... 그렇지?" 지훈의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처럼 조용조용하고 단조롭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 나를 재우려고 말이지.. " 응.........." 그러고보니... 날마다 끔찍하게도 내 귀를 울리며 괴롭히던... 빗소리가.. 그 소란스럽고 을씬년스럽던 빗소리가... 오늘만큼은 다르게 들린다... 찐뜩거리고 후덥지근한 날씨를 단숨에 몰아주기라도 하듯... 시원스럽다. " ..........푹 자는거야...... 아무 생각도 안하고.........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그냥 죽은 듯이 ..........자는 거야........." " ....응........" " ........그리고......... 아침에........일어나서..... 평소와...... 다름 없이........학교에 가는거야........." " ................응.........." " ........은우야......." " .......................으응?" " ....잘 자......." 내가........응........이라고 대답했는지...........아니면..........지훈이 너도...........라고 대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가물가물한.....의식 속에서도........ 계속....... 생각한 것은............. 지훈이.........냄새............ 참............... 좋다..........................................................응.... 참 좋아...................................................... 근질...............근질................근질.................근질.....................목 안이 간지럽다............................ 묘........한 기분..................... 간지러워... 몸 속이 간지러워.... 기분이 이상해.... 으윽... 못 참겠어..... 아흑..... 기분이 이상하다구...... < 간지러워? > 응... 그래... 못 참겠어.... 마구마구 긁고 싶어.... < 긁어도 소용없다니까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 이렇게 > 누군가 목을 지분지분 깨문다. 살짝 살짝 물었다 놓았다가... 그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목에 스칠 때마다 가슴 속이 지끈거린다. 이런..... 더 기분이 이상해... 하지 마... 하지 마........... < 싫어 > 목덜이메 입을 댄 채로 속삭인다. 그가 입이 달싹이며 내 목을 간지럽힌다. 그의 숨결이 내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래도... 그래도 간지럽단 말이야...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야.... < 그럼 이렇게 > 촉촉한 입술이 목에 와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빨아댄다. 으으음.... 이것은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일까... 적어도 그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의 입은... 나의 목덜미에 파묻혀 있으므로.. 그렇다면 나일까... 나인가? 하지만... 내가.. 내가 이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고? 열에 들뜬 듯한... 이 소리를 내가 내고 있다고? 눈을 떠보니... 주위는 깜깜하다... 이상하다.. 분명이 불을 켜고 잠이 들지 않았던가? 누가 불을 껐지? 나는 아니야.. 나는 아니야.. 그럼.. 귀신인가? 아니.. 아니다... 나 말고 내 방에서 잠을 자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가 누구더라... 지금 그 사람이 피에 굶주린 흡혈귀마냥 내 목을 이리도 집요하게 빨아대고 있는 것이겠지. 그 사람이 누구지? 누구지? < 은우야 > 그가 한숨을 내쉬듯 속삭인다. 아.. 그래.. 그 목소리... 그 울림있는 깊은 목소리.. 지훈이다...... 지훈이다...... 그가 나의 몸 위로 살포시 올라온다... 나의 눈은 아직 어둠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그의 흐릿한 형체만이 아른거릴 뿐이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너의 눈을 보고 싶은데... 지훈의 손이 내 옷 속을 파고 들었다. 우윽. 순간 움찔했다. 뜨겁다... 그리고... 낯설다. 하지만 이윽고 부드러운 손은 나의 등 뒤로 파고 들어와 내 등을 받쳐 들고 끌어 올렸다. 나는... 몽롱하다... 아직 잠에서 들 깬 것일까... 꼼짝도 하지 못하겠다. 손 끝하나 내 마음대로 놀리지 못한다. 그냥..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움직이고... 내 의식은 모두 감각이 되어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느낀다. < 은우야 > 지훈이 나의 목소리를 애절하게 부른다. 응. 나 여기 있어.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과 엉겨든다. 아... 숨이.. 숨이... 그의 혀가 은밀하고 부드럽게 들어왔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입안을 애무했다. 그의 혀가 부드럽고 뜨겁게 어루만지자 나의 혀는 녹아들 듯 나근나근해져 그와 함께 얽혀 들었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내 다리 사이를 파고 든다. 엉겹결에 두 다리를 조이며 그가 움직임을 막으려 하자 그의 다른 한 손이 슬쩍 맨 다리를 쓰다듬었다. 아으...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오싹하며 몸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손은 점점 안으로 파고 들어와 반바지 사이로 살짝 들어왔다. 예민하고 상처입을 듯이 민감한 속살을 그림그리듯 문질러 대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 은우야 > 그가 잠시 입을 떼고 속삭이자 나는 숨을 헐떡이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의 손이 등을 훑듯이 쓰다듬으며 나의 티셔츠를 위로 끌어올렸다. 싸늘한 공기가 피부에 감긴다. 이윽고 그는 나의 가슴에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은우야... 은우야.... 은우야....> 그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입술의 움직임에 나는 숨을 토해내며 등을 활처럼 휘었다. 아아... 하아... 아.. 아악..... 몸이 떨려온다... 속 안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와 머리 속을 파랗게 불태운다. 푸른 빛... 눈을 감은 채 열에 들뜬 신음을 토해내는 나의 머리 속에는 온통 푸른빛 뿐이다. 그 푸른빛이 나를 휘감아 나를 애무하고 나를 쓰다듬고 나를 감아돈다. 지훈의 다리가 다시 내 다리 사이를 파고 든다. 조심스럽게 벌려가며... 마치 동의를 구하는 양. 나는 다리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은 막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일 뿐 정작 그를 향해 더욱 가깝게 더욱 밀착하며 다가갔다. < 은우야 > 등을 어루만지던 손이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악! 나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 오싹거리는 느낌에 몸을 떨었다. 점점 아래로 내려와서는... 와서는.... 그의 입술과 혀가 나의 가슴을... 점점 강하게 애무하고는... 하고는... 그의 다리가 나의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와 점점 자극적이게 비벼대고는... 대고는... 그의 다른 한손이 나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점점 안으로 파고들며... 파고 들며... 으응.. 아아.. 아아악.. 으흑! 푸른빛이 더더욱 진해진다. 그것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같이 변하여 나를 덮친다. 짙은 바다빛. 한 없이 깊고 아늑한 그 빛이 나를 삼키고... 나는.... 점점.... 가라앉아................. " ....................뭐야." 푸르스름한 잿빛이 천장에 어른거린다.... 여전히 빗소리가 창 밖을 두들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아직도 숨이 가쁘고 그 느낌이... 그의 손길이... 머리 속.. 아니 몸의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듯한... " 이것도 악몽의 일종이야..." 그래... 하하..... 꿈이었다... 실제가 아닌 나만의 환상이었던 것이다.... 단지 그와 공유하지 않은 나만의 환상이었다는 것이 나에게 그나마 위안이 될 뿐이다. 헉... 혹시 내가 열에 들떠 내지른 신음 소리를 지훈이가 듣지 않았을까? 갑자기 얼굴이 화아악 달아오른다. 이게 무슨 남사스러운 짓인가... 미끈하게 다리가 쭉쭉 빠진 어여쁜 누님들과의 상상도 아니고... 아니면 앙증맞도록 귀엽고 깜찍한 여자애들과의 상상도 아니고... 나와 똑같은... 그것도... 그것도... 내가 밑이라니..... " 으아!!!" 나는 머리를 움켜쥐며 고개를 돌렸다. 제발 그가 자고 있기를 바라며.... 그러나...... 그러나.......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썰렁한 빈 자리.. 나는 순간 그 야릇하고 가슴 두근거리는 꿈 뿐만 아니라... 어제.. 한밤 중과 오늘 새벽의 일이 모두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살인마에 목이 달아난 그... 아저씨도.... 꿈일 뿐이고... 그 뒤를 이어 내가 죽을 뻔한 것도... 꿈일 뿐이고... 나를 위해 달려와 준 지훈의 등에 업혀 집에 돌아온 것도 꿈일 뿐이고... 그와 이야기 하고 웃고 잠이 든 것도 모두 꿈? ' 그와 입맞춘 것도 꿈이었나....' 하지만.. 다행히도... 뭐가 다행일까만은.... 요플레의 향이 방안에 가득하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풀썩 주저 앉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멍청한... 아직도 꿈에 들떠 몽롱한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엉금엉금 기어... 쓰레기 통에 가보니.. 요플레용기가 수북하다... 아마도 지훈이... 치운 모양이지... 나는 다시 이불로 다가와... 그가 누웠던 자리를 무심코 더듬거렸다... 아... 아직 따뜻하다... 그가 베었던 베개에 가만히 코를 대어 보았다... 따뜻해.... 어차피 그 베개를 늘 베고 자는 나의 냄새가 날 뿐이지만... 왠지 그의 향이 섞여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 제기랄!!!"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런 이상한 꿈을 꾸고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야!!! 베개를 있는 힘껏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 으흑... 흑..." 왜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걸까.. 왜 갑자기 가슴 한켠이 시려오는 걸까... " 나쁜 놈. 어디간거야..." 나는 마치 엄마 잃은 어린 아이 마냥 징징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 나쁜 새끼. 엿 같은 새끼. 어디간거야...." .........................................아.. 좀 낫군....... 나는 곧 울음을 멈추고 부스럭부스럭 이불을 개었다. 누가 봤다면 정말 어딘가 머리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훌쩍훌쩍 거리다가 금새 태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불을 개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 까지는 보지 못하겠지.. 어차피 이것은 나의 가면일 뿐이다.. 그 안에 나는 아직도 서글프게 울고 있으니 말이지. 가면 속의 나의 모습을 보고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은... 누구일까.... 손 내밀어 줄 사람은 누구일까.... 너 밖에 없는데 말이지.... 나는 이불을 개어놓고서 화장실로 향했다... 창피한 일이지만.... 그 야시시한 꿈은 정말.. 나를.... 여하튼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간만에 빨래하게 생겼네... 젠장....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그 꿈의 파편들도 모두 씻어버리고 쪼그리고 앉아 옷을 빨고 있자니 왠지 쓴웃음이 나온다... " 욕구불만이야..." 나를 위로해 보지만.. 왜 하필.. 지훈이었을까... 게다가... 왜 하필... 내가 그 끈끈한 신음소리를 내며... 나중엔 그에게 안겨.. 목에 팔을 두르고... " 제길.. 제길..." 나는 빨래를 쥐어뜯을 듯이 벅벅 빨래판에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딸깍> " 음?" 무슨 소리가 난 것 같은데.... 물소리와 빨래 문지르는 소리에 파묻힌 작은 금속음... 그러나 나는 그 소리를 무시해버리고.. 아니 나는 지금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하기에 그런 것에 신경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시해 버리고 빨래를 문지르고 헹구고 부욱 잡아 뒤틀어 물기를 짜낸다음... 천장 아래를 가로 지르는 빨래 줄에 그것을 널었다. 저 쪽에 어제 지훈이가 빨아 놓은 수건. 아니 걸레가 보인다... 그리고 깨끗이 빨아놓은 두 개의 교복 바지와 셔츠들도 걸려있다. 참나.. 빨래집게까지 예쁘게도 꽂아 놓았다. 다시 한번 차디 찬 물에 열에 들뜬 몸을 식히고 대충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다음 욕실 문을 벌컥 열었다. " 다 씻었어?............" " .........................." " ............................" " ................................" " ...................................." " 이 자식아!!! 언제 들어온거야!!!" 나는 기겁을 하며 욕실 문을 콰앙 닫았다. 으악! 으악! 닫으면 뭐해!! 이미 볼 것 다 보여 주었는데!!! 젠장! 젠장!!! 뭐야!!!!!!! 그렇지만... 그렇지만 입가에 웃음이 배실배실 새어나온다. 왜 웃는거야? 도대체. 미쳤어. 정말.... 그가 돌아와 있는 게 뭐가 그리 좋다구... < 어디갔냐구 찾을 때는 언제구. > " 쿡쿡... 푸후후후."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데도 자꾸 웃음이 새어나온다... 나는 문 밖에 있는 지훈이 들을 까봐 내심 걱정이 되었다. 나는 큰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에 다시 문을 열었다. 물론 이번에는 빼꼼히... 그리고 그가 어제 한 것처럼 머리와 한 쪽 어깨만 살짝 내밀고 말했다. " 지훈아. 내 옷 좀 꺼내 줘." " ............................." 지훈이가 부엌 쪽에 있다... 뭐야... 뭘 저리 바리바리 싸가지고 온거야?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설마 저 검은 봉지 사이로 삐죽이 솟아 나와 있는 것이.. 파는 아니겠지... 누가 저게 파가 아니라고 좀 말해줘... 저 검은 봉지 사이로 새하얀 속살을 살며시 보여주는 네모 반듯한 것이 두부가 아니라고 좀 말해 줘... " 너 슈퍼 다녀온거야?" " .........................." " 꿀 먹었어? 왜 말을 안해.. 내 옷 좀 달라니까." 지훈은 그저 싱크대 앞에 서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저 녀석 왜그러지? 설마... 웃고 있는 것은 아니지.. 제길.. 그래.. 나 네 놈에 비하면 허약하다. 하지만 너는 운동을 디립다 한 놈이잖아. 이 정도면 나도 한 근육질이라구... " 하아아아......" 갑자기 지훈이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등을 돌리고 있기에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지만... 맥이 팍 풀리는 듯한 그 한숨소리에 나는 왠지 가슴이 갑자기 조마조마했다. 왜? 나도 몰라. 그냥... " 강은우." " 어? 어.. 왜? " ..................네가 가져다 입어." 지훈이가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이런... 어제 내가 한 수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거야? " 그으래?" 나는 지훈이가 어제 나에게 한 말투를 거의 흡사하게 따라하며 대답했지만... 지훈은 묵무부답. 반응조차 없다. 나는 무안해져서... 제길. 너 잘났다..... " 돌아보지마." 라는 맹추같은 말을 하고선 쭈빗쭈빗 거리며 나왔다. 혹시나 지훈이가 돌아볼까봐 옷이 찢어져라 허겁지겁 입었는데.... 지훈은 여전히 그냥.. 서 있다.. " 지훈아... 너 내가 이 자식아라고 소리쳐서 화난거야?" 나는 왠지 머슥머슥 무안해져서.. 그의 옆에 우물쭈물하며 가 섰다. " .........아니." 지훈이 대답하는데 목소리가 왠지 이상했다. 얼굴을 바라보니.. 예의 또 그 멍한 얼굴이다. " 너 어제부터 왜 그래?" " ..........으..응?" 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왠지 뭔가 숨기는 듯한 표정이... 나를 약올리게 만든다... 안 그래도 일어났을 때 네 놈이 아주 가 버린 줄 알고..... " 슈퍼 갈 거 였으면 나도 깨우지 그랬어." " ......아.. 깨우기 싫어서... 그냥.. 자라구..." " 그럼 나갔다 온다구 적어놓고 나가던가.." 아차!! 나는 나의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 진 물. 쏘아버린 화살. 지훈의 입끝이 피식 올라간다. 그 멍했던 표정이 약간 무뚝뚝하지만 다정함도 함께 어린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리는 눈은 무엇이냐... " .....서운했어?" " 뭐?" " ...깨어났더니 내가 없어서 서운했냐구~" 지훈은 이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검은 봉지에서 이것저것을 싱크대 위에 늘어 놓는다. 헉.. 역시.. 그것들의 정체는 파와 두부였다.. 게다가.. 뭐야... 쌀에... 작은포장김치... 참치캔... 꾸역꾸역 잘도 꺼내어 놓는다.... " 너.. 이게 다 뭐야?" " ......아침은 먹고 학교 가야 할거 아니야.. 점심은 사 먹는다고 해도." " 난 아침 안 먹어." 먹고는 싶지만 혼자 챙겨먹는 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또... 또.... 서러우니까.... " ....난 먹어야 해. 그리고 난 너랑 같이 먹을꺼야......" 그가 또 다섯 살 짜리 아이같은 말을 늘어놓는다... 나랑 너랑 한입 한입 사이좋게 나눠먹자앙~~~ 분위기라도 하자는거야? 지금? " 그런 말 안 해도 같이 먹으니까... 그런 말 좀 하지마." " .......무슨 말?" 지훈이 쌀을 참 알뜰하게도 씻는다... 지훈아... 많이 해본 솜씨구나.. 너 집에서 도대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거냐... " 나랑 같이 한다는 둥. 내가 안 하면 너도 안 한다는 둥... 어린 아이도 아니고..." " ......다른 사람한테는 그런 소리 안해." " .................."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럴 때는 그냥 입 다무는 것이 상책이야... 이것저것 바쁘게 움직이는 지훈의 옆에 멀뚱히 서서 나는 그의 그런 행동을 넋을 잃고 보았다. " 지훈아..." " ..........응?" 달그락 달그락... 역시 손놀림이 익숙해.... " 많이 해 본 솜씨다..." " ......식구들이 원체 먹성도 좋고 수도 많으니까.. 내가 해 먹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어... 우리집은 철저하게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되는 집이지." 그가 자못 진지하게 말한다.... 그래.. 진지한 일이지... 그래 웃음이 나도록 진지한 일이야.... 내가 낄낄거리니까 지훈이 피식 웃는다. " 은우야." 갑자기 지훈이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 대었다. 코와 코가 마주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나는 순간 - 왜 그랬을까만은 -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버렸다. 헉!! 사태파악을 한 나는 나의 이 어처구니 없는 행동에 나 스스로 당황하여 허둥지둥 뒷걸음질 치며 눈을 떴다. 아아아.... 바보... 왜 눈을 감는거야... 정말.... 그런데 티셔츠의 목부분이 쭈욱 늘어난다. 어라... 지훈이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기고 있었다. " 뭐해!" " ..............너 모기 물렸나 보다." 지훈이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 무슨 소리야?" " .....모기 물린 것 같다구.." 지훈은 그냥 한번 씨익 웃고는 발 한 쪽에 체중을 싫어 삐딱하게 서서 김치찌개의 간을 보았다.. 그런 껄렁껄렁한 자세로 음식의 간을 보다니... 왠지... 웃긴다. " 모기?" 나는 고개를 갸웃갸웃 거리며 거울이 걸린 벽으로 걸어갔다. 전혀 안 간지러운데.. " 어라?" 옆 목선을 따라 어깨와 만나는 지점이 빨갛게 물들어 있다.. 아까 샤워할 때는 열에 들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모기에 물린 것이 아니라.. 멍이 든 것처럼 보이는데... 살 아래로 붉은 피가 송글송글 모여있다. 어디 부딪혔나? 꾹 눌러보았지만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않다.... 잠깐... 이거.. 마치.... 마치....마치...... " 은우야." " 어...엉?" 나는 목을 쭈욱 빼고 정신없이 그 붉은 자국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목을 움츠리며 뒤를 돌아다 보았다. " 간 좀 봐라." " 아. 대충 먹어. 그리고 네가 아까 간 봤잖아." 나는 머리 속에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상상을 훌훌 떨쳐버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 ....대충이 어딨어. 이왕 먹는 것 맛있게 먹어야지. 그리고 원래 만드는 사람이 간 보는 것 아냐." 무슨 이상한 논리를 끼워 맞추는 거야. 간을 누가 보던 무슨 상관이람... 먹으면 그만이지... 나는 하는 수 없이 지훈의 옆에 가 섰다... 음.. 냄새는 기가 막히군...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배가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 숟갈 내나 봐." " ....내가 줄게." 지훈은 내 말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자기가 직접 숟가락에 찌개를 약간 담았다. " ...뜨거워. 후우~" 헉.. 저 녀석이 왜 저럴까... 갑자기 머리 속에서... 예전에 본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제목이.................. 신혼살림이었던가? " 후~고 자시고 간에 빨랑 줘!" " ...성질머리하고는... 쿡.." 꼴깍..... 아... 아.. 맛있다...... 나는... 그냥 내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말이 내 입에서 절로 흘러나온 모양이다... 아니면... 내 얼굴에 그 감격의 표정이 너울너울 드러난걸까? " ...그렇지? 맛있지?" " 그냥 그래." " ....맛있다고 얼굴에 써 있는데 뭐." 그가 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파를 썬다... 앞치마 입혀 놓으면 정말 가관일거야... 빗소리가 내 가슴 속을 퍼진다... 고소한 밥 내음이 내 코 속에 퍼진다... 오늘은... 오늘 아침은 다른 날과 다르다... 갑자기.. 나는 내 방이 좋아졌다... 이 작디 작은.... 옥탑방이... 좋아져 버렸다....... 하지만....................조금은......................불안하다...................... 도대체 해는 언제쯤 모습을 드러낼까............. 장마가 끝나지 않는 이상............나의 악몽도....... 그의 악몽도 끝나지 않을 텐데.......... 또는......... 우리의 악몽이 끝나지 않는 한............이 길고 긴 장마도 끝나지 않을 텐데.................................... 끝나지...... 않을 텐데........................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마음에.. 안들어...." 집을 나선 후 비 오는 아침 골목길을... 나와 나란히 걸으며 단 한마디도 하지 않던 지훈이...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집을 나서며 한 나의 말이 몹시도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 그럼 너 먼저 학교로 가." 가서 봐야 해.... 나는 어젯 밤... 그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는 정말 살인이 일어났는지를.... 아니 일어났던 그 흔적들을 보지 못했다. " ....너 어제 죽을 뻔 했어.... 그것만큼은 악몽이 아니야.. 현실이라구..." 지훈의 목소리가 여전히 어둡다. 나도 안다.. 분명히 그것은 꿈이 아니야.. 나와 너에게는 환상의 세계일 지 몰라도... 살인을 저지른 그 놈과....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미치토록 사무치는 현실이란 말이야... 보고 싶다.. 가서 확인하고 싶다... 안다.. 사람이 죽었으며... 어젯밤 거기에 내가 있었음을... 그러나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 그 갈기갈기 찢긴 새하얀 우산을 내가 보고 내가 느끼고 뒤돌아서서 걸어나오지 않고서는 - 그 놈에게 처참히 살해당했을 그 가엾은 아저씨를 내가 찾아내어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깨닫지 않고서는 - 놓쳐버린 도끼와 그 ... 지갑을 이대로 달아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 갈거야." 내가 우뚝 멈추어 서자.. 지훈도 몇걸음 걸어가다 나를 뒤돌아 보았다. " ................" 나는 그를 향해 미소지었다. 그것은... 내가 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미소가 아니다. 그래. 어쩌면 내 안에도 수줍음과 내성적인 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들 앞에 그렇게 자연스레 행동할 수 있진 않을테니까.. 하지만.. 정말로 내가 드러내고 싶어하는... 내 안에 갇혀 " 나를 찾아 줘!" 라고 외치고 있는 나는... 고집 세고.. 건방지고..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인.. 녀석일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지훈을 향해 미소지었다. 나 스스로도 느껴진다. 지금 웃고 있는 나는 예전의 나와는 다른 것이다. " 네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대신 해볼까?" "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 가지마. 은우야. 네가 가면 나도 갈꺼야." " ....." " 그러니까 같이 가자는 거 아니야." 쿡쿡.. 이게 바로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다는 거야. 적어도 당분간은..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안 하겠지? 쿠쿡.. " .....괜찮겠어?" 지훈이 내 눈을 빤히 바라본다. " 그래." " ...................그럼 가자."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제길.. 발아.. 제발 빨리 좀 움직여라.... 반항하는 너의 목을 조르고 싶다... 그래보았자.. 발목이겠지만... 먼저 가자고 한 것은 나이다...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지훈이 먼저 앞서가게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 .......돌아갈까?" 지훈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지 않을까 내심 고민하며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의 쓸떼없는 오기가 슬며시 발동한다. ...그러나... 누구든.. 이런 상황에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쥐어짜며.. 오기를 부리지 않았을까? " 무서워?" 그것은... 그에게 한 질문이 아니다.. 바로 나 스스로에게 한 질문이다... 공원에 점점 가까워 질수록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속이 울렁거리는 바로 나에게 한 말이다. 두렵다. 무섭다. 그 굴러 다니는 남자의 얼굴이.. 그 시선이.. 나를 향해 똑바로 다가올까 두렵다... 어제 간신히 떨쳐버린 나의 죽음이.. 다시 들러붙어 곧장 어둠 속으로 나를 밀어넣어버릴까 무섭다... " ....그래. 무서워." 지훈이 나의 팔을 움켜 쥐며 중얼거렸다. " 그래. 무서워. 미치도록 무서워. 꿈에서 깨기 직전에 그 곳에서 그 살인마가 도끼질을 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에서 자고 있는 너를 발견했을 때 내 마음이 어땠는 지 알아? 제대로 움직여 지지도 않는 몸을 이끌고 이 길을 지나며 나 스스로를 얼마나 저주했는지 알아? 네가.. 네가... 죽었을까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냐구...." 지훈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하지만 오싹하고 소름이 돋을 만큼 격렬했다. " ....가자고 한 것은 너 였으니.. 돌아가자고 말해야 하는 것은 나야... 은우야..... 돌아가자..." < 그 곳으로 가 그것을 확인하고 와야 해 > " 가야 돼." 이런 때 오기를 부리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짓인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왜 오기를 부리느냐는 말 따위는 하지 마... 지금은.. 지금은 단순한 오기가 아니야.. 가야 돼... 내 머리 속에서 그 곳에 가 무엇인가를 반드시 확인하고 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 둘의 악몽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거야. 이 비와 함께 계속되는 피비린내도 영원히 떠나지 않을거야. 나의 이 미신적인 집착은 견고해 질 때로 견고해져 나의 숨을 틀어 막는다. 가야 돼. 가야 돼. 뭔가가 나에게 말하고 있어. < 그 곳으로 가 그것을 확인하고 와야 해 > " 지훈아... 나는 가야 해.. 나도 왜 가야 하는지 몰라.. 하지만 도망가고 싶어... 내가 도망가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줘." " ...싫어...." 하지만 지훈의 목소리는 확신이 없다. 단호하게 말하고 있지 못하다. " 가지 않으면 우리들의 악몽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 무엇이 나를 그토록 확신에 차게 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 하지만 지금 머리 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그 뿐이다. 가지 않으면 지훈과 나의 악몽을 끝내 줄 열쇠를 찾지 못해. " ...알았어.............. 자..." 지훈이 손을 불쑥 손을 내밀었다. " 뭐하자구?" " ....잡어...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 못 가게 단단히 붙들어 줄테니까.." 나는 무심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행여나 그가 도로 손을 거두어 갈까봐... 허.. 참나... 문뜩... 주위에 보고 있는 사람이 없나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지훈이 말했다. " ...둘러 봐도 소용 없어. 그 곳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안 놓아 줄꺼야." 그러고서는 지훈은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나는 정말 끌려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겨우 박자를 맞추어 따라잡고서는 그의 옆을 나란히 걸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비장하게 말이다. 그럼... 어디 소풍가는 사람처럼 가야 하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목숨이 오고가는 그 생명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악몽이라 할 지라도... 우리는 이미... 끼어들고 말았으므로... " 꺄아아아아악!!!" 순간 여자의 비명 소리가 빗소리를 가르며 울려퍼졌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그 소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뭐야? 설마 또 다른 희생자는 아니겠지? 이미 우산 따위는 멀찍이 내팽겨 쳐 버렸다. 철퍽철퍽. 바닥에 고인 빗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침 밥을 든든히 먹어서일까... 나는 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렸다. 오히려 지훈이가 약간 뒤쳐질 정도였으니까. 구불구불 구부러진 산책로는 무시하고 오로지 그 비명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벤치 따위는 그냥 뛰어넘어버리고.. 물 웅덩이에 발이 미끌하여 물을 흩부리며 반쯤 넘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달렸다. 맙소사... 숨을 헐떡이는 나의 입에서 신음이 섞인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기는 한 여자와 멍하니 서 있는 남자 아이 하나. 두 사람의 손에서 떨어진 우산이 바닥에서 뒹굴뒹굴 구르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는 .... 찢겨진 하얀 우산과....... 찢겨진 하얀 우산과 함께.... " 보지 마!! 보지 마!" 나는 꽉 막혀들어오는 목을 찢어버릴 듯이 날카롭게 외치며 아이를 낚아채듯 안아들었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려 버렸다. " 보면 안돼.. 보면 안돼..."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떨고 있는 탓인지.. 아이의 몸이 떨고 있는 탓인지... 나는 그 끔찍한 광경에 등을 돌린 채 아이를 안고서 계속 중얼거렸다. " 넌 아무것도 안 본거야... 넌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 " 진정하세요! 진정하세요!" 지훈이 아직도 바닥을 벌벌 기며 정신을 못 차리는 여자를 붙들며 소리쳤다. < 아아아아아악!!!> 그녀가 내지르는 비명소리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허공을 갈라 놓았다. " 넌 아무것도 안 봤어. 아무것도 안 봤어..." 나는 아이의 귀에 대고 계속 중얼거렸다. " 예... 안 봤어요.. 나는 아무것도 안 봤어요..." 아이의 몸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묘하게 차분했다. 아니... 넋이 나간 듯.... 혼이 빠져나간 듯... 그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이의 눈을 감싸고 있는 손바닥 안이 뜨거웠다... 필시 이것은 빗물이 아니야... " 그래.. 넌 아무것도 못 봤어..." 빌어먹을 새끼.. 지금 이순간 만큼은 너의 손도끼로 네 놈의 골통을 내가 깨부셔 버리고 싶어!!!! " 소년과 그 누나가 산책을 나왔다가 맨 처음 발견한 모양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주위가 온통 붉고 푸른 빛이다... 경찰차가 그 빛들을 뿜어내고 있다. 도대체 몇 대나 온 것일까... 공원 안으로는.. 차가 못 들어오는 것도 모르나? 아아..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따지고 자시고 할 수 없다... 텅 비었던 공원은 이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아침부터 이 빗속을 뚫고 뭔 놈의 사람들이 꾸역꾸역 구경하겠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 봐.. 당신들은 무엇을 바라고 나온거야? 흩어진 뼈와 살조각들을 보고 싶은건가? 나각나각 달려진 팔 다리를 보고 싶은건가? 바닥을 뒹구는 머리를 보고 싶은건가? 당신들은.. 도대체 무슨 심보야... 여기서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거야... 나와 지훈은... 뒷문이 젖혀진 엠뷸란스 안에 담요를 뒤집어 쓴 채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자판기 커피 한잔 씩을 들고 있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려고 한다... 마치 영화속의 한 장면이다.. 이것은... 지훈의 발이 나의 발을 탁 친다. 놀란 내가 그를 멍하니 쳐다보자 지훈은 그 무뚝뚝하고.. 평소와는 달리 매우 어두운 얼굴로 아주 짧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래... 지금 여기서 웃으면... 없는 죄도 뒤집어 쓰게 된다.. 아니.. 없는 죄? 과연 나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경찰들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 쿠쿡.. 뭐라구? 꿈에서 살인마와 의식을 교류하고 있어요. 그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저 또한 꿈에서 그대로 느껴요. 여기 이 친구는 꿈에서 살해당한 사람이 되요. 그런데 어제는 제가 네 번째 희생자가 될 뻔 했어요. 꿈에서 저를 본 친구가 깨자마자 저를 구하러 왔어요. 저는 죽기 싫어서 꿈에서 깨어 그 놈에게 달려들었어요. 우리는 무사히 도망쳤어요. 왜 공원에 들렸냐구요? 그냥 오고 싶었어요... 음.. 범행을 저지른 범인은.. 반드시 그 범행장소에 되돌아 온다고도... 말도 안되는 소리... 나는 그 밍밍하고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자판기 커피를 홀짝 거렸다. 정말... 맛이 없다... " 이 봐. 학생들.. 지훈군과 은우군이라고 했지?" 누가 검은 우산을 쓴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정말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검은 우산과..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검은 넥타이까지... 마치.. 장의사 같다.. 그래... 어쩌면.. 이 경찰들 가운데.. 저 사람이 가장... 생각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죽은 시체를 바라보며 알록달록 와이키키 해변이 그려진 셔츠를 펄럭일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바로 저기서... 남자의 시체를 확인하며 아침으로 생각되는 사과를 우적거리는 저 사람처럼 말이다... 그는 손가락에 묻은 사과의 즙을 날름날름 잘도 핥다가 주변의 정복 경찰들에게 뭔가 한마디 씩 하고 있다. " 제가 최지훈입니다." 지훈이 먼저 대답했다. 딱 부러지는 목소리. 그 안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없다. 오히려 마치 무엇이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하는 듯한 말투다. 나는 또 다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마치 대답을 하려다 커피가 목에 걸린 양 기침을 하며 간신히 대꾸했다. " ...예." 그렇다... 어차피 한 쪽이 지훈이면 다른 한 쪽은 은우인 것이다. 길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 그런 나를 검은 옷의 형사............... 분명 형사겠지.. 그는 그러고보니 자기 소개를 하지 않았다. 왠지 그 점이 처음에 그나마 좋게 다가왔던 인상을 깎아내렸다............. 가 흘긋 바라보았다. 가슴 안이 싸늘해진다.. 자꾸 입가에 냉소가 새어나오려고 한다. 갑자기 내가 형사와 두뇌 싸움을 하는 지능범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란 말인가.. 나는 지금 내가 대단히 흥분해 있으며 또한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자네들이 두 번째로 저것을 발견했다지?" 형사가 고개를 까딱하며 와이키키 해변의 셔츠를 입은 남자 쪽을 가리켰다. 저것......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의 남편이었을..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그 남자.... 가 오늘은.. 저것이 되어버렸다. " 그런 것 같습니다." 지훈이 대답했다. 그러고보니.. 지훈은 그 특유의 느릿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 하기 전에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느릿한 침묵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 " 그러면 그런 거지.. 같다는 것은 또 뭐야?" " 또 혹시 압니까? 다른 누가 숨어서 지켜보았을지? 두 번째인지 세 번째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죠." 나의 입에서 독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왜 그랬을까.. 나는 내가 말해놓고서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가슴 한 가운데가 싸늘한 것이 왠지 기분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목덜미가 후끈후끈 한 것이 뭔가를 때려부수기 직전의 흥분 같기도 하다... " 음.. 그렇겠군.."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음음.. 거린다... 그래.. 당신 속이 보인다.. 당신.. 지금 나를 도발하는 것이로군. 지훈과 내가 어떤 부류의 인간인지 체크하고 있군. 당신 같은 사람을 아주 잘 알아... 내 아버지 같은.... 그러나 당신은 직업 탓이겠지.. 그래... 적어도 당신에게는 악의란 없어... 나는 왠지.. 형사가 가엾게 느껴졌다.. 이 축축하고 후덕지근한 날... 이 비속에서.. 뭐하는 것일까.. 지친 눈가... 지친 목소리... 어쩌면.. 저 검은 양복은.. 그 피로함을 감추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겠지... 지금.. 이 피에 물든.. .살인이 세 번째이므로... 나에게 고맙다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네 번째 희생자가 생기는 것은 일단 막았으니... 적어도 오늘 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나는 좀 고분고분해 지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 편이... 나에게도 .. 지훈에게도 이로울 테니까.. " 아이는... 어떤가요?" 나는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형사는 응?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마를 긁적긁적 긁으며 말했다. " 다행히 자세히는 못 본 모양이야. 오히려 누나 때문에 더 놀란 것 같더군.. 아... 자네의 행동은 들었네.. 잘 했어.. 아주 잘했네.. 나도.. 그 아이 또래의 딸이 하나 있다보니..." 역시.. 형사는 나에게 악의같은 것은 없었다.. 당신도.. 누군가의 남편이고.. 누군가의 아버지로군요... " 그나저나 좀 수고스럽겠지만... 상황을 좀 이야기 해 주겠나?" 형사가 지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역시 지훈의 그 "무엇이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의 분위기가 먹혀 들어간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지훈이.. 그 평소의 느릿한 말투를 쓰지 않은 것은.. 이것을 노린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사의 질문이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쪽으로 돌아오도록 말이지.. " 은우.. 그러니까 여기 있는 제 친구가 어제 아파서 조퇴를 했습니다." 지훈의 뜬금없는 말에도 형사는 그저 음음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 친구가 혼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이 되어 친구집을 방문했고 친구 방에서 잤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왔기에 산책도 할 겸 이야기도 나눌 겸 공원 쪽 길로 등교를 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더 물어보실 것 있습니까?" 지훈의 또박또박하고 강인한 말투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어우러져 마치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형사가 지훈에게 질문을 한 것도 이 때문일지도.. 형사는... 지훈 같은 부하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지도 모를 일이지... " 음.. 그런데 말이지... 자네 얼굴이 왜 그런가? 누구한테 맞은 것 같은데?" 형사의 느닷없는 질문에 지훈이 한 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역시.. 연륜과... 직업은 무시할 수 없는 것... 그런 예상치 못한 질문이 지훈의 평정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훈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 예. 맞았습니다." " 누구한테 맞았나?" " 친구한테 맞았습니다." " 누구? 자네 정도의 체격에.. 그 정도로 두들겨 맞는다면 창피한 일 아닌가?" 형사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훈 역시 지금쯤 담배를 피우고 싶어 미칠 노릇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깨어 있는 동안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담배 향과 함께 느껴지는 그의 체취를 내가 좋아하는 지 알고는 있을까.. 무슨 헛소리야.. 또.. 여하튼.. 지금쯤 지훈은 담배를 피우고 싶을 것이다... 나는 지훈이 망설이고 있는 대답을 대신 해 주었다. " 제게 맞았으니 창피할 만 하죠."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다시 그 맛없는 커피를 마셨다. " 자네는 멀쩡한대?" " 눈에 안 보이는데만 골라서 맞았죠. 사실.. 표나게 때리는 것은.. 저같은 멍청이나 하는 짓이라서요." 나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갑자기 지훈이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죄송합니다." 지훈이 얼른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형사는 그 지치고 피곤한 얼굴에 잠깐이나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자네들 학생증을 일단 가지고 있어도 될까? 뭐. 별다른 사항이 있는 것은 아니고.. 몇가지 서류 작성 할 때 참고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조서니 뭐니.. 골치 아픈 일이 태산인데.. 자네들.. 학교도 가야하고... 일단.. 내가 자네들 담임선생님께는 말씀드렸으니... 걱정은 하지 말게." 나는 이미 그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내가 조퇴한 일. 지훈이 나를 따라 조퇴한 일. 내가 혼자 산다는 것. " 저... 형사님." 몸을 쓰윽 돌려 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 그 아이.. 제가 만나 봐도 될까요?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냥.. 제가 직접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 좋을대로.. 저 쪽에 있네. 그럼 나는 이만." 나는 형사가 손짓으로 가르쳐 준 곳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엠뷸런스. 아이의 누나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듯 했다. 훌쩍거리고는 있지만 경찰의 물음에 무언가를 열심히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지훈을 흘끔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나는... 또박또박 아이에게 걸어갔다.. 어쩌면 나의 머리 속에서 그토록 공원에 가도록 만든 것은 저 아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만약 내가.. 공원에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저 아이가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게 되었다면.. 앞으로 저 아이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멍한 눈. 그리고 차가운 눈.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걸까? 그 초점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다시 그 나무꾼 녀석에 대한 증오가 불같이 일었다. 그러나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로.. 조용한 어투로 그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 안녕?" 아이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 형아. 안녕?" 그 웃음이 어찌나 천진스럽고 선한지 나는 하마터면 눈물이 왈칵 쏟을 뻔 했다. 나도.. 이런 때가 있었을까... 아무 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웃을 때가 있었을까? " 형. 나는 아무것도 못 봤는데 누나는 본 것 같아." 아이가 짐짓 걱정스럽게 말했다. " 괜찮아. 너희 누나는 강한 사람이니까 곧 잊을거야.." 나는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아이의 누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와 비슷한 얼굴. 나보다 나이가 많다. 20대를 갓 넘겼을까? 누나라고 하기엔 아이와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것이 아닐까... 여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물을 글썽이며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고.... 여자에게 눈인사를 한 다음... 뒤로 돌아섰다.. 나를 지켜보고 있을 지훈을 향해서... 그런데... 지훈은... 그 자리에 없다.. 나의 눈은 지훈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어디 간거야? 지훈아? 어디 간거야? 지훈이 서 있다.. 그 곳은... 내가.. 아니 그 나무꾼 녀석이 어제 밤에 남자에게 다가가 지갑을 보여주던 그 곳이다... 지갑.. 지갑.. 그러고보니 지갑을 잊고 있었다. 그 나무꾼 녀석이 남자의 목에 도끼를 들이박으며 그 남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며 떨어뜨렸을 지갑... 나무꾼 녀석이 어딘가에서 "주웠다" 라던 지갑.... 살인자는 남자를 질질 끌고 가 사지를 절단했다... 남자의 시체가 있던 자리는 경찰들이 득실거린다... 지훈은... 잠시... 아주.. 낯선.. 그리고 무서운.. 얼굴로... 서 있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땡그랑> 분명히 들릴 리가 없는데도 나는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모든 소리를 잠 재우고 나의 귀를 파고 든다... 동전은 나무 벤치 쪽으로 굴러간다... 그리고 물 웅덩이에서 멈춘다... 벤치의 다리 뒤로...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있다.. 네모난.. 납작한.. 그것은... 지갑이다... 지훈이 동전을 줍는 척 하며... 지갑을 주워 든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아주... 자연스럽다.. 태연하다... 본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으리라... 각자들 자기의 일에 몰두하고 있으므로.. 본 사람이 있다해도...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 만큼.. 지훈의 행동은... 섬뜩하리 만큼.. 태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나의 가슴 속을 두려움으로 가득 채울 만큼.. 차갑고 냉정한 얼굴... 한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 무표정한 것과는 다르다.. 얼굴에... 그리고 저 검디 검은 눈동자에 흐르는 냉랭함. 나는 다시 천천히 돌아섰다. 차갑고 냉정한 얼굴... 손끝이 닿기만 해도 얼어붙어 산산히 조각나 버릴 것 처럼 싸늘한 얼굴... 그리고..... 검은 얼음조각같이 날카롭고 차디 찬.. 눈동자..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 그 곳으로 가 그것을 확인하고 와야 해 > 무엇을... 나는 무엇을 확인해야 했던 것일까? 아이? 지갑? 아니면.. 저 낯설디 낯선... 지훈의 또 다른 모습? 심장이 얼어붙는다.. 그리고... 조각조각 부서져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나의 심장은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거울처럼 부서져... 피를 흘리며 울부짖는다... 나는.... 무엇을 확인해야 했던 것일까... 나는... 나는... 아무래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 같다... 아무래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만 것 같다... 비가 내린다.. 나의 마음 속에도 비가 내린다... 그래.. 내려라.. 나 대신... 울어다오... 멈추지 마라... 영원히 내려라... 내 숨이 끊어지는 그 날까지.. 쉬지 말고 내려라.. 내 영혼이... 끊임없이.. 흐느끼듯이...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그러나... 나의 바램...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뭐야. 어제 둘이 치고 박고 싸운 것 같아서 나는 기껏 니들 기분 풀어주 려고 미팅 약속까지 잡아 놓았는데 꼬락서니들 하고는...." 성혁이 연신 거울을 들여다보며 젤을 잔뜩 바른 머리를 멋들어지게 넘겼다. " 너 그러다가 학주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아주 죽으려고 용을 쓰는 구나." 아이들이 제출했던 공책을 하나 씩 나누어 주던 재준이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성혁을 한번 흘겨 보았다. " 야. 오늘 상대는 최고의 꽃미녀들이 모여 있다는 H 여고 애들이란 말이야. 때 빼고 광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 아니겠어? 어이. 비에 젖은 연인들. 안 그래?" 점심 시간이 거의 다 지날 때 쯤이 되어서야 교실에 들어선 우리가.. 맨 처음에 듣게 된 말은.... 미팅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성혁이 비에 젖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늘어놓는 불평이었다. " .............."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내 자리로 향했다. 학교로 오는 내내.. 나는 지훈을 쳐다보지도 못했고... 아무런 말도 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기에... 나의 눈은... 멀었고... 나의 심장은... 상처입었다... " 그런데 지훈아. 정말이야? 너희들이 시체 발견했다는 게? 아까 교무실이 떠들썩하다고 재준이가 그러더라." 성혁의 목소리가 교실 안에 울려퍼졌다.............. " ......................." 지훈이 대답했는지 대답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 내가 언제 떠들썩하다고 그랬어? 담임이 그냥 그런 소리를 했다고 했지." 재준이 뒤늦게 대꾸했다............. 사실.. 그런 것에 신경쓰고 싶지 않다........... " 야. 정말 온 몸이 조각조각 났어? 응? 끔찍하디?" 나는 성혁의 입을 찢어버리던지 꿰매버리던지 둘 중의 하나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머리가 멍멍하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냥..... 그냥 좀 쉬고 싶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바보처럼 말이지..... 그 싸늘했던 검은 눈동자에서.... 그 차갑고 무섭던 얼굴에서.... 달아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알아채서는 안돼.... 나는 두렵다... 지갑을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숨기던 그의 행동을 보았다는 걸.... 지훈이 알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설마..... 설마.....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야... 분명히 두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지훈은 집에 있었어. 그리고 어제도... 그 놈과 뒤엉켜 죽기 살기 몸부림칠 때 지훈의 목소리를 들었어... 하지만... 하지만.... 왜? 왜? 왜? 지훈은 왜 그 지갑을 몰래 숨긴 것일까? 경찰에게 보여주면 안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왜? 왜? 왜? 나는 그가 적어도... 적어도.... 두 번째와 세 번째 사건과는................................................ 그래........ 적어도... 말이지... 그렇다면... 첫 번째는? <꽈당> 일순간 백여개가 넘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소름이 오싹 돋았다. 마치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에 달린 눈들처럼 보였다. 백 여개가 넘는 까만 눈동자들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새의 팥알같던 눈동자. 파내버리고 싶어.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가 의자를 발로 찼다는 것을 알았다. 그 요란한 소리는 넘어진 의자가 내지른 비명소리였던 것이다. " 아. 미안." 나는 싱긋이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그래. 그 웃음 말이야. 수줍고 선한 특징없는 미소말이야. 나의 가면이 다시금 단단해 진다. 이번만큼은 그 누구도 벗겨 내지 못해.... 그래... 그래... 뚫어지게 쳐다봐라... 아무리 너희들이 보아도... 나는 절대 내 안의 나를 드러내지 않을테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 이제 너희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성난 짐승일 뿐이야. 아무도 오지마. 물려. 다쳐. 아무도 오지마. " ..........강은우....." 나는 나의 가슴을 뒤흔드는 목소리를 향해 돌아섰다. 흔들리지 마. 흔들리지 마. 저것은.. 그냥 목소리일 뿐이야. " 응?" 나는 그에게.... 만들어진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거야. 그에게도 보이지 말자. 그에게 들켜서는 안돼. 숨기자. 무엇이든지 숨기자. 지훈에 대한 나의 마음과... 오늘 아침에 본 그의 행동에 대한 의문을.. 무엇이든지 숨겨버리자. " .........옷 갈아 입으로 가자." 지훈의 눈이 나를 꿰뚫어 보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안돼. 나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을거야. " 너 먼저 다녀와." 다시 싱긋 웃으며 내가 대답했다. 지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마치 고함을 지르고 싶은 사람과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질러 봐. 뭐라고 소리치고 싶은거냐. 어디 한번 들어보자. 너 정말 죽어볼래? 한 번 죽어 볼래? ......라고 소리치고 싶니? 틀렸어. 그건 내가 했던 말이야. 폭발하는 감정의 응어리... 그러나 과연.. 너에게 그것은 울분의 토로일까.. 아니면... 진심일까............. 나는 너를 모르겠어. 지훈아.... 지훈은 뭔가를 말할 듯 하려다가 몸을 돌려 사물함 쪽으로 향했다. 차분한 행동.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서 일까? 하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다. 그가 체육복을 꺼내 뒷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본 나는 갑자기 키득키득 웃음이 나왔다. 왜 그래? 그 표정 좀 지어보지.. 그 차갑고 무서운 표정 좀 지어보지 그랬어... 또 알아? 내가 겁에 질려 미친 듯이 네 이름을 부르며 바짓자락을 붙들고 울어댈지? 아... 신경들이 곤두 선다.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지금이라도 당장 끊어져 버릴 듯 하다... 주변 사람들이 평하기에 나는 언제나 단순한 존재. 내성적이고 말이 없으며 이렇다 할 의견은 내세우지 않는 그저 착한 사람. 사람들 속에 파묻히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조차 않는 존재감 없는 인간. 넌 참 착해. 그렇게 보아주니 고마워요. 넌 참 착해. 그렇게 보아주니 감사해요. 넌 참 착해. 그렇게 보아주니 황송해요.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가면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일까? 필요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가면을 바꾸어 가며 너희들을 속이고 있는 것일까? 수줍은 미소 뒤에 숨겨진 메마른 나의 냉소. 선한 대답 속에 감추어진 악의에 찬 나의 독설. 조용한 침묵 안에 담겨있는 폭발하는 나의 분노. 너희들은 나의 웃음 뒤에 숨겨진 노여움을 보지 못하는가? 너희들은 나의 악수 속에 감추어진 적의를 보지 못하는가? 너희들은 나의 포옹 안에 담겨있는 증오를 보지 못하는가? 보일 리가 없겠지. 나란 인간은 수만 개의 가면 속에 얼굴을 가린 채 너희들을 노려보고 있으니... 벗겨 봐. 내 가면들을 벗겨 봐. 부셔 봐. 내 가면들을 부셔 봐. 피 흘리고 몸부림칠지언정 가면 속의 나는 언제나 공허한 눈동자로 지켜볼 뿐이야. 너희들은 오늘도 말하지...... 넌 참 착해. 너희들 눈 속에 비치는 나는 여전히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선한 말 한마디 대답하고 입을 다물 뿐이지. 그래. 그랬구나. 난 참 착해. 난... 참... 착해... 난... 참... 착! 하! 다! 구! " 강은우." 성혁이 나를 불렀다.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 너 왜 그래?" 나는 또 싱긋... 마치 하루 종일 서서 다리에 피가 몰리면서도 퍼레이드를 위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5월의 여왕처럼...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 나 원래 이래." 성혁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래. 그래. 다 나의 적이다. 상관없어. 나는 나 자신만 믿으면 돼. 나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말자. 상처 입을 뿐이야. " 야. 은우야. 너 괜찮아?" 재준이 걱정스런 얼굴로 나의 팔을 잡는다. 그래... 어지간히 걱정되시겠다. 내가 여기서 난리라도 피우면.. 반장으로써 체면이 안 선다 이거야? 쿠쿠쿡.. 재수 없어. " 10새꺄. 손 치워." 재준의 얼굴이 이그러진다. 그래... 키키킥. 놀랄 만도 하겠지. 이렇게 방실방실 웃으며 이런 말을 내뱉는 내가 낯설어? 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너는 나를 알지도 못하잖아. 네가 아는 것은 강은우란 이름을 가진 빈껍데기 일 뿐이니까. 목 뒤로 흐르는 물이 뜨겁게 느껴진다. 흐르는 물이 뜨거운 것일까.. 아니면 내 안의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일까... 나는 거의 경악스런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을 향해 키득거리며 소리쳤다. " 구경났어? 엉? 뭘 야리고 지랄들이야. 쿠쿡." " 강은우. 네가 그 시체보고 충격받은 건 알겠는데. 너무 심한 것 아냐?" 누군가 나서서 이야기 한다. 기억에 없는 놈. 저 놈도 우리 반 아이였던가? 지금 네가 나에게 시비를 걸고 넘어지겠다는 거야? 엉? " 충격 좋아하시네. c8! 안 그래도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제기랄. 네 놈들에게 착한 척 구는 것 따위 이제 엿 같아!! 니 놈들이 언제 나에게 신경 썼다가 이래라 저래라야! 이 미친 새끼야!! 그런 꼴 같 잖은 짓이걸랑 지나가는 개에게나 줘 버려!!" 머리에 피가 확 거꾸로 솟는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분노는 누구를 향한 것일까? 너? 지금 쫄아서 뒷걸음질 치는 네 녀석. 아니... 너는 그냥 재수없이 걸렸을 뿐이야.. 나의 분노는... 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단 한 사람에게 만이다. 나는 슬금슬금 나에게서 멀어지는 녀석을 향해 책상을 걷어찼다. <우당탕탕!!> " 기분 더러운데. 나랑 한번 해볼래?" <쿠당탕탕!!> 나는 옆에 있는 책상을 또 하나 걷어찼다. " 싫어? 싫어?" " 야.. 으..으..은우야. 왜 그래?" 그 녀석이 말을 더..더..더...더듬거린다. 이렇게 말야.. 쿠쿡.. 예전에는 나보고 계집애처럼 숫기없게 말한다고 했던 녀석이 말야. 아.. 그래.. 그렇구나.. 너 우리반 이었구나.. 키킥.. 순간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뒤를 향한다. 어쩌면 저리도 똑같이 움직일까...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난감 같아.... 나는 춤추는 인형처럼 몸을 빙글 돌렸다. 지훈이.. 체육복을 입은 지훈이... 뒷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아이들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더니.. 이윽고 바닥에 나뒹구는 두 개의 책상과 그 뒤에 서서 쩔쩔 매는 녀석에게로... 그리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나에게로 향한다. " ......................" 지훈은...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라는 말 따위도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나를 쳐다볼 뿐이다.. 마치 내 영혼을 꿰뚫어 보기라도 할 듯이 말이지. 그 따위 시선을 집어 치워. 점심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 소리가 무섭도록 고요한 교실 안에 울려퍼졌다. 아마.. 평소같으면..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에... 들리지도 않았을.. 그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귀에 거슬린다.. 나는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그래. 네가 그 지갑을 집어들 듯이 그렇게 말이야... 태연하게.. 자연스럽게 사물함으로 걸아가 체육복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흔들흔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듯이 리듬감있게 뒷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이런 식으로 너를 지나치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 그 때는 붙잡지 않았어. 하지만 따라 나왔지. 이번은? 이번의 너의 반응은? 붙잡지 마! 그 때처럼 붙잡지마! 그리고 따라오지도 마! 나를 가게 내버려 둬! 나는 네가 두려워. 너의 속을 알 수가 없어. 너를....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속였어! 속였어! 속였단 말이야!!!!! 순간 지훈의 손이 나의 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나의 주먹이 지훈의 얼굴을 가격했다. 퍼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가락의 마디들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지훈은 고개가 반쯤 꺾인 채 비틀거렸으나 나의 손만큼은 놓질 않았다. 놓아! 놓아! 이 손 놓으란 말이야!!! 지훈의 터진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눈동자가... 그 검은 눈동자가 불투명한 빛을 띄며 섬뜩할 정도로 새까맣게 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아프니? 미안." 쿠쿠쿡... 히죽 웃으며 내뱉은 나의 말에... 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래.. 너만 나를 동요시키는 것이 아니구나. 기분이 어때? 더럽지? 빌어먹을 자식아!!! 이 손 놓으란 말이야!!!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복도를 나섰다.... 텅 빈 복도... 나를 지켜보는 눈은 단 하나도 없다. 그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나는 나를 죄어드는 이 숨막힐 듯한 압박감에서 벗어난 듯 하다... " 으으윽." 아아... 목이 잠겨온다... 그래.. 눈이 아리다... 울고 싶다... 흐느끼고 싶다. 소리내어 엉엉 울어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 사치일 뿐이야... 우리 학교의 화장실은.... 건물 내에 있기도 하고... 건물 뒤 편에... 일명 초록동산이라 불리는 작은 산마루와 이어지는 부분에 창고만한 화장실도 있다. 교무실과 가깝기 때문에... 주로 선생님들이 이용하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가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텅 비곤 한다.. 나는 또 다시 비에 흠뻑 젖어...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차피 교실로 들어갈때는 비에 젖은 옷을 우산 대신 삼으면 되니까... 여하튼... 나는 무조건 밖으로 나오고 싶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울고 싶어서 이다. 교내 화장실에서 꺼이꺼이 울기라도 하다가... 옆 교실에서 벽을 통해 그 소리를 듣고 귀신이 나타났네.. 어쩌네... 소란이 일어나면 곤란한 일이 아닐까나.. 쿠쿠쿡.... 그냥... 밖으로 나오고 싶었을 뿐이야...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숨이 막혀... 숨이 막혀서... 죽을 것 같다구... 나는...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걸까... 지훈이가 살인자라구? 말도 안되는 소리다.. 적어도 그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살인이 있을 때 그 자리에 없었다... 살인마가... 희생자의 피로 손을 물들일 때... 지훈은... 나에게 전화를 했고.. 나를 찾아 공원까지 왔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구? 그 지갑... 그 지갑.. 그리고... 순간.. 그가 지었던 그 표정.. 내가 모르는 그의 또 다른 모습.... 나의 뇌를 파고드는 생각.... 누군가가 듣는다면... 말도 안되는 미친 소리라고 깔깔거리겠지만.... 이 세상엔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수두룩하다... 지훈과 살인마는 서로 아는 사람이 아닐까... <좀 더 솔직히 말해 봐> 그래... 지훈과 살인마는 공범일지도 몰라.. 서로 번갈아가며.... 단지 나의 악몽에서 희생자가 그로 보이는 것일 뿐... 어차피 나의 악몽은 현실이 왜곡된 환상이므로... 내가 악몽을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지훈은 잠시 뒤로 물러나 있는것일지도.. 나는 왜 지훈을 그토록이나 믿은 걸까... 무엇이 그에게 내 마음을 열도록 만든것일까.. 그것은 지훈과 내가 같은 악몽을 꾸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래.. 그렇다고 치자... 이 설명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일이 가능하다고 치자... 하지만.. 그가 정말로 희생자인 것일까? <좀 더 솔직히 말해 봐> 그가 희생자로 보이는 것은 단지 나의 악몽에서 일뿐. 그의 악몽에서도 그가 희생자일지는 모른다. 지훈 자신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 어쩌면.. 사실 그는 나처럼... 살인자일지도.. 아니면 구경꾼일지도.. 내가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 결정적인 말은.... 그 말은... -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봤어 - 그러나... 말은.. 아 틀리고 어 틀린 법이다.. 나는....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세찬 빗줄기 속에서.. 그의 말을... 내가 듣고 싶은데로... 오해해서 들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말한 것은 말이지... 이 말이었는지도 몰라.. - 이미 두 번이나 죽여 봤어 - " 우우웁." 갑자기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미쳐버린 것이 틀림없다.. 정말로 나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모든 것이 나에게 버거워... 힘이 들어... 나는 이제 이겨내질 못하겠어... 차라리.. 나무꾼에게... 죽어버렸다면.... 옷을 갈아 입고서 화장실 작은 칸 안의 벽에 기대어 소리 없이 울며.... 한참이나 서 있었다... 소리 없이 우는 것은... 엉엉 우는 것보다... 몇 배로 힘이 든다... <찰칵> " ........................" 등골이 오싹했다.. 문 바로 앞에서... 라이터 소리가 났다... 설마... 하지만.. 분명히 라이터를 켜는 소리야...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매캐한 담배 냄새가 느껴진다... 나는 무심코 위를 올려다 보았다. 칸막이 문위로... 뿌연 담배 연기가 몽실몽실 솟아오르고 있었다. " .......문 열어 줘....." " 꺼져." " ....은우야. 문 열어 봐...." " 꺼지라고 했어." " ....왜 그러는 지 이유라도.. 알자." " 닥쳐." " ...집에서의 행동과.... 지금의 행동이... 너.. 얼마나 틀린 지 알아?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 당연하지... 아무 것도 모르는 때와... 보지 말하야 하는 것을 본 후가... 너는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 영문을 몰라? 그것도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 입 닥치고 꺼져버려." " 은우야....... 문 열어 줘...." " ............" " 문 열어." 지훈의 목소리가 이제 아예 명령투이다. 빌어먹을 자식! 지옥에나 가버려!! " 싫어." " 문 열어!" " 하! 문 안 연다면 어떡할래? 죽일래? 그래... 최지훈... 죽일 수 있으면 죽여봐. 이미.. 두 번이나 죽였던 것처럼... 아니.. 이제 세 번인가?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머리 속에 마구마구 엉켜 있던 생각의 찌꺼기들이 내 입을 타고 술술 흘러나온다... " ....................너... 그게........무슨 말이야..............." 지훈의 목소리가... 낯설다....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 같은... 무겁게... 아주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 " 꺼지라고 했잖아!!! 너 따위 지옥에나 가 버려!!!" " 문 열어!!!!!!" " 죽어버려!!!" <치익> 문 밑으로 하얀 담배 꽁초가 떨어졌다. 바닥의 물기에 꺼져든다. 그의 신발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져 버렸다. 간 건가? 이제 간거야? <꽈앙!> 그 엄청난 소리에 나는 털썩 좌변기 위에 걸터 앉고 말았다. 문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야... 문을 부술 생각........ 나의 추측은 빗나가 버렸다. 문 위로 쑤욱 올라온 지훈의 모습에 나는 질겁을 했다. 지훈은 문을 발로 딛고서 담치기 하듯 안으로 넘어올 작정이었던 것이었다. <끼익끼익> 그의 무게에 눌린 문짝이 비명을 질러댔다. 지훈은 날렵한 맹수처럼 훌쩍 안으로 넘어들어와 나를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뺨에 소름이 화악 돋았다. " ...................너...... 도대체 왜 그래...." 좀 전에 나와 맞고함을 지르던 기세는 어디갔는지...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문을 넘어들어온 그 기세는 어디갔는지... 지훈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둡다.... 아마도... 내 얼굴에 번져 있는 눈물들 때문일까... 나는 얼른 손으로 물기를 닦아내었다. 이렇게 반응해서는 도저히 그에게 당해 낼 수 없다. 그래... 네가 나를 동요시키듯.. 나 또한 너를 동요시키면 된다. 나는 예의 가식적인 웃음을 띄며 그에게 말했다. " .....죽어. 이 자식아." 그래.. 그 표정이야. 키키킥.. 너도 어지간히 힘들었겠구나.. 응.. 그렇지? 그렇지? 진작에 그렇게 죽일 듯이 바라봤어야지.. 지훈이 두 팔을 뻗어 벽에다 대었다. 나의 얼굴이 그 사이에 갇혔다... 지훈의 그 타는 듯한 시선이 나를 강렬히 쏘아보았다. " .............그래... 그랬으면 좋겠어?" 너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우울해서... 내 가슴을 조여든다. 마치... 독을 머금은 안개처럼.. 축축하면서도... 나의 숨을 조여들어와.... "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이러는 이유는...." 지훈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왔다. 피하지 않을거야. 또는 눈을 감지 않을거야. 너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나는 오로지 나만을.. " ...............하나밖에 ........없어.................... 너........ 봤지............." " 입 닥쳐. 네 목소리 더 이상 듣... 으읍!!" 지훈의 입술이 거칠게 나의 입술을 덮쳤다. 마치 정말 죽일 기세처럼 짓누르며 파고 들었다. " 으으읍!!!" 나는 그의 갑작스런 행동은 나를 두들겨 패고 짓밟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건.. 마치.. 꿈의.. 아니.. 그것과는 달라!!!!!! 싫어! 싫어!! 저리 가!!!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후려치려 했으나 저지당하고 말았다. 지훈은 아예 내 두 손목을 틀어쥐고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입앗에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내가 터트린 지훈의 입술에서 다시 피가 흐르는 모양이겠지.. 피 맛이 느껴지자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미친 자식! 개새끼!! 너 지금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줄 알아? 망할 놈아!!! 나는 무릎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힘껏 찍어 올렸다. " 제길!!" 지훈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미친 자식!! 내가 다시 주먹을 날렸으나 지훈은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나의 팔을 붙잡아 확 꺾어 버렸다. " 아악! 이 새끼 못 놔!" " ....강은우.......내가... 못 피해서.. 맞았었는 줄 알아?" 갑자기 목덜미가 섬찟섬찟했다.. 식은 땀이 주루룩 흘렀다... 낯선 목소리. 낯선 얼굴.. 낯선 눈동자... 낯선.. 사람이 나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 ..... 너.. 봤지.. 그렇지. 강은우..." " 무...무얼.." 듣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달아나고 싶어!!!! " ............지갑 말야..." " ..........." ".........내가 지갑.... 주워서... 주머니에 넣는 것.... 봤지....." " ..........." " ......그거 주우면서..... 내가 어떤 표정.........지었는지도..........봤겠네....... 그렇지?" " ............" " ........무서웠니? ..........기분이.... 이상했겠지.... 그렇지.... 그럴꺼야..........." " ............" " ........내가 너의 그.... 가증스런 웃음을.... 처음 봤을 때... 처럼 말이지......." " ........" " ...........늘 똑같은 가면을 쓰고... 헤헤헤헤.... 속에 가득 찬 독기는 모조리 감추고.... 아이들을 향해 빙글빙글거리는..... 너의 그 웃음을.... 처음 발견했을 때...........나도 그랬으니까..........." " 닥쳐! 아악!!"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훈이 나의 팔을 더 세게 꺾었다. 나는 비굴하게도 숨을 헐떡이며 더 아픔을 느끼지 않게 지훈에게 달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 ........그래서.... 그랬니? 그래서.... 반 아이들에게.... 그렇게 군거야? .....강 은우.... " 지훈이 다시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미친 놈!!! 미친 녀석!!! 뼈 속까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다.. 나는 정말 무섭다.. 죽도록 무섭다.. 그 나무꾼 녀석에게 달려들었을 때도...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이렇게 까지 무섭지는 않았다.... 깜깜한 어둠 속 낯선 세계를.. 불 하나 없이.. 혼자 걷는 듯한 기분이다.. 발 밑에 무엇이 있는지... 나의 코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재미있었니? ............그래서.... 그렇게 웃었니?" " 죽어. 개 자식아." " ..............니 성질 더러운 것... 잘 알고 있으니까...... 발톱 세우고 .... 덤벼 들지마...." 어깨가 빠질 것 같아... 제기랄.. 아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그나마 알량한 자존심에 소리는 차마 지르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아픔을 덜 느끼기 위하여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훈과 시선이 마주칠까봐 두 눈을 꼭 감고서... 그가 쿡하고 비웃는 소리가 날카로운 말뚝이 되어 나의 등과 가슴을 꿰뚫어버리는 기분이다. " ................내가 말했지.... 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인다구....." " 으윽!" 결국 나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맞춰 볼까? ........너는..... 내가...... 너를 ..... 속였다구... 생각했어.... 그렇지.. 강은우?" " 시끄러. 허어억.. 으윽." " ...........머리 속이... 꽤나 ......어지러웠을거야............ 이미 두 번이나 죽였던 것처럼? ...... 그것... 어제.. 내가 한 말을... 조금.. 바꾼 것 아닌가? 이미... 두 번이나...죽어봤어...이게 내가... 했던 말이었지..... ...........그래... 너는 내가 한 말 조차... 잘못 들었다고.......생각하면서..... 나를.... 네 가슴 속에서......지우려고 했겠지.............혹시..... 내가 살인범... 또는... 그 살인범의... 공범이라고.... 생각한 것은.........아닌가?.... 응.. 강은우... 그렇지?" " ..........." " ..............그렇지?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네가 나에게... 이러지.. 않을테니까....." " ..........." 지훈의 입술이.. 귓가를 간질간질 거리게 하더니 목덜미를 훑었다. 허리 아래서부터 목덜미까지 소름이 일시에 돋아 올랐다. " ........강은우... 아무리.. 내가.. 보는 눈이... 정확하다고 해도 말이지......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토록 많이 꿰뚫어 볼 수는 없어........ 초능력자가.... 아니고서야............ 그런데... 궁금하지 않아? ... 내가... 너에 대해서... 왜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지 말이지..." " 으윽! 아으윽." 아픔이 아닌 다른 종류의 신음이 내 목을 타고 올라왔다. 피로 끈적끈적한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스쳤다. 제기랄... 이건 완전히.. 고문이야... " ............나는.... 너를.... 너 다음으로... 많이 알고 있어.... 아니.. 어쩌면... 더 잘 알고.. .있을지도...." " 개소리 하지마... 아흑.." 지훈은 나의 두 손목을 잡아 뒤로 확 꺾으며 속삭였다. 그것은.. 마치.. 지독한 가위에 눌렸을 때.. 귓가에 울리는 듯한 수근거림같은... " .......너는... 너보다 8살 많은.. 여자와 결혼한.. 네 아버지를... 절벽에서... 밀어버린.... 꿈을 꾼 적이.. 있지?" 누군가... 내 머리를 잘라 가버렸나 보다... 아...... 무...... 생...... 각...... 도...... 할...... 수...... 가....... 없....... 어....... " .......너는... 네 동생... 은영이를... 이상한 할머니에게... 뺏겨서.... 울다가... 눈이 멀어버린... 꿈을 꾼 적이... 있지?" " .........." " .......너는.... 돌아가신 너의 어머니가.... 검은 옷을 입고... 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다... 물에 빠져 죽는... 꿈을 꾼 적이... 있지?" " ......." " .......너는.... 단발 머리에... 파란 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여자애와... 놀이 동산에.. 갔다가... 키스를 하는 꿈을... 꾼 적이 있지?" ".........." " .......너는.... 긴 생머리에... 분홍빛 원피스를 입은... 연상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꿈을 꾼 적이... 있지?" " ........" 아...... 무...... 생...... 각...... 도...... 할...... 수...... 가....... 없....... 어....... " ..... 너는 주변 사람들이 너에게 상처만... 입힌다고.. 생각하지... 너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너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며... 증오하고... 원망하고 있지.... 가장 대표적인 것이... 네 아버지 아니던가? 너의 어머니를... 결국.. 죽게 만든 책임도.... 오늘의 너를... 있게 만든것도.... 네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지..... 네 자신을 틀에 가두고.. 벽을 쌓고... 상처 입지 않겠다구? .......강은우.. 착각하지마....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냐.... 사람들이... 뭐가... 좋다구... 너에게만.. 상처입히고... 신뢰를 저버리겠어? 그들은... 애초에... 너를 목표로.. 한 것이 아냐... 단지.. 자기가 원하는 것으로.. 가는 길에... 네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을 뿐이지.... 네가... 그 길만... 피해준다면.... 너도.. 그 사람들도.. 상처입지 않아...." " ..........." " 강은우... 착각하지마.... 세상은 너를 위해 돌아가는 게 아냐.... 너는 지금... 너 혼자.. 이 세상의 모든 상처를 다 입은..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것... 알고나 있어? 네가... 상처 입힌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지.... 너로 인해... 네 아버지와... 아버지와 결혼한 그 여자와... 돌아가신 어머니와... 은영이가... 얼마나 상처 입었을지는.... 생각 못하지... 아마.. 영원히 깨닫지 못했겠지...." " ...................." " ............그 지갑은.... 내가 얼마전에... 다른 반에 갔다가 잃어버린 지갑이야......" " ........" " ......내가... 왜 그런 표정을 지었을 지 궁금해? .........그런 비슷한 표정을 성혁이에게 보여준 적이 있어......" " ........" " ......그 녀석이... 너보고 혹시 도끼 살인마가 아니냐고 했었거든... 농담이었지만..... 정말.. 때려 죽이고 싶었어..." " ........" 가슴이....................... " ............그 살인마 녀석은... 우리 학교 학생일지도.. 몰라... 어젯 밤에... 너를 알아봤을거야....." 가슴이....................... " ...............너는... 남들이 너의 신뢰를 저버린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니? 네가... 남들을 스스로 밀어내고 있다는....." 가슴이 .....................아파.................. " ........너는... 나를 네 가슴 속에서.. 지우려 했어......." 가슴이.......................아파.................. " .......내가.... 너에게...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었구나.........." 너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우울하다...... 지독히도.... 우울하다..... 갑자기... 나는 내가.... 화장실 벽에 기대어.... 멍하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훈이는 어디 갔을까..... 어디 갔을까..... 지훈아... 지훈아.... " 지훈아.........." 몸이 떨려온다... 입에서 그의 이름과 함께 끅끅거림이 새어나왔다... " 지훈아. 지훈아." 동화에는... 꿈에 부푼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갑자기.... 내가 아주 싫어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외로워서 죽은... 한 동물의 이야기... 아무도 다가오지 않길래.... 가까이 가도 피하길래... 외로워서... 외로워서... 죽었는데..... 알고보니... 그 동물은.. 지독히도 겁쟁이라... 시도때도 없이 가시를 세워대는..... 고슴도치였다지............... 세상엔.................. 꼭...................... 결말이 아름다운................. 동화만 있는 것은......................... 아니야...............................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답은 무엇이냐!!" " x의 값이요." .................................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지훈이도 없는 이 교실에 앉아... 내 머리 속에는 단 10초도 머물러 있지 않을 저 소리들을 들으며...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걸까.... 나는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마냥... 멍한 눈으로 교실에 돌아와야만 했다. 그래... 지훈의 흔적을 찾아 말이지... 그를 다시 봐서 어떻해 할건데... 무릎을 꿇고 싹싹 빌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을련지는.. 모르겠다... 그냥.. 다만... 그를 보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는 없었다... 텅 비어 있는 그의 자리.... - 너는 나를 네 가슴 속에서 지우려 했어. - 가슴이 아파.................. - 내가 너에게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인간이었구나. - 가슴이 아파.................. 지독히도 우울했던 너의 목소리. 너의 눈동자. 아직까지... 나는 너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 아무리.. 아무리... 나에게 악의가 없었다 하더라도..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은 분명... 그들이고... 나의 신뢰를 저버렸고... 내 스스로 만든 틀에 나를 가두게 만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똑같은 짓을 한거야... 내 마음대로 너에 대해 규정지어버리고.. 그것을 강요했어.. 그리고 그와 다른 모습에... 나의 믿음을 저버렸다며 너를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미안해... 미안해... 지훈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지훈아. 정말로 미안해...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줘... 내가 그리도 너에게 극단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너를 ..........하기 때문일까..... 나의 가슴은... 그 말을 고이 감싸안아 깊게 깊게 안에 넣어 두었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내 가슴 속에 그저 넣어두어야 할 말... 나 자신조차 의문스러운 마음. 미안해... 미안해... 너를 보고 싶어... 때론 의도하지 않아도 나의 몸은 착실히 생각을 반영한다. 주섬주섬 부지런히도 움직이는 손. " 야.. 강은우..." 나의 짝이 수학 선생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소곤거림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내가 하고 있던 행동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다. 이런... 책가방을 싸고 있었네.... 마저.. 싸자... 싸서 나가자... 여기 있을 필요가 전혀 없어. 나는 다시 책가방을 주엄주엄 싸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긱>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와 함께 수학 선생이 나를 멀뚱히 쳐다본다. " 강은우. 지금 뭐하는 짓이냐?" " 가려구요.." " 어딜?" " 집에요..." " 하. 뭐?" 수학 선생이 책을 집어들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 강은우.. 다시 말해봐라. 지금 어딜 간다구?" 그가 내 머리를 책 모서리로 토옥토옥 두들긴다. " 집에요." " 너 지금 장난치냐!! 어서 책가방 내려놓고 앉지 못해?" " 집에 갈겁니다." 나는 히죽이 웃으며 수다스럽게 말을 꺼내놓았다. " 수업에 집중이 안됩니다. 선생님. 왜냐구요? 오늘 아침에 본 시체가 자꾸 떠올라서 속이 울렁거리거든요. 조금만 있으면 아마 제가 아침에 무엇을 먹었는지 선생님께서도 확인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왜 그렇게 속이 울렁거리느냐구요? 그 남자.. 아니 그 남자의 분해된 몸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그 모양이 마치 닭집의 아주머니가 커다란 칼을 들고 사정 없이 내려찍듯이 조각조각..." " 강은우." 선생의 안색이 창백하다. 아마도... 이 녀석의 정신이 돌았나.. 싶을 것이다... 아.. 이대로 보내주지 않으면 어쩌지? 지금 당장 병원에 신고하면 어쩌지? 건장한 하얀 옷의 남자 간호사들이 나를 꽁꽁 묶어 산 속 깊은 병원에 가둬 버리면 어쩌지? 그러면 지훈이를 영원히 못 보게 될텐데... " 집에 보내주십시오. 자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요. 좀 쉬다보면... 괜찮아질 듯 싶습니다." 나는 웃음을 거두고 최대한 정중히 말했다. 가야 해... 가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 해... 지훈이에게 가야 해... " ...................담임 선생님께는 내가 말해 둘테니... 집에 가거라. 가서 푹 자둬라." " 예. 감사합니다." 나는 곧장 뒷문을 향하지 않았다. 재준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 줘." " 뭐..뭘?" 재준이 갑자기 말을 더듬는다. ... 주변의 시선들이.. 모두 낯선 이방인을 보는 듯한 눈들이다. 그래... 지금 여기 서 있는 사람은... 너희들이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전혀 다른 사람이지... " 네 수첩.. 지훈이 집 주소 좀 알게." 그래... 지훈이가 내 안의 세계에 스스로 들어왔듯이... 이번엔 내가 들어가야 한다.... 설사 그가 나를 미워하고 또는 외면하고.. 거부한다 해도... 상관없다... <상처받을 텐데?> 그래.. 지독히도 아프겠지.. 아프겠지.. 하지만.. 적어도 아직 나는 내 마음을 다 보여주지 못했어. 가장.. 어둡고 추악한 부분만 보여주었어. 그래서... 다 보여주어야 해. 내 마음을 다 보여주고 나서도... 외면한다면... 그 때 쓰러져 펑펑 울어도... 몸을 떨며 아파해도 늦지 않아... 나는 너를 ........ 하고 있나 봐. 아직은.. 아니야. 가서 말하자. 가서 내 마음을 보여주자. 보여주고 나서... 아파해도 늦지 않아. " 돌려받자마자.. 또 빌려주네... 자. 여기있어. 녀석이 툴툴 거리며 수첩을 건네주었다. 나는 순간... 재준의 그 투덜거림이.. 코가 찡하도록 반가웠다. 그가... 이 낯선 이방인에게 건네준 살가움의 한 조각. " 재준아. 고마워.. 이걸로 나도 신세졌다." 나는 받아 든 수첩으로 재준의 어깨를 투욱 쳤다. " 어서 가. 너 때문에 수업 못 하고 있잖아. 나중에 보충이니 뭐니해서 욕 먹는 것은 결국 나라구." 재준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 아까 욕 해서 미안해." " 괜찮아. 10새꺄." 재준은 자기가 말 해 놓고도 쑥쓰럽고 무안한지 낄낄거렸다. " 이 놈이 선생님이 있는 앞에서 감히 뭐가 어째?" 수학 선생이 교탁으로 걸어가며 재준의 머리를 꿍 쥐어박았다. 그래... 그래... 누구든... 악의는 없어...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 어떻개 해석하느냐에 따른 거야.. 지훈아... 미안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사람의 꿈이라는 것은 항시.. 깨어나자마자 잊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꿈들이 있다. 작은 순간순간 하나까지 머리 속에 뚜렷이 각인되는 그 꿈들. 그것들의 특징은... 그 순간의 감정과 감각이 너무 격렬하여 마치 생생한 현실처럼 다가온다는 것이다. - .......너는... 너보다 8살 많은.. 여자와 결혼한.. 네 아버지를... 절벽에서... 밀어버린.... 꿈을 꾼 적이.. 있지 - 그 순간 느꼈던 분노와... 증오. 원망. 그리고 내 손바닥안에 느껴지던 차가운 아버지의 등. - .......너는... 네 동생... 은영이를... 이상한 할머니에게... 뺏겨서.... 울다가... 눈이 멀어버린... 꿈을 꾼 적이... 있지 - 그 순간 느꼈던 비통함. 슬픔. 자책감. 그리고 내 눈을 파고드는 끔찍한 아픔. - .......너는.... 돌아가신 너의 어머니가.... 검은 옷을 입고... 강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다... 물에 빠져 죽는... 꿈을 꾼 적이... 있지 - 그 순간 느꼈던 두려움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내 코와 입을 통해 들어오던 물과 에메랄드색의 물빛 - .......너는.... 단발 머리에... 파란 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여자애와... 놀이 동산에.. 갔다가... 키스를 하는 꿈을... 꾼 적이 있지 - 그 순간 느꼈던 상큼함과 가슴 떨림. 내 입술에 느껴지던 그 애의 부드러운 입술. 따스한 숨결. - .......너는.... 긴 생머리에... 분홍빛 원피스를 입은... 연상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꿈을 꾼 적이... 있지 - 그 순간 느꼈던 강렬한 환희. 흥분. 온 몸으로 느꼈던 그녀의 육체... 그것들을 지훈이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가 나의 꿈과 교류하는 것은... 살인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였었나... 그 꿈들은.. 모두...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꾼 꿈이었다. 나는 꿈에 한 맺힌 사람처럼... 밤마다 내 정신을 깡그리 불태울 만큼 강렬한 느낌들의 꿈을 자주 꾸었고... 아마도 그것은... 분출하지 못하고 삭혀둔 나의 무의식이 폭발하듯 뛰쳐나오기 때문이었겠지.. 그런데... 그는 알고 있는데... 나는 왜 모르고 있는걸까... 그와 무의식의 세계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은... 나에게는 그 첫 번째 살인이 일어났을 때부터 였다. 아니면...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어쩌면 알아보지 못한 것 아니야?> " ..........여긴가?" 나는 조금 오래 되어 보이는 듯한 2층 양옥집 앞에 섰다. 지붕이... 팔(八)자 모양으로 맞물린 지붕이... 초록색이다... 그리고 작은 다락방의 창이 참으로 앙증맞다.... 오래되어 허술해 보이기는 하지만... 포근한 느낌을 주는 집이다... 아... 여기가 지훈이가 사는 집이구나... 담 너머로 무성한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쭉쭉 뻗어있다... 그 잎들에 빗줄기가 부딪히며 두두두두두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정겹다. 시멘트 냄새보다는... 흙냄새가 훨씬 많이 나는 집이다... 나는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한참이나 고심했다.. 기분이 마치... 인사드리러 온 새색시 기분이다.. 새색시? 누가 새색시야... 적어도... 새신랑은 되야지... 그래... 그래... 이 기분을 유지하자... 마음의 여유를 두어... 그나마 간신히 이어놓은 한가닥의 가느다란 이성을 놓쳐버리지 말자. 지훈아... 너도 그랬니? 나의 그 견고한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 너도 이토록 가슴 떨리고 두려웠니? 그렇지만 네가 했다... 네가 한 것은 나도 할 수 있다. 너의 세계에 침입할거야. 외면해도 좋아. 밀어내도 좋아. 내 마음을 모두 보여주고 나서 슬퍼해도... 늦지 않아... <딩동> 결국엔.... 눌러버렸다. 이왕 눌러버린 것.. 뭐. 어떠랴. <딩동 딩동> 나는 두 번 더 연속해서 눌렀다. 조급증이 걸린 걸까?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딩동 딩동 딩동> " 야! 임마!!! 식빵 사러 간 지가 언제인데 이제 오고 난리야! 들어오면 넌 죽었어!!!" 스피커에서 무시무시할 정도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억... 깜짝 놀랐다. 나는 스피커 폰을 뜯어내면.. 그 안에 눈을 부릅 뜬 귀신같은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싶었다. 저는 임마가 아닌데요... 라고 말할 틈도 없이 뚝 끊기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자동으로 덜컹 열렸다. 막상 각오는 했지만 일이 황당하게 꼬여들어가니.. 과연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고 보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마음으로 초록색 지붕집으로 들어가자. 혹시나 알까.. 나를 맞이하는 것은 신경질 적이고 짜증스러운 트럼프의 여왕이 아니라 무뚝뚝하지만 마음씨 좋은 마릴라 아줌마 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렁이 한 마리가 자신의 집 안에 엎드린 채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눈에 졸음이 가득하다. 아무래도.... 도둑 잡기는 다 틀려 보인다... 나른해 하는 누렁이를 도발시켜 볼 작정으로 워리워리... 불러보았으나 그냥 약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짖거나 덤벼들진 않는다... 이윽고 하품을 늘어지게 하더니 다시 잠을 청한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더니.... 참으로 편안하게 잠이 든다.. 왠지 부럽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문에 서서... 우산을 접은 후.. 잠시 머뭇거리는 데.. 문이 안쪽으로 화악 열렸다. " 이 자식아! 식빵을 공장에서 뽑아왔냐? 어?" 여자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사실.. 아마 나의 눈도 휘둥그레 졌을 것이다...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 티셔츠.. 그리고... 그 어깨끈 사이로 삐죽이 흘러내려진... 하얀 끈... 머리는 가히... 예술이다... 그 어떤 엽기적 취향의 미용사도 저렇게 머리를 틀어 올리지는 못할 것 같다. 그리고... 세수는 과연 한 것일까? " 난 지석이가 돌아온 줄 알고... 음.. "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이 나를 관찰한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 지훈과 닮았다.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따뜻해 보이는... 그러나.. 그녀의 쪽은 감정표현이 매우 확실하게 드러난다. " 지훈이 친구니?" " 예. 강은우입니다." 그녀가 씨익 웃으며 건네는 말에 나는 가슴이 싸하게 시려왔다. 역시... 피가 섞인 한 가족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얼굴과 지훈의 얼굴이 겹쳐 보여. 지훈이가... 나를 보고 웃는다... 그런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내가 무슨 실수를 한건가? " 네가... 은우야? 정말... 네가 은우니?" " 예." 그녀가 갑자기 털썩 주저 앉았다. 뭐야... 식빵을 찾아대더니 굶주림에 결국엔 쓰러진건가? " 쿠쿠쿠쿡. 꾹꾹." 지훈이 누나의 어깨가 들썩인다... " 저.... " " 와하하하하하!!! 그 자식은 하여간 묘한데가 있단 말야." ............. 그 자식은 왠지 지훈을 가리키는 말 같다... " 뭐야? 문도 안 잠궈 두고. 아무리 시집 못간 30살의 노처녀라지만.. 그래도 몸은 사려야지. 치마만 둘러도 환장하는 놈들이 사방에 깔렸다구." 문이 열리며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나는 약간 몸을 틀어 자리를 내어주며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지훈과 닮았다.. 그렇지만 무뚝뚝한 지훈에 비해 눈에 장난기가 서글서글하다. " 왜 이렇게 늦게 와!! 얼른 먹고 선보러 나가야 하는 것 알아! 몰라!!" 갑자기 지훈의 누나가 웃음을 멈추고 벌떡 일어나 남자의 귀를 마구 잡아당겼다. " 아악! 누..누나. 누나 맛있게 먹으라고 막 구워낸 식빵 사왔단 말이야." " 호오~ 그래? 용서해 주지." ...................나는 과연 여기 왜 서 있는 것일까... 내가 멀뚱히 서 있으니 지훈의 누나가 빙긋 웃으며 나의 등을 툭 쳤다. " 지석아. 이 애가 지훈이의 은우란다." " 무슨 헛소리야....." " 정말이라니까? 얘가 강은우야. 그치? 네 이름 은우랬지?" 뭔가.. 혼란스럽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야... " 근 반 년간 밤마다 은우야. 은우야. 불러제끼는 통해 다들 잠을 못 자서 눈들이 시뻘건데... 얘가 그 은우라구? 조금은 황당하네." 지석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얌마! 집 안에서 피우지 말랬지." " 지훈이도 피운단 말이야. 그 넘은 고등학생 주제에.." " 다락방에서 피우잖아. 너도 억울하면 거기가서 피워." " 그러니까 시집을 못 가는거야." " 지훈이 집에 있나요?" 옥신각신 다투던 두 사람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 어제 외박했는데 학교까지 빼 먹었든?" " 잠은 저희집에서 잤습니다." " 그런데?" " 조퇴했거든요." 지훈의 누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갑자기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뭔가.. 대답을 제대로 듣고자 할 때 사람의 눈을 무안할 정도로 쳐다보는 것은... 이 집 사람들의 특징인가 보다. " 너희 싸웠니?" " .....지훈이 집에 없으면 이만 가볼께요." " 잠깐만." 갑자기 지훈의 누나의 눈이 은화처럼 반짝이는 듯 보이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뭔가... 꿍꿍이 속이 있는 듯 하다... " 지석이 너 약속있다고 하지 않았나?" " 누나 나간다고 나보고 집 지키라며... 지훈이 녀석 열쇠도 안 가지갔던데.. 방학이긴 하지만 나도 바쁘신 몸이야." " 인심썼다. 너 외출해라." " 집은 어쩌구. 오늘 큰 형. 야근이야." " 은우야. 너 오늘 지훈이 보고 갈거지? 그럼 집 좀 봐주라. 아무래도 오늘 우리집이 빌 것 같거든. 나도 선보고 난 후에는 친구들이랑 거하게 한 잔 할거고... 이 녀석도 방학이니 뭐니 해서 친구들이랑 죽어라 퍼 마실테고 다른 한 녀석은 오늘 야근이거든. 지훈이 열쇠 안 가지고 가서 집에 와도... 내일 우리 중 누구 하나 돌아올 때까지 집에 못 들어와." 생전 처음보는 사람에게... 아무리 동생의 같은 반 친구라지만... 이 사람들... 이래도 되는건가? " 형이 한 명 더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부모님은..." " 아. 작은 놈은 군에 있고 부모님은 여행중이셔." 초록색 지붕집에 들어온 앨리스를 기다리는 것은 트럼프의 여왕도. 마릴라도 아닌 신데렐라에게 마법을 걸어주었던 부시시한 몰골의 노처녀 마법사였다... 나는 이제 마법이 풀리는 자정이 오기 전까지.. 지훈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자정이 지나면... 마법은 풀려... 잠이 들겠지... 그리고 꿈을 꾸겠지... 그리고 또 그를 죽이겠지... 어쩌면.. 이번에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다락방... 왠지... 나의 옥탑방과 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천장이 아주 낮은데다가 또 양쪽으로 경사가 져 있어... 나도 다니기 불편한데... 나보다 키가 더 큰 지훈은.. 어째서 이 방을 자처하게 된걸까... 지혜 누나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는 작은 창을 열었다. 비내음이 물씬 들어온다. 뒤이어 축축한 바람과 굵은 물방울들이 무수히 튀어 들어왔다. 그냥 창고로 쓰여졌던 다락방. 아래층에서 지석이 형과 같은 방을 쓰던 지훈이.. 반년 전부터.. 이 방을 쓰겠다고 우겨댔다고 했다. 밤마다 내 이름을 부르며 하도 끙끙거려 잠을 설친 형들이 내쫓았다고는 하지만... 우연일까... 반년전이면... 내가 전학 온 시기... 그 작고 어두운 옥탑방에 살기 시작한 때다... 나와 꿈을 공유하고... 나와 같이 이 작고 어두운 공간에서 홀로 앉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훈아.. 지훈아.. 미안해... 그리고 보고 싶어... 나는 너를 .....하고 있나 봐.... 날이 점점 어두워진다. 밤이 찾아오고 있다... 지훈아.. 너는 오지 않을거니? 너의 세계로 마음을 졸이며 들어온 나를 외면하지 말아줘. 난... 지독한 겁쟁이라구... 나는 지훈의 침대에 덜렁 드러 누웠다.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지훈이가 돌아오면 열어야 하는 문... 그냥 두면 어떠리... 하는 마음에 그냥 뻗어버렸다. 올거야... 곧 돌아올거야. 이불이 풀석거리며 그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리고 희미한 담배냄새.. .....................좋다... 궁상스럽게 장마철 퀴퀴한 사람 냄새를 킁킁거리며 좋아한다고 흉을 보아도........ 상관없다. 그러고보니.... 나는 지훈의 냄새가 처음부터 좋았다.... 그 날... 그가 맨 처음 나에게 말을 건넨 날. - 닦아. 닦아. 감기 걸리기 전에 - 그리고 화장실에서... 그의 수건에 코를 대며... 지훈이의 냄새를 떠올렸지.. 나는 언제부터 그의 체취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말로만 듣던 변태인가? 쿡...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은 얼어붙었다. 피로 끈적거리던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스치며... 아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바짝 지훈에게 달라붙었을 때 느꼈던 그 가슴 떨림... 귓가를 스치던 지훈이의 뜨거운 숨결.. " 으윽!"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두 팔로 가려버렸다. 결국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분명하다... 간만에 빨래를 하게 만든 그 꿈도.. 그렇고.. - 지훈이의 은우 - 그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다. 내가 무슨 소유물이라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왜냐면... 왜냐면... 만약 은영이가 나에게 지훈이를 가리키며 저 사람 누구야... 라고 묻는다면.. 나의... ...... 지훈아... 나는 너를 정말로 ..... 하나 보다. 나는 너를 정말로 좋아 하나 보다.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해. 좋아해. 지훈아. 너의 말은 언제나 주술이 되어 나를 이끈다 그리고 나의 말 역시 주술이 되어 나를 이끈다. 어디로? 너에게로... 너에게로 지훈아... 나는 너를 좋아해... 문득 잠이 쏟아 진다..... 초대받지 못한 마녀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그래... 잠이 드는 구나... 내가 와서 깨워주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거야... 언제까지고.. 그 악몽 속에 갇혀 버리겠지... 나는 어쩌면.. 어쩌면.. 이번에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린다... 그래... 이 노래를 안다... 히사이시 죠의 "매드니스"란 곡이다... 사람의 마음을 기분 나쁘게 자극하면서도 퇴폐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음악... 누군가가 귀에 하얀 꽃을 꽂고 깔깔거리며 쫓아오는 듯한... 아니면 반대로 겁에 질린 숨을 토해내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달아나는 듯한... 미친 고양이의 오렌지 빛 눈동자가 너울너울 춤쳐대는 어두운 도시의 한 골목길... 나는 그 음악에 심취하여 8번 트랙을 무한 반복 시켜 놓았다. 그리고 볼륨을 높였다. 어차피 창문을 닫아놓았기에 이웃들이 소음에 짜증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조금 더 크게 해볼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고 했던 마음이 어느 새 볼륨을 점점 올리고 있다. 방 안이 웅웅 울린다. 나는 옆집의 누군가가 " 시끄러워! 소리 좀 낮춰!!!" 라고 고함을 지르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여 커튼을 젖히고 창문 밖을 빼꼼히 내다보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다행히 고함 지르는 사람은 없다. 안심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하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굳는 것 같다. 무엇일까... 무엇인가가 나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 그것은 시각도. 청각도. 후각도. 촉각도. 미각도 아니다... 오관으로는 느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감각... 사물의 깊은 본질을 직감적으로 포착하는 나의 육감이 예민하게 긴장한다. " 아무도 없네. 괜히 놀랬잖아. 후후후." < 뭐야... 나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저기 저 사람이 보이지 않아? 그림자처럼 어둠을 베어 입은 채 이 쪽을 올려다 보는 저 사람이 보이지 않아?> " 참. 그러고보니 다들 나가고 난 뒤에 문을 안 잠궜네." < 곧 지훈이가 올텐데... 하면서 안 잠궜지....> 갑자기 CD가 틱틱 튄다. 어느 한 부분에서 음악이 걸리며 반복하고 있다. " 왜 이러는거야." 나는 CD를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별 이상은 없는데.. < 딸깍 > 음... 아래층에서 무슨 소리가 나지 않았나? " 아무 이상은 없는데.." 다른 CD들을 꺼내어 하나씩 넣어 보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 아마도 CD가 더러워서 그런가? 나는 입김을 호오호오 분 뒤 대충 옷으로 스스슥 닦아 넣었다. 아! 이제는 제대로 돌아간다. 다시 8번 트랙을 무한 반복 시킨 뒤 머리가 울려서 아플 정도로 볼륨을 올린 뒤 침대 위에 던져 놓았던 만화책을 집어 들었다. 역시 여름에는 음산한 이야기가 제격이야.... 언제보아도 요한은 멋있어. 그 예쁜 얼굴에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는데다가 강한 카리스마까지... 정말로... "괴물" 이야...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 이 만화책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몬스터'이다. - 나를 봐! 나를 봐! 내안의 몬스터가 이렇게 크게 자랐어. - 찰랑거리는 금발에 아름다운 여동생으로 변장하여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한 미소년의 외모를 가진 요한. 영혼에 악마가 깃든 '괴물' 누명을 쓴 채 쫓기면서도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애 쓰며 요한의 뒤를 쫓는 의사 덴마. 인간의 영혼에 깃든 악마는 비단... 요한에만 있는 것일까? 의사 덴마가 요한을 찾아내어 죽인다면.... 이름을 갖기 위해 사람들을 연신 잡아먹는 '이름 없는 괴물'이 자신의 내면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까... 덴마 안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요한. 덴마는 요한이고.. 요한은.. 덴마이다.. 인간의 내면은 언제나 동전과도 같은 것.. 그럼.... 그럼.... 나의 육감이 뭔가를 말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있다. " 어머. 여기서 요한이 또 나오네. 정말 예쁘다." 나의 입은 주절주절 떠들어 대고 있지만 정작 나의 머리 속은 다른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 덴마는 요한이고 요한은 덴마이다... 그럼... 그럼...' 인간의 양면성. 선인 동시에 악이고 악인 동시에 선이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희생자인 동시에 살인자이고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이다.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것이 무엇일까. <아직 아니야.> 그 때가서 알게 되면 너무 늦어. <아직 아니야> 그 때가서 알게 되면 너무 늦어. 뭔가.. 소리가 들린 듯 하다. 하지만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여전히 어머! 어머!를 연발하며 만화책을 읽고 있다. <아직 아니야> 너무 늦어. 너무 늦어. 아니.... 이미 너무 늦어 버렸어. 시선이 느껴진다. 갑자기 목과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스르륵 흘러내린다. " 꺄아아악!!!" 갑자기 머리가죽이 후끈하다! 누군가 나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마구 흔들어댄다. 꺄아악? 그것이 정말 나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인가? 책상의 모서리가 나를 향해 달려든다. <꽈앙> 이마 한 가운데에서 무엇인가가 부러지는 둔탁하고 불쾌한 소리가 나며 머리 전체에 불이 붙은 듯 뜨거운 고통이 밀려온다. 나는 바닥에 널부러지며 갑자기 닥쳐 나의 목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두려움과 공포의 이빨에 꺽꺽 흐느끼며 신음을 토해냈다. " 끼끼끼끼끼끼끼끼끼" 웃는다... 눈물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흐릿해진 내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온다. 익숙한 웃음 소리... 아... 그 웃음 소리를 안다. 아... 그 목소리를 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전에도 한 번... 아니... 세 번 있었다... 그래.............. 이것은... 나의 악몽 속이다....... 나는 악몽으로의 초대에 또 다시 불려온 것이다.... 달아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됐어.> 그래. 이미 너무 늦었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고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희생자인 동시에 살인자이고 살인자인 동시에 희생자이다. 덴마는 요한이고 요한은 덴마이다. " 끼끼끼끼. 하얀 티셔츠에... 하얀 침대커버에... 하얀 속옷이라... 안성맞춤이야. 넌 정말 완벽한 장난감이야." 그가 내 머리카락을 움켜 쥐고 질질 끌고 가 침대 위로 내동댕이쳤다. 익숙한 상황. 익숙한 웃음 소리. 익숙한 목소리. 단지..... 단지..... 변한 것은... 죽음의 공포에 비명조차 삼켜버린 것은... 나이고.... 한 손에는 손도끼를 든 채 밤처럼 까만 눈을 빛내는 저 사람은... < 너를 좋아해 > 잔인한 웃음을 흘리며 나에게 한 발 한발 다가오는 저 사람은... < 너를 좋아해 > 지훈아.............. 이것이..... 바로.......... 진짜 악몽인 것이다...........................................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우..우흑.. 사..살려주세요... 사..살려.. 주세요..." 나의 입술이 달싹거리며 애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음악 소리에 묻혀 나의 귀에 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 뭐라구? 잘 안들리는데?"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 나의 몸 위로 지훈이 슬쩍 올라온다. 입가에는 마치 뱀과도 같은 싸늘하고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머리칼에서 뚝뚝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나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검고 얇은 긴 소매 와이셔츠는 비에 젖어 그의 몸에 딱 달라 붙어 있었다. 풀어젖힌 단추 사이로 구리빛의 맨가슴이 보인다.... 그 위로 주루룩 흘러내리는 물방울... 지훈아.... 지훈아.... 너의 흑단같은 검디 검은 머리칼... 어둠의 한 자락을 집어 삼킨 듯한 너의 검은 눈동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너는 마치... 이제 막 어둠속에서 태어난.... 악마 같다.... " 살려줘요!!! 누가 좀 도와줘요!!!" 나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서 달아나려 했다. <퍼억> " 아흑!!" 그의 주먹이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얼굴이 홱 돌아가며 입안이 후끈하다. 곧 이어 퍼지는 비릿한 피냄새. 목 너머로 뜨거운 것이 흘러넘어갔다. " 어디서 소리를 질러." 지훈이 웃는다.... 웃지마.. 웃지마.. 제발 그렇게 웃지마.. 지훈아... 무서워.... 새까만 검은 가죽 장갑. 지훈의 왼손에 들려 있는 손도끼. 그 날카로운 날에 하얀 빛이 뚝뚝 흘러내린다.. 지훈이 도끼를 내 옷 밑으로 집어 넣었다. 치가운 금속이 내 배에 닿자 나는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 닥쳐... 배를 따 버리기 전에..." 지훈이 히죽 웃으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 놀림에 맞추어 도끼날이 나의 하얀 티셔츠를 가른다. 즐거운 듯... 잔인하면서.. 하염없이 천진스런 웃음을 짓고 있는 너는 악마다.... 작은 곤충의 머리와 다리를 하나씩 떼어내며 깔깔 대는 어여쁜 아이와도 같은 네 웃음... 입을 다물어 당장. 숨소리조차 내지 마. 그러나 나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그러지마. 그를 자극하지 마. <짜아악> 눈에 불이 확 튄다. 코가 얼얼하더니 뜨거운 뭔가가 흘러나왔다. 콧등이 주저 앉아버린 것처럼 묵직하면서 쪼개질 듯 아프다... " 조용히 안 하면... 계속... 맞을 뿐이야..." 지훈이 나를 내려다 보며 낄낄 거린다. " 그리고 아무리.. 소리를 질러보았자..... 밖에서는 안 들려.... 저 음악 소리 때문에.... 말이지.. 끼끼끼끼." 자극적이라 마냥 좋았던 저 음악이.. 나를 죽음에 몰고 간다... 제목처럼... 광기를 불러들여... 나를 죽이고 있어... <찌지지지직> 나의 웃옷은 신음을 흘리며 찢기어 나갔다. 그 뒤를 은빛의 도끼날이... 따르고 있다. 지훈은 지긋이 감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수치심보다 두려움이 더 앞선다... 내 귀에는 오로지 나의 헐떡임만이 들리는 듯 하다... 지훈은 내 등에 눌린 옷을 힘껏 빼내었다. 등이 갑작스럽게 천에 쓸리자 불에 타는 듯이 아프다. 그는 그것을 반으로 찢어버렸다. 지훈은 이윽고 내 양손을 머리 위로 모아 그 찢어버린 옷조각의 하나로 둘둘 감더니 힘껏 묶어버렸다. 손목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다... 일부러 비틀어 묶었어... 조금만 움직여도 뼈가 탈골이 될 것 처럼 아프도록 그리 묶었어...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내 입에 쑤셔 넣었다. " 우웁!" 그가... 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낄낄거린다. " 가끔은.. 다른 놀이를 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거야..." 그의 음산하고 묘한 말투가 나의 머리를 얼어붙게 만든다... " 어른들이 하는 .. 놀이 말이야... 끼끼끼." 머리 속이 하얗다.... 하얗다.... 쩌저정 소리를 내며 얼어간다... " 으으읍!!! 크윽!!" 나는 그에게 눌린 채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뒤늦은 발악일 뿐이야... 그나마 자유로운 다리를 휘저어대보았자 허공을 가를 뿐이고 오히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린다. 오히려... 나의 발악이.. 그에게 즐거움만 선사한 셈이다... " 이쁜아... 나랑.. 놀자..." 지훈의 두 손이 내 등뒤로 쑤욱 들어온다. 그리고는 꼼지락거리며 후크를 풀러내어 버렸다. 무슨 후크? 나도 몰라... 내 눈은 오로지 그의 그 기이한 시선만을 쫓을 뿐이다. 웃지마.. 웃지마.. 제발 그렇게 웃지마... 지훈은 아주 나직히 나직히... 낄낄거리더니 천천히 얼굴을 나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그 붉고 끈적끈적한 혀로 나의 뺨을 핥기 시작했다. 순간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축축한 타액이 마치 달팽이가 꿈틀꿈틀 지나간 뒤 남는 흔적처럼 나의 피부에 남는 다는 것이 혐오스러웠다. 더러워... 더러워.... 너를 죽여 버리고 싶어... 그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가 나의 온 몸을 휘감는다... 그러나... 그 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싫어!!! 싫어!!!! 내 가슴이 이미 장갑을 낀 그의 축축하고 거친 손의 노리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그냥.. 죽여 줘.... 이런 짓 하지 말고... 그냥 죽여 줘... 그가 내 다리를 부러뜨릴 듯이 잡아벌렸다. 아무리 벌리지 않으려도 애를 써도... 미친 듯이 발버둥쳐도... 그의 주먹질 몇 방에 나는 널부러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말자.. 이미 나는 죽었다... 나는 모른다.. 아무 것도 몰라... 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나는 느끼지 못해... 나의 눈꼬리 끝으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모님이 외출하실 때... 문을 잠글 것을... 문단속을 잘 할 것을...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랴... 죽도록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랴... 몸 위에 올라탄 그가... 자신의 바지를 내리고... 몸 속 깊은 곳까지 단숨에 파고 들었다. " 으으으읍!!!" 갈갈이 찢기는 고통이 하복부를 강타했다. 그는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며 육체적 고문과 징벌에서 쾌락을 느끼는 지.. 연신 거친 숨을 내쉬며 신음을 내뱉는다... 그는... 나를 견고하게 지켜주는 장애물을 가차없이 뜯어내어... 나를 갈기갈기 찢고... 마침내는 내 안에 깊이 파고 들며... 나를 죽인다.... 나를 죽인다.... 그녀를 죽인다.... ............................. 흐느낀다.... 누군가 흐느낀다.... 그래... 내가 흐느끼는 소리... 숨을 쉬고 있지만... 영혼은 죽어버린 그녀를 위해.. 내가 토해내는 오열... 나와 의식을 공유하던... 그녀를 느낄 수 없다... 그녀의 심장은 뛰고 있지만.. 따뜻한 피가 아직도 온 몸을 돌고 있지만... 그녀의 영혼은 하얗게 녹아 사라져 버렸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막을 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면.. 당신을 구해줄 수 있었을텐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의 악몽 속에 영혼을 빼앗긴... 당신에게.. 나는 그저 미안할 뿐이예요... 영혼을 잃어버린... 망가진 마네킹과도 다름 없는 그녀의 육체 위에서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그...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CD 케이스를 한 뭉치 들고온다... " 예전부터 해 보고 싶었던 거야." 그는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흥겹게 중얼거린다... 광기로 번뜩이지만 않는다면.... 정말... 천진스런... 순수한 아이의 눈동자... 그래.. 순수해... 순수한 악으로 뭉쳐져...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의 얼굴에 고정이 된 채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그의 행동을 나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그가... 옆에 놓아두었던 손도끼를 단단히 틀어 쥐었다... 쿡... 지겹지도 않나... 그래도... 그날 밤.. 그것은 잊지 않고 챙겨 달아났나 보군... 그는 오른 손으로 묶여진 나의 두 손을 짓누른 뒤.... 도끼를 들고 있던 왼손을... 나의 목덜미로 옮겼다. 차갑고... 단단하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도끼날이... 나의 피부를 파고들며... 근육들을 쓰윽 베어나가며... 치솟는 붉은 피... 그가... 피를 뒤집어 쓴다... 커다란 붉은 페인트 통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보이는 그... 나의... 아니 그녀의 고정된 시선 속에 용솟음치며 솟아 오르는 붉은 핏줄기...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그가... CD 케이스를 열어... 은빛 바탕에 무지개빛을 반짝이는 CD를 꺼내든다.. 그래.. 둥그렇고 얇디 얇은 CD 그 끝이 둥근 칼날과도 같다.. 네가... 무슨 짓을 할 지... 짐작이 간다.... 그것을... 나의 목에 박아 넣을 참이지... 그렇지... 그래... 역시 그렇군... 너의 그 악마와도 같은 유희는 정말 질리도록 끔찍하다... 차갑고.. 단단하고... 예리하고... 날카로운... CD가... 컥컥 거리며 나의 목을 파고 든다... 살을 가르고... 목젖을 뚫으며... .................... 담담하다... 그녀의 육체와... 나의 육체는 이 끔찍한 고통에 비명을 질러대는데... 죽어버린 그녀의 영혼과... 나의 의식은... 지극히.. 고요해.... 지훈아... 피를 뒤집어 쓴 채 낄낄거리며... CD를 박아 넣는데 여념이 없는 너... " .............아....." 너도 그랬니? 너의 머리를 으스러뜨리고... 너의 가슴을 헤집어놓으며... 너의 온몸을 조각내어놓을 때... 너도... 이런 맘으로... 나를 지켜보았니... 이제야.. 네 말 뜻을 알겠다... 어째서... 그것이 내가 아니었다고 말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 ..................훈.... 아..." 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것은 네가 아니야... 그 까만 눈동자 저 안 깊숙히... 누군가가 울고 있다... " ..............지.. 훈아...." 도와 달라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게 해 달라고... 흐느끼고 있어.... " ........지훈아......." 나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린다... 그가 부디.. 내 목소리를 알아듣기를... 나를 기억해 내기를... 그리고...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야.... 지훈아..... 지훈아..... " 으아아아악!!!" 눈을 뜨자 마자 나를 반긴 것은 새까만 어둠. " 커헉!" 갑자기 목구멍이 인두로 지지는 것 같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목 전체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고통이 엄습했다. 입안이 비릿하다... 뭔가가 꾸역꾸역 넘어온다.. 나는 그것들을 계속 삼키며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분명.. 그것은... 붉은 핏덩이리라.. 보이지 않는... 존재하지도 않는 상처에서.. 쉴 새 없이 솟아오르는 핏덩이겠지.. 허리 아래가... 너무나 아프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다리 사이를... 누군가가 사정없이 뒤틀고 뼈를 잡아 빼는 것 같은 아픔에... 숨만 헐떡이며... 제발.. 이 고통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리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 ......지훈아....." 쉭쉭 바람 소리와 함께 나온 나의 거칠고 갈라진 목소리... 뒤 이어 누군가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 그래... 지훈이다... 지훈이가 돌아와 있었다... " ...지훈아..." 아.. 왜 눈물이 나는거야... 마법 따위는 애당초 없었어... 하지만.... 그가.. 돌아와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나는... 악몽의 두려움 속에서 반은 벗어난 기분이다.. " 지훈아..."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움직일때마다 근육과 뼈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몸부림 쳤다. 나는 간간히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 으윽!" 그러나 곧 바닥에 주저 앉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빌어먹을.. 너무 아파.. 너무 아파... 아파서... 견딜수가 없어... " ......왜 온거야......" 그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있다... 그리고 그 낮고 거친 목소리에 축축한 물기가 서려 있는 것 같은.. 것은... " 미안해..." " ........뭐가." " 낮에.... 낮에 미안해..... 나는.." 말해야 해..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돼... 내 마음 속에 고이 넣어두웠던 이 말을 꺼내지 않으면... " 그런... 소리가... 지금 나오니? 너는?' 그가 분노에... 아니면.... 다른 무언가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고 있다는 것이.. 어둠 속에서도 느껴진다.. 그의 목소리가 한 없이 떨리고 있다... " ..............꺼져.... 너야말로 내 눈앞에서 꺼져 줘.." 순간 나의 가슴은... 묵직한 누엇인가에 짓눌려 하염없이 가라앉는다... " ....꺼져버려......" 네가... 나를 밀어내.... 나를 거부해... 새 가슴처럼 마음을 졸이며 너의 세게에 들어온 나를... 외면해..... " 미안해....." " ...뭘..." " 잘못했어...." " ...뭘..." " ........" " ....나가." " ......." " .....나가." 지훈의 목소리가 조각난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왔다. 이래서는... 이래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잖아. 이 바보 같은 자식아!!! " 그래? 그래.. 나가주지.." 나는 비틀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온 몸에 퍼지는 아픔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오기와 그에 대한 가슴 아픈 원망으로 베개를 집어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 ................이...이... 이 망할 놈아!!!" 그래! 이 망할 자식아!!! 왜 나를 밀어내! 왜 나를 거부해! 왜... 나를 외면해... " 죽어 버려! 이 자식아!!" 베개로 그의 머리를 후려치며.. 아아.. 왜 눈물이 나는거야... 이제야.. 이제야... 너에게로 돌아왔는데... 너에게로 돌아왔는데.. 왜 나를 외면해.. 지훈아... 밀어내지마... 거부하지마.. 외면하지마.. 나는... 너를... " 죽어버려.. 이 나쁜 자식아... 나는... 나는.. 너를..." 울음을 삼킨 나의 목소리가 떨려온다... " ........." " 나쁜 놈 같으니.. 이럴려면.. 애시당초.. 나에게 마음을 열지 말았어야지.." " ........." " 이제와서.. 이제와서.. 너에게... 너에게 다가가려는 나를.. 밀어내버릴거야? 응? 지훈아... 지훈아... 나는... 지독한 겁쟁이야... 두 번 다시 상처입고 싶지 않아... 너에게만은... 특히 너에게만은... 상처입고 싶지 않아..." " .........왜... 왜... 무엇 때문에..." 지훈의 목소리가... 지금의 방 안 만큼이나 어둡다... 그래.. 말하자... 말하고 나서... 상처받아도.. 그것 때문에... 아파한다해도... 늦지 않아.. " 너를... 너를..." " ........." " 좋아하니까..." " .........나가...." 그래... 그게 너의 대답이구나... " 왜!! 왜!!" 놓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네 안에 들어와버린 너를 놓아주기에 이미 늦었단 말이야!! 나는 다시 베개로 그를 후려 갈겼다. 베개가 아닌... 다른 뭔가가 내 손에 있었으면.. " 왜... 왜 나를 밀어내... 으으윽..." 손이 떨려온다... 그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서 외면당하며.. 아파했을까... " .......은우야..." 지훈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떨림이... 나의 손을 타고 전해진다... " ....나는... 나는 너와 달라..." " .........." " .....나는 즐겼어... 알아? 눈치챘니? .....그 살인마와 의식을 공유하며... 즐겼다구..." " ........." " ....비명을 지르는 너를 보며... 아파하는 너를 보며... 너를 강간하며... 즐겼다구... "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너는.. 지금... " .....너는 나를 죽이며 끝없는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나는... 나는... 너를 가지며... 기뻐했다구... 이런.. 내가.. 더러워.. 혐오스러워....." 자괴감이 실린 목소리.. 한없이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너의 지친 목소리.. " 그건... 네가 아니야.. 네가 한 짓이 아니야.. 그 놈이 한 짓이라구..." " ...그래... 그 여자를... 범한 것은... 내가 아니야.... 하지만... 나는 너를.... .. 그 놈은.. 그 여자를.. 나는 ... 너를...." " .........." " ....이래도.... 내가 너의 옆에 있어주길.. 바라니....... 이런 내가... 너의 옆에 있어주기를 바라니....." 아..........너는............ 너는 그랬구나......... 그래서 나를 밀어내려는구나..... " ....은우야... 미안해... 미안해...." 그가... 울고 있다....... 가슴이 ... 아파..... 울지마.. 지훈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손을 뻗었다... 그래... 나에게 먼저 손을 뻗은 것은.. 너였으니.. 이제는 나의 차례다... 나의 손이... 그의 얼굴에 닿자... 흠칫 놀라며 굳어지는 그를 느낄 수 있다.. " 지훈아... 이리 와...." 버림받은 아이를 안아들 듯... 나는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속삭였다... " 도망가지 마.... 이리 와... 나에게서 도망가지 마..." " ............" 아직도.. 그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져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의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 도망가지 말고.. 이리 와... 나에게로 와... 나는... 나는.. 너를 좋아해..." " ......후회... 할거야... 후회 할거야..." " 이대로 너를 두고.. 간다면... 아마도 평생 후회하겠지..." " ........은우야..." 그래... 솔직히.. 지금 내가 정상인지는 모르겠다.. 만약 이 상황이.. 어느 영화 속의 한 장면이고.. 너와 내가 남녀 주인공이었다면.. 분명 나는 너를 유혹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거야.. 너와 나... 결코 이성적이지 못한 이 상황에서... 순간의 감정에 이끌려... 두고두고 후회하며 괴로워할지 모르는 일을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지금의 이 순간만큼은.. 동정도.. 회피도 아니야... 나는... 나는... 정말로 너를... 좋아해.. 지훈아.. 다만.. 다만.. 지금이 아니고는... 너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기에.. 술김에 고백을 하는 철 없는 남자처럼.. 나는... 내 가슴에 품고 있던 지훈의 머리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들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지훈의.. 한숨소리가... 내 목젖을 간지럽힌다.. " .....후회.. 할거야.." 지훈의 속삭임... 나의 입술은 그의 이마를 따라 내려와.. 그 잘생기고 단단한 콧등을 스치고... 그의 메마른 입술에 닿았다. 거친 그의 입술... 마음이 아프다.. 내가 알고 있는 입술은 늘 언제나 따뜻하고 촉촉했는데... 메마른.. 너의 입술... 내가.. 적셔 줄게.. 나는 나의 혀를 내밀어 그의 까칠한 입술을 천천히 핥았다.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그가 몸을 빼내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을거야.. 지훈아... 이번엔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테다.. 내가 상처입힌 그의 입술 한 쪽에... 여전히 딱딱하게 맺힌 피딱지가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혀를 대어 문지르자 비릿하고 짭짤한 피 맛이 느껴진다... 지금... 나는 제정신이 아니야.. 하지만... 기분 나쁘지는 않아... 후회하지도 않을거야... 설사... 내 이런 행동을...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부끄러워 할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후회하지는 않을테다... "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어?" 지훈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다.. " 그래. 알아." " ...우리는... 남자야... 같은... 남자라구.." " 알아... 네가 싫으면 하지 않을게..." " ...........싫지 않아... 싫지 않아..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지훈이 한 손을 들어 내 뒷 머리카락 속으로 집어 넣어 부드럽게 매만졌다. " 난 몰라." " .....모른다구?" 그가 어둠 속에서.. 조용하게 웃었다.. 소리내어... 그러고보니.. 그가 제대로 소리내어 웃는 것을.. 듣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 그의 목소리가... 좋다... 그 낮고 가슴을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 " .... 둔한 녀석..." " 뭐?" 내가 얼굴을 떼며 반박하려 하자 지훈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을 주며 붙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 ....오늘 낮에.. 화장실에서... 내가 한 짓은.. 그럼 뭐라고.. 생각해?" 지훈의 속삭임이 바로 귀 옆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 따뜻한 숨결이 목을 간지럽힌다... " 무..무슨 짓?" 내가 먼저.. 시작한 일이지만... 왠지.. 두려운 것은... " ...이런 짓..." 그가 내 목에 입술을 가만히 대더니 혀 끝으로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으윽.. 가..간지러워. " 가...간지러워." " ....알아." 안다면서 왜 멈추지 않는거야. " 으흑." 갑자기 내 입에서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윽.. 이것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서 나온 소리일 뿐이야.. 목안이 간질간질거린다.. 뭔가가 몸 속에서 뜨겁게 달아올라 온 몸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있어.. " 으윽.. 간지럽다구.." 나는 얼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밀쳐내며 그의 혀가 닿았던 자리를 마구 긁어댔다. " .....간지러워?" " 그래. 못 참겠어. 마구마구 긁고 싶어." " ....긁어도 소용없다니까.." "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나는 무심결에 대답을 하고서... 순간 내 머리 속에 스친.. 생각 때문에..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기시감...... 처음으로 보고 경험하는 것을 마치 전에 보았거나 경험했던 것으로 느끼는 것 이와 똑같은 상황을.. 경험한 것 같은... " ...이렇게..." 지훈이 나의 목덜미를 물고서는 자근자근 깨물기 시작했다. 살짝살짝 자극만 주며... 이제는 데일 것처럼 뜨겁고 촉촉한 입술이 살갗에 스칠 때마다 가슴 속이 지끈거린다... " 그럴 리가 없는데..." " .....뭐가..." 지훈이 여전히 나의 목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 ...그건.. 꿈이었는데..." " .........꿈?" 되묻는 지훈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어려 있다. " 그래.. 꿈.. 서..설마 그 꿈 까지 알고 있는거야?"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열에 들뜬 신음을 토해내며 그에게 매달렸던... " ....꿈은 몰라..." 휴우.... 그것까지는 몰랐... " ..하지만.. 현실은 알아...." 던 것이 아니라... 그게 무슨 소리야? 한숨을 내쉬던 나는 다시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말을 버벅거렸다. " 혀...혀..현실이..라니?" "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난 네가.... 잠결이라.. 기억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지훈이 다시 목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혀를 부드럽게 놀리며 쪽쪽 소리가 나게 빨아댔다. 으으윽.. 기..기분이 이상해.. " 아흑..." 나는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 ........이제 그만." 지훈이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하며 입술을 떼어냈다. 순간 내 가슴을 찌르는 상실감과 허전함에 나는 엉겹결에 화가 난 목소리로... " 왜!" 라고 소리치고 말았다.. 이런... 이래서... 나는 빨리 죽어야 한다니까.. " ...쿠쿡.." 그가 두 팔로 나의 어깨를 잡은 채 웃음을 삼켰다. " ........왜냐면..." 지훈이 손을 들어 가만히 나의 뺨에 대었다. 아... 따뜻하다... " ....왜냐면... 이대로 계속 가다간...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당할 지도 모르니까..." " 무..무슨 짓?" " ....그 놈이 했던..." 지훈의 목소리가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분명.. 그 악몽을 다시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바보같으니... 그건 네가 한 것이 아니라니까.. 설사... 네가 나에게 고통을 주면서.. 즐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너의 착각이야... 네가..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는거야.. 너는 단지.. 단지... 나와 자는 것을 생각했던 것 뿐이야... 내가... 꿈에서.. 그랬듯이.. 아차.. 그건 꿈이 아니라고 했었지.. 어쨌든.... 그건 네가 아니야.. 나는 보았는 걸... 그 놈에게 사로잡히 채... 괴로워하며.. 울고 있는... 도움을 간절히 바라던 너를 보았는 걸... " 말했잖아.. 그건 네가 아니라고.." " ......나야." " 아니야." " ..........나야." " 아니란 걸 증명할 수 있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나는 지금 대단히 간이 부워있는 모양이다. 하긴.. 내가 제정신인 때가 최근들어.. 얼마나 있었던가... 이런 말을...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나 자신조차.. 놀라울 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까닭은.. 다름 아닌 너 때문이다... 네가 아니면... 나 또한 이런 말을 하지 않아.. " ...어떻게 증명한다는....거야?" 지훈이 불안해 하는 듯 하다... 그의 그런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갑자기... 더욱... 용기가 생겨... 결국엔.... 말하고 말았다... " 그게 너였는지 .. 아니었는지.... 직접 해보면 되지..." " .............." 아쉽다... 방 안이 지극히도 어두워... 너의 눈을.. 너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일지도..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 역시 보지 못할 테니까.. 한참... 침묵이 흐른다... 들리는 것은... 열려진 창문에서 심장소리만큼 크게 울리는 비소리와... 너의.. 숨소리.. 나의.. 숨소리... 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 무거운 침묵에 견딜수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진 나는 갑자기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 오..오늘 밤에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지혜 누나가.. 지..지혜 누나랑.. 지석이 형은 밤새 친구들이랑.. 술.. 먹는다고.. 그랬고.. 어.. 네 큰 형은.. 큰 형은 오늘 야근이라..서.. 안 들어오고... 그..그래서 지혜 누나가.. 너 열쇠 안가져갔다고.. 기다리라고... 음.. 무..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해서.. 다행히.. 네가 들어오긴 했는데... 그..그런데 말야..." 멍청이..... 나는 멍청이야...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지훈이 일어나더니 내 손을 잡고 와락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끌고 간다.. 나는 혹시 그가 나를 방문 밖으로 내 던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 그래.. 나는 사상이 불순한 놈이야 .... 안 끌려가려고 바둥바둥 거리는데... 틱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눈이 아찔했다. 지훈이 스탠드를 켰던 것이다... 깜깜한 방안에 스탠드 불빛이... 아른..거린다... 갑자기 빛을 접한 나의 눈이.. 아픔을 호소하여.. 나는 눈을 찡그리며 불빛을 등지고 있는 지훈을 쳐다보았다... 안 보여... 불공평해... 그렇게 빛을 등지고 있으면... 나는 너를 볼 수가 없잖아. 지훈이 나를 천천히 잡아 끌었다.. " ....은우야." " 응?" 나는 네 눈동자가 보고 싶은데.. 네 얼굴을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아... " ....다시 말해 줘." 커억... 뭘 다시 말하라는거야... " 뭘." " ...아까 그 말..." " 못 들었어? 못 들었으면 말구." " ...아니.. 들었어." " 그런데 왜 또 물어?" " ......네 눈 보면서... 듣고 싶어... 그 말을 하면서... 네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보고 싶어..." 그래서... 그래서.. 스탠드를 킨 거야? " ....은우야..... 다시.. 말해 줘..." 왠지... 애원하는 듯한 지훈의 목소리에... 가슴이 지끈거린다... 나쁜 놈... 그런 식으로 나오면... 어쩔 수가 없잖아. " 그 빌어먹을 놈이 너였는지 아니었는지 직접 해 보자구!!!" " ............" 으윽.. 나는... 이런 놈이야... 불빛 때문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눈을 치켜뜨며.. 투덜거렸다. " 들었으면 그만이지.. 뭘 남사스럽게 또 묻는거야.. " " ........침대에 앉아." " 꿀꺽." 헉... 내 목젖 울리는 소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 뭐..뭐라구?" " .....침대에 앉아 봐." 왠지... 화가 난 듯 하기도 하고...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그..그래.. 일단은.. 앉으마.. 앉는다구..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 어억." 나는 꼴사납게도 기겁을 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훈이.. 윗도리를 훌렁 벗어버렸다. 그 흐릿한.. 스탠드 불빛을 등진... 지훈이의 상체가 눈에 아른거린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숨이 막혀와... 목욕탕 가면.. 늘상 보는데... 나하고 전혀 다를 바 없는... 남자 몸인데... 왜.. 왜 이러는거야... <몰라서 물어? 지훈이니까> 나의 심장아.. 네가 대답해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구... " ....음.. 엇흠.. 불은... 끄는게 좋을까?" 뭐야.. 그 헛기침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약간의 두려움과 불안함이.. 웃음과 함께 순식간에 날아가버렸다. 나는 키득키득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넌... 정말... 이상해... 그렇게 자신있게.. 윗도리를 벗어제끼더니... 갑자기.. 그 쑥쓰러운 헛기침은.. 왠 거란 말이야... " ......불 끄지마?" " 응. 끄지 마... 왜냐면..." 그래.. 왜냐면 말이지... " ..............왜냐면?" 내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자... 지훈이 약간 초조한 기색을 띈 목소리로 반문한다. " 왜냐면... 나도.. 네 눈동자를... 네 얼굴을... 보고 싶으니까.." " ......" " 너의 그 어둡고 까만 눈동자를 보는 것이.. 좋다고 하면.. 비웃을거야?" " 아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훈이 대답했다. " 너의... 그 담배 냄새와 섞인 체취를 맡는 것이 좋다고 하면... 비웃을거야?" " 아니." 지훈이가... 역시 ..재빨리 대답하며... 성큼 나에게로 걸어왔다. " 네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이 좋다고 하면... 비웃을거야?" " 절대로.. 절대로 아니야.." 나는... 그가 허리를 굽혀 나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며... 팔을 들어 그의 목에 둘렀다. 입술을 쪽 하고 맞대는 입맞춤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바란 것도 아니다... 내가 원한 것은... 그래.. 그래.. 온 몸이 떨릴 만큼.. 깊고 진한 입맞춤이다... 그렇지만... 무척 조심스럽다.. 당장이라도 밀어내면.. 순순히 물러날 듯... 나는.. 그런 그의 마음이 안타까워... 그를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 ...내일이면.. 넌 후회할지도 몰라... 그래서 잊으려고 할 지도 몰라."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지훈이 속삭였다... 흐릿한 스탠드 불빛에 보이는 그의 까만 눈동자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흔들리고 있다.. " ....하지만.. 나는.. 언제나 생각할거야.. 또 생각하고 생각할거야... 죽는 순간까지 잊지 않을거야..." " 임마. 너만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게 아니라구..." " ......." " 나는 말야... 오늘 밤을 가슴에 새겨 넣어둘거야. .... 어때. 이 편이 더 멋들어지지?" 내가 그를 향해 약간 수줍은 듯 미소지으며 말하자.. 지훈은.. " ......응. 그래.. 그 말이 더 멋있다..." 라고 말하더니.. 잠깐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가... 꽉 잠긴 채 떨려... 나는... 가슴이 시리다... " 지훈아..." " ...응." " 나 너 좋아..." " .........응.. 나도.. 나도 네가 좋아..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를만큼." " 평소에 아니면.. 지금? 지금이면 곤란..." 이 놈의 주둥아리는 꿰매버려야 해... " 쿠쿠쿡... 둘 다 라고 하면 화낼꺼야?" " 아니.. 나도 솔직히.. 어떻해 해야 할 지 모르겠어. 머리 속이 하얗다구.." " ..... 그 때는 잘하더니..." " 언제? 우리집에서 잔 날?" " 아니... 그 다리가 쭉쭉 뻗은... 생머리 누님하고 말이야..." " 그...그..그건 꿈이잖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놈은.. 정말 못하는 말이 없구만... " 우리 나이에는 누구나 다 꾸는... 음.. 지극히.. 정상적인..." " ..............나는 네 꿈 밖에 안 꾸는데?" " 그래서... 반년 동안 밤마다 내 이름 부르면서 끙끙 앓았냐?" " 엇.....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설마... 너.. 지금 그 표정... 부끄러워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표정의 달인.... 최지훈이... 부끄러워 하다니... " 다 아는 수가 있지..." " .........역시... 누나와 형은... 원수라니까..." " 그래두... 지혜 누나 덕분에...." " ...........응. 그래..." 지훈이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 ................" " ................" " ................" " ................" " ................" " ..............이제 그만." " 으응? 뭘?" 쑥쓰럽고 무안스러운 침묵 띁에 갑자기 지훈이 건넨 말에.. 내가 시선을 돌리며... ...갑자기.. 지훈의 눈을 볼 수가 없어서.... 묻자... 지훈이... 살며시 내 몸위로 자신의 몸을 겹쳐 왔다.. " ....담소를 나누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자구..." " 응." 내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지훈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덮었다. 그 탄탄하고 따뜻한 가슴이 내 가슴을 묵직하게 눌러온다. 숨이 막히지만... 그래도 좋은 것을 어떡하랴... 이윽고 그의 혀가 내 안으로 미끌어져 들어와 다정하게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거 봐.... 그 녀석은 네가 아니었어.. 꿈에서 그 녀석의 혀는... 더럽고 혐오스러웠는데... 지금의 네 것은...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워... 지훈이 손을 옷 속으로 넣어 배와 가슴을 쓸어본다. 그의 손이 시원하다... 시원하다니... 그래.. 그래.. 그의 손이 시원하다고 느껴질 만큼... 내 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나보다... 그가 점점 집요하고 깊게 깊게 들어온다... 웃.. 숨을 쉴 수도 없을 만큼 말이다... 그리고는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나의 혀를 자신의 것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이윽고.. 서로 엉키며... 우리의 몸도.. 서로 엉키며.. 그의 뒷목덜미를 얼싸 안고 있던 나의 손은 어느 새.. 그의 머리칼을 움켜 쥐고.. 다른 한 손은 그의 단단한 등을 더듬었다.. " 허억." 지훈이 갑자기 입술을 떼더니 나의 윗도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너무 급하게 잡아당긴 바람에 내 턱에 걸려 옷이 벗겨지지 않자.. 지훈은.. 중얼중얼 무슨 말인가를 투덜거렸고.. 나는 웃음이 나와... 키득거렸다. 열에 들뜬 몸이 갑자기 공기에 드러나자 오싹하다... 지훈은..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오른 손을 뻗어... 엄지로.. 나의 입가에... 그와 내가 나누던.. 깊은 입맞춤의 흔적을 쓰윽 닦아내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대고는 쪼옥 하고 빨았다.. 음.... 여전하구만... 그리고는... 드러난 나의 가슴에... 살짝 살짝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아윽... 목덜미가 오싹거리고... 등줄기가 찌르르르 저려온다.. 뭔가가 내 안에서... 견딜 수 없이 타올라.. 나를 가만히 놓아두질 않는다. " 아아... 아아... 아하악..." 내가 등을 활처럼 곧추 세우며 신음을 토해내자 지훈이 나의 등을 받쳐주며 속삭였다.. " 은우야... 은우야...." 대답하고 싶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어... " ....후회 할거야?" " 아... 아니.. 절대로.. 아흑.." " ....... 절대로... 절대로.. 후회하면 안돼... 나중에 나에게서 도망가면..." " 으윽.." " ....나도 따라 도망갈거야..." 웃음이 나오려고 했으나... 다시 이어지는 지훈의 애무에.. 그만.. 웃음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신음을 토해 냈다.. <사락> 순간 머리 속에 전류가 빠지직 흐르는 듯 하다. " 자...잠깐만! 지훈아!" 막 바지를 벗겨내려는 지훈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니 그가 윽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든다. " ....왜?" " 너.. 뭐하려구." " ..... 너.. 기분 좋게 해주려구...." " 서...설마 저기..비..비디오에 나오는...그..그런 것 말이야?" " ........그래." 지훈이 씨익 웃는다. 아.. 갑자기 저 입이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이냐... " 해 봤어?" " ....아니.. 하지만.. 열심히 봐두었지... 나중에...." 갑자기 지훈이 입을 다문다.. " 나중에 뭐! 여자한테 써 먹으려고!!!" 말을 하고 보니 이상하다... 여자에겐.. 없는 것도 있는데.... " .....만약... 만약... 내가.. 아주 좋은 일을 해서 말이지... 신이.. 내 소원을 들어주게 되면.. 그 때 써 먹으려구.. 그런데... 정말.. 하게 될 줄은..." 지훈이.. 미소지었다... 아주.. 다정하게.. 따뜻하게... 나는 차마 그 소원이 무엇이냐구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만약.. 그 말을 듣게 되면... 분명히 울고 말테니까.. " .....하지 말까?" 지훈이가 손을 뻗어 내 뺨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 아니. 해 줘." 젠장... 이런 말을 하게 되다니.. " ...그럼 한다." 지훈이 또 빙긋 웃는다... 으.. 차마 내 눈으로는 못 보겠다 싶어... 두 팔을 머리에 대고 천장을 올려다 보....았.... ...............헉.. " 우윽!!" 내 머리 속은 온통... 그 날의 일로 가득 찬다... 지훈이가... 지훈이가.. 내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끊임없이 빨며.. 핥고... 그 따뜻하고 몰캉거리는 혀가... 내 손가락 끝을 자극하고... 뜨거워... 속이 뜨거워서.. 다 타 버릴 것 같아.. " 으윽.. 아악.. 하..하지마.. 기..기분이 이상... 으윽.." 그 날 처럼 손으로 그의 머리를 화악 밀어버리면 그만이건만... 나는 온 몸을 비틀어대며 신음을 질러댔다.. 저절로 눈이 꽈악 감긴다... 전신이 구름 위로 붕 뜨는 것 같은 기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전신에 감돌아 나를 애태운다.. " 아악!" 무의식 중에 외마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나는 그만.... 그만.. 볼썽 사납게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아.. 그렇지만.. 황홀하구만.. 헉.. 지금.. 무슨 소리야... " .....나 잘했지?" 지훈이 갑자기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나는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요플레를 입에 묻히고 있나... 아직도... 그 날.. 옥탑방에서 같이 지낸 날과... 지금 이 순간을 혼동하고 있던 나는.. 순간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아악!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입을 닦아주었다. " 잘하고 못하고 간에 너 무슨 짓이야!!" 지훈은.. 내 손바닥 안에 가만히 혀를 내밀고는 눈으로만 히죽이 웃는다. " ....먹어도 안 죽어...." " 죽는 게 문제야? 더럽잖아..." " ......남의 것은 더럽지... 네 건 안그래..." 말을 말아야지... 내가 이 놈과 말을 말아야지... " ....잘 했어? 기분 좋았어?" 지훈이 눈을 빛내며 묻는다... 나는 뭔가 지금까지 대단히 착각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지금.. 그의 모습은.. 마치.. 덩치만 커다란... 강아지 같다... 그래.. 시베리안 허스키 말이야.. 그 무섭게 생긴 얼굴을 한 덩치 큰 강아지 말이지.. " 그래... 좋았어... 아주.. 열심히.. 자세히.. 지켜보며.. 공부했나 보구나.." " ......물론이지. 맨날 네 생각하며.. 봤는걸..." ............................. " 그....그래.. 잘했다..." 지훈은 잠시 아주 부드럽고 온화한 미소를 짓더니... 그 큰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윽... 지금 상황이 바뀌었다구... 내가 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워리워리.. 잘했다를 해야 하는... " ....이제 그만.." 뭘.. 그만? 이..이게 끝이야? " 너...너는..." 지훈이 또 빙긋이 웃는다.. " .........나는 안돼. 아직은 안돼." " 뭐야. 너 불감증인거야?" 그가 푸욱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 ......네가 고쳐줄래?" " 저..정말이야?" " ....아니.. 아니야.." 지훈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한꺼번에 다 하면.. 네가 힘들잖아.. 그리고... 나도... 늘 보기만 했을 뿐 해본 적이 없어서... 너에게 상처만.. 줄..." " 뭐야? 그럼 다른 놈이랑 해 보고 난 다음에 나하고 하겠다는거야!!!" 등줄기에 불이 화르르르르륵 일어나는 것 같다. 뭐야.. 이 열이 치미는 감정은.. " ...그..그게 아니고 말이지...." " 당장해!!! 이 자식아!!!" " .............쿠...쿠쿡.. 푸하하하하하." 지훈이 갑자기 배를 움켜 쥐며 침대위를 뒹굴었다. 그제야.... 나는... 사태를 파악... 아.. 정말... 나는 내 입을... 없애버려야해... " 나만 좋은 것은 싫단 말이야..." " ..........." 지훈이 가만히 나를 쳐다본다.. 왜 그런지 알아..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악몽에서처럼 나에게 상처를 입히며... 내가 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보며... 네가 희열을 느낄까 봐 두려운 거지? " 확인하기로 했잖아." " ............안 무서워?" " 뭐가?" " ....내가.." " 네가 왜 무서워?" " 오늘 꿈 속에서 널 그렇게 만들었는데도 내가 이러는 게 안 무서워?" " 그럼.. 너는 내가 맨날 널 죽여댔는데도... 왜 잘해 준거야.." " 그건 네가 아니니까.." " 나도야." " ....." " 두 번 다시 도망 안 갈꺼야. 그리고 놓아주지도 않을거야... 내 모든 걸 보여주기로 했어. 그리고 널 믿기로 했어. 그러니까.. 무서워 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 .............그래.." 지훈이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랍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를 주섬주섬 찾는다. " 뭐해?" " .......그냥 하면.. 너 죽어.." " 죽어? 왜? 마스크라도 쓰고 해야 해?" 갑자기 지훈이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 ......무슨 소리야?" " 나...나...나도 그냥... 네가 한 것처..럼.." " ....그건 나만 할거야." 갑자기 지훈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 그..그럼.. 지금 니가 한 다는 건.." 말로만 듣던 내용들이 머리 속에 주루룩 펼쳐진다. 남자의 삐리리가 상대의 xx 에 --되어.... " ..........은우야. 이걸 해야 하나?" 갑자기 지훈이 뭔가를 나에게 들어보인다... 흐릿한 스탠드 불빛에 잘... 안 보이는데.. 눈에 띄는 것은... 포효하는 호랑이마크...... 정력제인가? 커억.. 호랑이 연고다.. " 누굴 태워 죽일 일 있어?" " ...........냄새가 좋은데... 역시.. 아프겠지?" 그냥... 이제 그만... 이라고 할 때.. 순순히 따를 것을... " ....그럼.. 역시 바셀린으로.." 지훈이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 잔말 말고 빨리 와." 말은 톡 쏘듯 내뱉었지만... 사실.. 나는 흐뭇흐뭇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다... 얼마나.. 가슴 떨리고... 기쁜지... 조금은... 두렵다.. 하지만... <지훈이> 그래.. 지훈이와 함께 있으니까.. <지훈이> 응... 지훈이와 함께 있으니까.. 다시 나에게로 다가온 지훈이의 말했다. " ....어떻게 하는지는 내가 봐서 알거든?" 봐서 알다니... 자..잠깐. " 잠깐만.. 너... 본 비디오가.... 포르노...지?" " ...........알면서 왜 물어?" " 이성이야.. 동성이야..." " .....당연히 동성이지.. 너 생각하면서 봤다고 했잖아..." 쿡.. 그래... 그래.. 처음부터 네 마음 속에 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다.. 그가 노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그는.. 그저... 나에 대한 감정만을 맹렬히 품고 있을 뿐.. 그것이 신뢰이든.. 우정이든.. 혹은.. 사랑이든 간에.. 내가 너를 믿고... 네가 나를 믿는 데... 표현하는 방법이 어떻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야.. 그렇지? 우리 둘만이 공유하는 비밀인데.. 우리 둘만이 공유하는 꿈의 세계처럼 말이야... " ....아플거야.. 무척이나.." 지훈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 응." " .....지금이라도 싫다고 하면.. 안 할거야." " 안돼." 단호한 나의 말에.. 그가 살짝 웃는다. " .....도중에 하지 말라고 난리쳐도.. 그 땐 모른다." " 응." 그래... 솔직히 무섭다.. 가슴이 떨린다.. 그의 손이... 내 다리 사이를 파고 들어와... 어루만지고... 그의 손이 등을 타고 내려와... 미끈한.. 바셀린이 묻은 손가락으로 나를 자극할 때... 섬뜩하고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두려운 것을 이겨낼 만큼... <너를 좋아해.> 그래..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한다구............. 후끈한 숨결.. 열기.. 열에 들뜬 신음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진다.. " 아아아.. 하악.. 아..아파... 으윽..." 그의 손 대신.. 그 스스로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들어왔으나.. 역시 눈물이 날 만큼 아프다.. " .... 은우야.. 하지 말까? 응?" 숨을 헐떡이던 지훈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염려와 아쉬움이 뒤섞인 목소리.. " ....역시 그만... 둬야..." 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아쉬움보다... 나에 대한 염려가 더 크다.. 그리고... 언뜻 내비치는 불안감.. 그의 불안함이 나를 또 다시 가슴 아프게 만든다. 나는 대답 대신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아 꽉 조였다. 그래... 나도 비디오 봤단 말이다.. " 허억!" 지훈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내 몸이 이끄는대로.. 천천히 그를 자극했다. 부드럽게... 마치 물결이 이는 것처럼.. 잔잔한 호수가 물결치듯이.. " ....은우야..." 그가 내 목에 머리를 파묻은 채 중얼거린다.. " 아아.... 아.. " 내 몸 속 어디에 그렇게 많은 폭죽을 숨겨 두었을까? 어느 날.. 자고 있을 때.. 요정들이 와서.. 내 몸 속 여기저기에 아주 작은 폭죽들을 숨겨 둔 걸까?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이.. 열기가... 나의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어... 그것들에 불을 붙인 모양이다... " 아아아!! 아흑!" 펑. 펑. 내 안에 폭죽들이 하나 둘 씩 터지며... 푸른 빛.. 푸른 빛.. 바다처럼 깊고 짙은 푸른 빛이 나를 감싸 안아.. " 윽..." 지훈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헐떡였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그의 등을 더듬으며... 지훈이의... 냄새.. 좋아... " 아아악!!!" 아픔보다 머리 속을 파랗게 불태우는 쾌감에 비명을 질렀다. " ..은우야.. 은우야..." 지훈이 열에 들뜬 목소리로 나를 애타게 부른다.. 나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지훈아... " .... 은우야.. 은우야.... 은우야!" " 아흑!! 아아악!! 지훈아!!!" 온 몸에 숨겨져 있던 폭죽들이 일순간 터져올랐다. 이윽고... 나를 뒤덮는 바다빛... 그래... 마치 그것은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같이 변하여... 나를 덮친다... 짙은 바다빛.. 한 없이 깊고 아늑한.. 그 속으로... 그래.. 네 안으로.. 너에게로... " 은우야... 은우야......" 지훈이... 아기가 칭얼거리듯... 나를 애타게 찾는다... 내가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 듯.. 자신의 몸으로 꽈악 감싸안으며.. 두 팔로 나를 붙잡고는... 자신의 머리를 내 목덜미에 파묻고는... " 응.. 나 여기 있어..." 나는 지훈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부드럽게 매만지며 속삭였다.. " 나 여기있어... 이건 꿈이 아니니까... 사라지지 않아..." " 은우야...." " 꿈이 아니니까... 사라지지 않아..." " .......응..." " 지훈아..... 난 네가 좋아..." " .........." " 그리고... 너를 믿을거야..." " ........." " 도망치지도 않을거야...." " ...........응." 목덜미가 뜨겁다.. 뜨거운 물줄기가 내 목을 적신다... 지훈이의 어깨가 들썩인다... 갑자기 나의 눈이 흐릿하다.. 곧이어 뭔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다 큰 녀석 둘이서... 꺼이꺼이 흐느끼다니...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 둘 뿐이니까 상관없어... 유일하게... 우리 둘을 보고 있는 창 밖의 비도... 지금은.. 같이 울어주고 있으니 말이지.... 이 악몽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영원히 그 속에 갇혀 허우적대며 괴로워 하며 상처받는 것은.. 우리 둘... 하지만 말이지... 적어도 혼자는 아니잖아... 혼자 두려워하고... 혼자 무서워하고... 혼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네 안에 있고... 네가 내 안에 있다... 너의 존재는 언제나 주술이 되어 나를 이끈다. 나의 존재는 언제나 주술이 되어 너를 이끈다. 너에게로... 나에게로... 마음씨 좋은 마법사가 신데렐라에게 걸어주는 마법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나의 의지가 마법이 되어.. 너에게로 이끌었다... 지훈아........ 지훈아........ 정말... 좋아해.............. 좋아해......................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아주.... 더운 여름날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살결이 사무치도록 그리울 때가 있다. 비록 땀냄새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체취에 킁킁거리며 헤죽 웃고 싶을 때가 있다. 다리 사이에 끼어 애꿎게 시달리는 베개 말고... 체온이 느껴지고 움직이는 사람의 몸이 그리울 때가 있다.... 외로움.... 또는 그리움... 믿을 것은 나 밖에 없다... 할지라도... 사람은.. 혼자 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의미조차 찾을 수 없다. 이 순간.... 창 밖에 내리는 비 소리가 나의 심장을 울리고... 열려진 창으로 비와 함께 바람이 들어와 머리카락을 흔들고... 얆은 이불 속에서... 너에게 안겨... 내 가슴이 너의 심장 소리를 느끼는 지금... 내 안이 따뜻해... 행복이라는 것의 형태가 있다면... 투명한 푸른색의 빛덩어리. 내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솟아올라... 내 안을 따뜻이.... 채워주고 있다. <일어나. 일어나.> 두두두두 울리는 빗소리... 어서 잠에서 깨어나라고 나를 재촉한다... " 으음....." 뜨지 않겠다고 발악을 하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는데... 아...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담배냄새와 함께 흘러드는 지훈이 냄새.. 가물가물한 시선 속에 들어오는 것은... 까무잡잡한 지훈이의 몸. " .............담배 끌까?" 아웅...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드니 지훈이가 어린 소년처럼 웃는다.. 아.. 가슴이 왜 이렇게 두근거릴까... 어제 흥분한 가슴이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한 건가? 순간 나와 그 사이에 방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입지 않았으며... 민망할 정도로 서로 바짝 달라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 나는 그만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지훈아.. 너까지 덩달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 까지는 없잖아. 내가 나를 동화시켰나 보다. 그러고보면.. 너의 가슴을 훔쳐보던 그 날.. 내가 네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네 가슴에 안겨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던 날... 너는 내 엉덩이까지 한 대 후려치며.. 태연자약하게 굴었는데... 이제는 내가 얼굴을 붉히니... 너까지 덩달아 부끄러워하는구나... 너는 나를 변하게 했고... 나는 너를 변하게 했고... 우리는 서로 동화되어 가고 있어. 그렇지? " 끄지 마. 그냥 담배냄새는 안 좋은데... 네 냄새랑 섞이면 아주 좋아." " .............푸우우우." 지훈이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내 입에 담배연기를 불어넣었다. " 꾸에엑.. 너 죽어." 그는 아주 기분이 좋은 듯 키득거리며 한 손으론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만지작거렸다. " 맛있냐?" " ...............맛있긴.. 씁쓸하고 칼칼하지.. 우리 집은 형들은 물론이고 부모님서부터 누나까지 안 피우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피우게 되더라구." " 헉... 언제부터 피웠는데?" " ....눈치 껏 피운 건.. 초등학교 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고.. 대놓고 피운 건.. 중학교 입학하면서.." " 어지간하구나. 너두." " ..... 넌 안피우지?" " 그래. 그런데 이제부턴 피울꺼야." " ........안돼." " 왜?" " ....너도 피우면... 네가 내 냄새를 못 맡을 것 아냐. 담배 피우는 사람은... 같이 담배 피우는 사람 냄새.. 못 맡으니까....." " 참나... 내가 좋다좋다 하니까.. 네 냄새가 무슨 꽃향기인줄 아나보네." " ........네 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은데?" 지훈이 갑자기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으흑. 가..간지러워. " ...........은우야." " 왜?" " .........네가 너무 좋아서... 숨이 막혀..." " 목에다 코하고 입을 파묻고 있는데 당연히 숨이 막히지..." 분위기 없다고 놀려도 뭐.. 어쩔 수 없는 노릇. 이것은.. 나의 천성 아니겠어? 그리고.. 나만의 개성 아니겠어? " ........그러니까.. 인공호흡 시켜 줘..." 갑자기 지훈이 얼굴을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 그 반지르르하게 윤기 나는 너의 입술.. 아직 상처가 남아 부풀어 있지만... 나의 가슴을 두근두근 거리게 만드는... 그의 말 뜻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지만.. 일단 모른 척 했다. 이런 걸.. 설마 내숭이라고 하진 않겠지.. " 할 줄 몰라." " ....하는 척만 하면 돼. 안 해주면 나 정말 죽는다니까.. 쿠쿠쿡." 안 해주면 죽는다는 데 못 이기는 척 해야지 뭐... " 눈 감아." " ........응? 왜?" " 인공호흡 당하면서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사람 봤어?" " ...쿠쿡.. 그렇네." 지훈이 눈을 감으며 고개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이 마치 황홀한 입맞춤을 기다리는.. 소녀같아서..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그의 입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살짝... 살짝 입술만 대고 끝내야지..........하는데.. 난데없이 그가 덥석 나의 입술을 빨아댄다. 얌마... 평생 입술만 찾아 먹기 위해.. 껄떡거리는 놈 같잖아. 내 입에서는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오고.. 지훈의 입에서는 기분 좋은 신음이 새어나오고... 곧이어 그의 혀가 살살 안으로 파고드는데... " 으악! 아 뜨뜨!!!!" 지훈이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 뭐..뭐야?" 화들짝 놀란 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리치자.. 지훈이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자기 가슴팍을 툭툭 털어낸다. " ..........담뱃재 떨어졌어...." " 끊어버려. 임마." 나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훈의 담배를 낚아채 창문 너머로 던져버렸다. " 아앗!! 저..저게 마지막인데..." 먹던 사탕을 빼앗긴 아쉽고 불만에 찬 아이의 표정.. 이런.. 나보다 담배가 더 소중하다는 거야? 지금? 왠지 심술이 난다... 담배. 너는 오늘부터 나의 공적이다. " 호오~ 아깝다. 이거지. 지금..." 내가 눈을 치켜 뜨며 말하자... " ...그..그런게 아니구... " 지훈이 말을 얼버무린다. 자식.. 귀엽게 구는구먼... 한숨을 나직히 내쉬며 머리를 긁적이는 지훈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가슴팍을 내려다보니.. 빨갛게 부풀어 있다. 꽤나 뜨거웠겠다.. " 아프니?" " ......당연하지." " 그럼 안 아프게 해줄까?" 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내 안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동하는 장난기를 참을 수가 없다. 뭐 어때. 누구에게나 이러는 것은 아니야. 오로지... <지훈이에게만> 응. 너에게만. 너에게만이야. 나는 슬금슬금... 묘한 웃음을 지으며 침대머리판에 기대 반쯤 누워있는 지훈에게로 다가갔다. " .... 너 또 무슨 장난을 치려구?" 지훈이 나의 표정을 읽고 대강 눈치를 챘는지 일단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하지만... 내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할테지.. 쿠쿠쿡.. 그래. 평상시의 나라면 절대 이런 짓 안하지만. 지금만큼은 특별하니까. 나는 지훈의 몸 위에 올라타... 그가 자지러지듯 놀라는 것에 너무 기뻤다면... 나는.. 변태일까? 빨갛게 부푼 살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행여나 그가 아플까... 아주 조심스럽게 혀로 핥아내자 지훈의 가슴이 경직한다. 크윽... 내 머리 속의 한 부분이.. 너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라는 경고를 보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하랴.. 이렇게 하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걸... 할짝 할짝거리며 열심히 핥고 있는데 지훈이가 우윽 하는 짧은 탄식을 내며 내 머리를 살짝 밀었다. " ....그만. 아픈 것은 둘째치고... 나를 피 말려 죽일 셈이야?" " 뭐가?" " ........몰라서 물어?" " 침 바르면 금방 나." " ......쿠쿡... " 지훈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키득거렸다. " 왜?" " .......가끔 넌... 굉장히 복잡하기도 했다가 단순해지기도 하고... 악에 받혀 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순진 그 자체이기도 하고... 꽤나 부끄러움을 타는 것 같기도 하다가... 이럴 때는... 나를 깜짝깜짝 놀랠 킬 만큼 대담하게 나온다니까...." " 너한테니까 그렇지" 그것도 몰랐냐는 듯한 나의 말투에 지훈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음.. 그런 멋진 표정은 너무 자주 보여주지 마... " .......그래서.. 네가 좋아..." 지훈이 빙긋이 웃으며 나를 잡아 당겼다. 나는...... 우윽... 갑자기 창피하다... 지훈의 위에 엎어지듯 누워 그와 얼굴을 아주 가까이 마주 보게 되었다. " ....그래서 아마... 너를 기억해 냈을거야..." 지훈의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온다.. 왜냐면... 나의 신경은 온통 나와 밀착되어 있는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에 쏠려있었으므로... " 기억?" 내가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되묻자 그가 씨익 웃으며 내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한올 한올 쓸어올려 주었다. " ......꿈을 꿔. 누구나 꿈을 꾸지...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었어.... 그 형체도 어렴풋한.. 나의 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매번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나온다는 걸 말이야..." " ..........." " ......분명 얼굴도 모르고... 어떤 때는 모습조차 다른 것 같은데... 느낌은 항상 같은 거야.... 꿈 속의 내 무의식은.. 어느 새 그 사람을 찾게 되고... 그건 더 이상 나의 꿈이 아니었지... 내가 꾸는 꿈이란... 오로지 나만의 세계이지만.. 내가 누군가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면서 그것은 나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가 된거야...." " ..........." 난 그 누군가가 나?라고 묻고 싶었으나... 왠지 그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그 차분하고 고요하며... 한없이 다정한 검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그 나지막한 울림 있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냥 이대로 있고 싶었다. " ..........그가 꿈속에서 보는 것을 나도 옆에서 같이 보고... 듣는 것을 같이 들으며... 그와 꿈을 공유하게 된거야..." 지훈이가.. 그의 손으로 천천히 나의 눈을 가렸다. " .....떠 올려봐... 네가 너의 아버지를 절벽에서 밀던 그 꿈을... 그리고 그 순간에 집착하지 말고.. 주변을 둘러 봐.... 그 절벽과 네 아버지와.. 너의 손에서 시선을 떼고.... 오른 쪽을 돌아 봐............. 누군가... 멍하니 서서... 너를 바라보고 있지?" " .............." " .........은영이를 어떤 할머니에게 빼앗겨서 울다가 눈이 멀어버린 꿈.... 그 아픔에 집착하지 말고.... 가만히 느껴 봐... 눈의 아픔에서 벗어나... 너의 등과 귀에 감각을 집중해 봐............................. 누군가 너를 뒤에서.... 안은 채 달래고 있지?" " ................" " ........어머니를 따라.. 물에 들어갔다가 물에 빠졌던 꿈.... 그 순간 느꼈던 두려움과 너의 눈을 현혹시키던 녹빛의 물에 집착하지 말고.... 귀를 귀울여 봐... .............누군가 너를.... 애타게 부르고 있지?" " ................." " ............단발머리 여자애와 입맞춤을 했던 꿈.... 그 가슴 떨림에 집착하지 말고.... 그 소녀의 입술에서 눈을 돌려... 소녀의 뒤를 바라 봐............. 누군가....... 너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지?" " ................" " ..........그 다리 쭉쭉 뻗은 누님과의 꿈... 즐거워하지만 말고.... 고개를 들어봐... 그 아리따운 누님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겠지만.. 쿠쿡... 고개만 살짝 들어 봐... 앞에.. 거울이 있을거야..... 그 거울을 바라 봐..... 누군가.. 그 거울에 비쳐 있지?" " ..............." " .............그게... 나야." 그래.. 너였어... 네가 거기에 있었어... 왜 몰랐을까... 조금만 눈을 돌리면... 너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든다.. 대답대신.. 자신의 손안이 촉촉이 젖어들자.. 지훈이 나의 머리를 가슴에 안아들었다. " ....그 애가 누굴까... 누굴까... 그 애와 꿈을 공유하면서.. 그 애가 숨기고자 하는 내면을 들여다 본... 나는... 그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불안한 내면을 가진 그 애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는거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 응." 나는 그의 가슴에 귀를 댄 채 대답했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 .......개학식 때 조회 때문에 운동장에 우르르 몰려나온 ...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그냥 의미 없이 스쳐 가는 그 많은 아이들 중에서 유독 한 아이가 내 신경을 거스르는 거야.... 내 육감이... 지독하게도 익숙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었어... 그 때 알았지... 그 애가.... 너라는 걸..." 지훈이의 손이 나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그 느낌이 나는 참 좋아... " ......처음엔.... 무척 당황했어.... 꿈 속에서 보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 네가 감추려고 하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데... 네가 만들어 놓은 그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한다는 것에... 과연... 내가 너의 그 견고하고 폐쇄적인 세계에 ... 들어가도 되는 것일까..... 고민하던 중에.... 그 악몽을 꾸게 된 거야.... 그리고.... 그 날.. 비에 흠뻑 젖어서... 가면은 벗어던지고...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채 들어오는 너의... 초췌한 모습을 보며.... 마음 먹었지... 네 안에 들어가기로 말이야...." " 응." 그저... 응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가슴은 뭔가 따스한 것으로 콱콱 막혀 들어와... 많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므로... " .........나는... 간혹 생각해... 꿈을 공유하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닐거라구... 아마도 이 세상 사람 전부가 누군가와 꿈을 공유하고 있을거야... 하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우리도.. 우리 말고 또 다른 사람들과 꿈을 공유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우리 둘만의 세계에 집착하고 있기에... 그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 " 찾아내기 싫어." 내가 뾰루퉁하게 말하자 지훈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의 가슴이 들썩거린다. " .........나두." "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둘은 코를 마주댄 채 한참이나 키득거렸다. <콰앙>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나는 기겁을 하며 그의 몸에서 내려와 이불을 뒤집어썼다. " 야! 이 녀석아!!!" " ...크..큰형!" 지훈이 후다닥 바지를 주워 입으며 침대에서 내려가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엎어져 버렸다. " 끄윽.. 너 아직도 학교 안 가고.. 뭐하는 짓이야..." 으음... 왠지 혀가 꼬여있는 듯한.. 술냄새가 내가 있는 곳까지 진동을 한다. " ...큰형.. 야..야근이라면서 뭔 술을..." " 킥. 밤 새워 일하게 생겼냐? 자를려면 자르라고 해!!! 아버지에게 얹혀 살면 그만이지. 으흐흐흐." 지훈이 고주망태가 되어 있는 자신의 형을 문 밖으로 밀어내는데... 큰형이 내 쪽을 홱 째려보면서 소리쳤다. " 집에 아무도 없다고!! 여자를 끌여 들여? 막둥아. 너 많이 컸구나." " ....무..무슨 소리야... 같은 반 친구란 말이야..." " 시끄러.. 시끄러.. 변명 따위는 필요 없어.. 그래.. 언제부터 이 집안의 위계질서가 이렇게 되었냐 말이야... 후딱 가야할 누님은 아직도 청승맞게 히스테리나 부리고... 장남인 나는 애인은커녕 여자 친구도 없고... 그래.. 네가 제일 먼저 간다 이거지..." " ...어딜? 주정 부리지 말고.. 잠이나 자.." 지훈이 자신의 형을 질질 밖으로 끌어냈다. 쿡쿡. 힘 하나는 정말 무지막지 하다니까.. " 안돼... 내가 먼저 갈거야... 으흑흑.." " ...어딜 간다는 거야?" " ........장가........." " ...그래. 제발 형이 먼저 가줘." 어라? 그런데 그 와중에도 지훈이 큰형의 몸을 이리저리 더듬는다. 무..무슨 짓이야? 그런데 지훈이 큰형의 주머니에서 슬쩍 꺼내는 것은... 다름 아닌 담배.... 잽싸구나... 역시..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야... 지훈이 눈을 찡긋하더니 나에게 담배갑을 휙 던졌다. 나는 엉겹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지훈이의 큰형이... 아직도 학교를 안 갔다니 그게 무슨 말.. 나는 고개를 쭈욱 내밀어 책상 위에 놓여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6시 50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시간은 넉넉... 아...아니... 뭔가 이상하다... 9시 반이다... 지각이다.... " 점심시간에 등교하는 것도 자꾸하면 습관든다구." 으음.... 어제에 이어 오늘도... 점심시간에 나란히 등교하게 된... 지훈과 나... 계속되는 장마 때문에 운동장에 나가지 못하고.. 교실과 복도에서 청춘을 불사지르는 녀석들 때문에.. 학교는 지금 당장이라도 주저 앉거나.. 소음들로 떠나갈 듯 하다. " ....나는 좋은데?" " 뭐가?" " .......오늘 지각한 이유는 따로 있잖아." " 으윽." 그의 말 뜻이 무엇인지 뒤늦게 알아챈 나는 우산을 휘둘렀으나 그는 잽싸게 피해버리며 웃었다. 아... 그의 웃음 소리가 좋아. 순간... 내 가슴을 파고드는 불길한 생각... 너무 행복해 하면 안돼... 나중에 불행이 한꺼번에 닥치면... 어떡하지? 아직... 악몽은 끝나지 않았어... 이번에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적어도.. 적어도.. 지훈이가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나는 참아낼 수 있어. 네가 언제나 내 옆에 있어준다면.. 그 고통 쯤은 견뎌 낼 수 있어. 네가 가해자가 되는 것은.. 어제 한 번으로 족하다. 네가 괴로워 하는 것은 절대 참을 수 없다. 너 역시..... 그렇겠지? " 지훈아." 나는 걷다말고 우뚝 멈춰 서서 지훈이를 불렀다. " ...응?" 지훈이가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 아..아냐." 나는 누가 볼까 주춤하다가 그의 손 끝만 살짝 잡고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응. 나도 너 좋아." 크윽... 정말... 넌 독심술을 하는 모양이야. <드르르르륵> 뒷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린다. 그도 그렇겠지.. 너희들도 조금 아리송 할거야. 어제 그의 얼굴을 후려친 녀석이 오늘은 다소곳이 손을 붙들고.. 헉.. 아직도 붙들고 있었던가... 다행히도 지훈이 손을 등 뒤로 돌려버린다. " 우아악! 너희들 도대체 뭐야. 어제도 이 시간에 나란히 들어왔으면서.. 오늘도냐? 이렇게 나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상상의 날개를 펼쳐야 한단 말이다.." 성혁이 갑자기 튀어나와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던진다. " ....쿡. 너 오늘도 미팅이냐?" 여전히 번질거리며 딱 달라붙어 있는 성혁의 머리를 보며 지훈이 말을 건넸다. " 당근이지. 여... 강은우. 오늘은.. 괜찮아 보인다. 기분 좀 풀렸어?" 성혁이 씨익 웃으며 내 오른팔을 정겹게 툭툭 친다. 그의 그 스스럼 없는 태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투를 흉내내 보았다. " 당근이지." 성혁은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 해 보였다. " 지훈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보는구나." " ......무슨 말이야?" " 아니.. 난 최근까지 난 은우가 이렇게 화끈한 성격을 가졌는지는 꿈에도 몰랐거든." " 화끈?" 아아.. 어제 책상을 발로 후려차고 지훈이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 말야? 그정도로 화끈이라니.. " 이럴 줄 알았으면 조심하는건데." " ...쿠쿡. 조심이라니." 맥 빠진 성혁의 과장된 한숨에 지훈이 웃었다. " 잘 보일걸 그랬단 말이야. 어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 아. 재준이에게 수첩을 돌려줘야..." 내가 책가방을 뒤적거리자.. 성혁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 참. 은우야. 재준이.. 오늘 결석이야..." " ......결석?" " 결석이라니?" " 몰라. 담임이 집에 전화하라고 해서 했거든?... 그런데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 나간다고 나갔다는데....." 성혁의 눈에 말할까 말까 하는 고민이 엿보인다. 뭔가 불안하다... 재준이... 가시를 세우며 덤벼들었던 낯선 나에게 지훈이 다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녀석. 반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까탈스럽게 굴기는 하지만.. 포용력도 넓고 무엇보다 선입견이란 것을 갖지 않는 아이. 성혁이가 목 안으로 자꾸만 삼키는 말이 나는 불안하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 계속 말해 봐." " ..........." 지훈이가 나의 손을 꽈악 움켜쥔다. 그래.. 너도 뭔가 불안한 거지? 너도 나도.. 재준이에게서 신세를 졌는데... " 재준이네 앞집에서... 여자애가 죽었대.... 나도 그 이상은 몰라."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나는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거야... 재준이가.. 재준이가... " ...그래?" 지훈이의 목소리가 의외로 태연하고 차갑다. " .....충격이 컸나보지... 앞집 여자애를 짝사랑이라도 했던가." " 그래." 나는 내 핏기가신 얼굴을 성혁이가 알아보지 못하길.. 간절히 바라며... 대답했다.. 설마.. 아니겠지.. 재준이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말도 안돼.. " 그래. 재준이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말도 안되지." 성혁이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 ..........성혁아." " 왜?" " ....은우랑 나랑.. 다시 조퇴다." " 헉.. 야.. 오자마자 가려구?" " ....재준이네 집에 가보려구." " 알았어." 성혁이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맙소사...." 나의 목소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우산을 들고 있는 손이 역시 떨려온다... " .........제길..." 지훈이의 목소리에서 억누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재준이의 집 앞 골목은 경찰차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경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뿌연 물 안개 사이로 경찰차가 뿜어내는 붉고 푸른 빛이 어지러이 춤을 춘다. 재준이의 앞집... 그 커다란 양옥집 2층의 한 창문에.... 레이스가 달린 예쁜 커튼이 흔들거린다.. 적갈색의 무늬가 어지럽게 그려진 채.. " 저 집이야...." " ..........응." 다시금.. 그 악몽이 머리 속에서 튀어나와 깔깔거리며 나를 비웃는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막을 수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면.. 당신을 구해줄 수 있었을텐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나의 악몽 속에 영혼을 빼앗긴... 당신에게.. 나는 그저 미안할 뿐이예요... " 네 잘못이 아니야." " ........알아. 그리고 네 잘못도 아니야." 순간...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낯익은 사람이 눈에 띈다. 검은 우산. 검은 양복. 마치 장의사 같다. " 어.. 지훈군과 은우군이지?" " 안녕하셨습니까?" 지훈이가 먼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 이런 우연이 있나.. 사건 현장에서 두 사람을 또 보다니." 형사가 아무런 의미 없이 건넨 것이 분명한 말...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이 분명한데도... 내 가슴이 섬찟하다. "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던가?" " 반 친구가 결석을 해서 보러 왔습니다." 지훈이 대답을 했다. 역시 저 형사를 상대하는 것은 지훈이에게 맡겨야 한다. " 반 친구?" 형사의 말투가 왠지 미묘하다. 나는 그가 이미 재준이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그가 학교에 결석했다는 사실도 알아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때.. 우리에 대해서 이미 알면서 질문을 했던 것처럼 말이지. 오히려 재준이를 감싸려고 얼렁뚱땅 둘러대면.. 일이 곤란하게 꼬여들어갈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는 악몽이라는 우리만의 비밀 말고도 세 번째 사건의 희생자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입장에서 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으므로... " 예." 별 다른 말없이 지훈이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 아아.. 저 집에 사는 재준이라는 학생 말이지?" 역시.. 그는 알고 있었어.. 늘 저렇게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것은... 역시 직업 탓일까? " .......이번에는 누가 어떻게 살해당했습니까??" 내가 묻지 못한 것을 지훈이가 물었다. 그는 확인하고 싶은거야. 내가 묻지 못한 이유는... 네가 또 그 악몽을 떠올리며 괴로워할 것 같아서 물어보지 않았는데... " 궁금한가?" 형사가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 예." " 지훈군. 자네 혹시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일치감치 포기하게.. 정말 권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야." " 아직까지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다만 궁금할 뿐입니다." " 음.... 뭐.. 어차피 신문에 대서특필 될테니... 살해당한 사람은 16살 여자애이네." 아.... 16살... 우리보다 두 살 어리다... 두 살이나 어리다... 그런데... 죽어버렸다... 16살에... 죽어버렸다... " 무기는 여전히 손도끼.. 하지만 살해도구는 두 번째 살인과 동일패턴으로 주변의 물건을 이용했네." 그래... CD 말이지. " 일단 목에 상처를 낸 뒤 CD를 박아버렸어. 미친 놈 같으니.. 악마가 분명해.." " ............." " 목 뿐만이 아니야.. CD 50장을 아주 다 써버렸더군. 직접적인 사망사유는 목의 상처라네." 우리가 꿈에서 깨고 난 후에도 그 미친 짓거리를 계속 했다는 이야기이다.. " 그리고............... 살해하기 직전에 한번.. 살해하고 난 후에 한번... 강간했어." 미쳤어.. 정말 미쳤어... 악마가 아니고서야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어.. 그래. 그 만화책 속에 나오는 요한처럼.. 너는 정말 "괴물"이야. 갑자기 형사의 지친 듯한 눈이 묘한 빛을 발한다. " 난 말야... 사실 이번 사건 때문에 목이 간당간당 하다네... 아주 미치고 팔짝 뛰어버리겠어. 이 무식하고 미친 살인마 녀석은.. 말 그래도 미!친!놈! 이야.. 그런데 말이지... 미신이랄까... 뭔가 내 육감을 자극한다네..." 형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 형사가 육감 따위에 연연해 하는 것은 사실 아주 안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뭔가 감이 온단 말이야. 자네들에게서..." "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지훈의 목소리가 지극히 사무적이다. " 아하. 사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하여간... 나는 이번 일에 자네들이 목격자만으로 관여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런 묘한 생각이 든단 말일세." " 저희가 살인자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내 목소리가 독기로 카랑카랑하다. " 오해하지 말게.. 나는 그저 자네들이 이번 사건에 해결실마리를 안겨 줄 열쇠같다는 말을 했을 뿐이야. 그냥 감일 뿐이니 신경쓰지들 말라구." 신경쓰지 말라구? 신경쓰지 말라구?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의미심장한 말을 해 놓고서 신경쓰지 말라구? 지금 누굴 가지고 노는 거야? " 저희를 과대평가 하셨습니다. 어쨌든 저희가 형사님에게 뭔가 도움이 되었으면 싶군요." " 아.. 그럼 이거 한 장 주어야지." 형사가 자신의 양복 안 주머니를 뒤적뒤적 거리더니 구깃거리는 명함 한 장을 내민다. 나는 그것을 받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 그럼 이만." 형사는 우리 둘을 향해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종종 걸음으로 가버렸다. " 뭔가 알고 있는 걸까?" " .......그럴 리가 없지." " 그런데 말하는 것이 이상해." " .......우릴 떠보는거야. 말은 저렇게 해도 우리를 절대 믿지 않아." " 하지만... 그 감이라는 것 말이야... 나도 처음에 저 형사만 유독 신경에 거슬렸거든... 육감이라는 것이 정말로 있다면 말이지... 우리도.. 저 형사도.. 남들보다 조금 더 발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 ....아마 퇴화가 덜 된걸 거야..." " 여하튼... 재준이네 가보자."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재준이네 집에는 할머니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았다.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재준이가 평소와 다름없이 등교를 했다는 것과... 재준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는 친구의 전화가 왔다는 것.. 경찰이 다녀간 것... " 저희가 재준이에게서 수첩을 빌렸거든요? 재준이 방에 가져다 놓을게요." 손자의 친구들에게 뭔가를 대접하기 위해 주방으로 가시는 할머니께 내가 물었다. 일부러 타이밍을 맞추어 말한 것이다. 재준이 방을 보기 위해서 말이지.. 왜? 그냥 뒤져보기 위해서? 뒤지다 보면 도끼라도 나올까봐? 모르겠다.. 모르겠다.. 그냥 내 머리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이다. 재준이의 방에 가서.. 확인해야 해. 무엇을? <재준이 방으로 가 그것을 확인하고 와야 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티끌과도 같은 실마리.. 그것을 찾아내야 해. 그리고 그것이 재준이의 방에 있다. 또 다시 나의 미신적인 집착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재준이 방으로 가 그것을 확인하고 와야 해> " 그러려무나." " 재준이 방이 화장 실 앞이지요?" " 아니. 그 옆 방이야." 나는 지훈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무엇을 찾아냐 하는 지.. 확인해야 하는 지.. 모르겠어.. 알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래도 봐야 해... 지금 당장이 아닌.. 나중을 위해서 말이지. 재준이의 방을 열었다... 남자 녀석 방치고... 무섭도록 깔끔하다. 정리정돈이 칼처럼 되어 있다. 지훈이 역시 놀란 모양인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의외로 작은 방이다. 방의 오른 편에 침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앞의 벽에는 작은 창이 있고 그 아래에 책상이 놓여 있다. 그 책상은 앞 쪽에 책꽂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옆의 벽면에 책꽂이가 있고 책꽂이와 서랍장 위에 넓은 판을 올려 책상을 이루는 요즘 유행하는 책상 스타일이다. 벽 왼편에는 커다란 책장이 두 개나 있다. 그리고 책으로 한가득 들어 차 있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는 녀석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책이 많을 줄은 몰랐다. " 학생들 과일 먹어." 할머니의 말씀에 나는 얼른 책상 위에 수첩을 올려 놓고 지훈과 방을 나섰다. 할머니가 내 오신 과일은.... 수박이었다.. 나는 수박하면... 연상이 되는 것이 있기에.. 특히 지훈이가 옆에 있으므로... 깨어진 수박... 손을 댈 엄두도 못내고 있다가... 할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 할머니... 재준이가 양손잡이 인가요? 그가 왼손을 쓰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어... " 아구. 그 녀석이 아직도 왼손을 쓰는가?" 할머님이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다. " 어렸을 때 왼손잡이여서 말이지. 내가 그거 고치느라구 얼마나 진땀뺐는지 모를 것이여. 옛 말에 왼손을 잘 쓰면 부정탄다고 했구먼." 나는 이 곳에서 무엇을 확인하려고 했던 걸까... 재준이가 왼손잡이였다는 걸? 수박이.... 매우...... 쓰다....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 재.........." 말을 꺼내는데 목이 콱 막혀 온다... 치닫는 감정들로 인해 가슴이 아려온다... " 재준이가 .... 양손잡이... 였다니...." 쏟아지는 빗줄기가 왠지 야속하다.. 차라리.. 해가 쨍쨍하게 빛나 이대로 나를 녹여버린다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내 뇌를 흐물흐물하게 녹여버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 .......엉뚱한 생각하지마...." 지훈이가 손을 뻗어 나를 와락 안았다. " ........엉뚱한 생각하지마.. 은우야. 성혁이 말대로.. 재준이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 그래.." 내 손에 들린 우산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지 오래..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던 말던 상관없다... 당신들은... 내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 내 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벅차다... 지훈이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 .........일단 어디라도 들어가자." " 어디?" " .....글쎄... 뭐라도 먹어둬야지.." " 밥은 먹기 싫은데... 그럼 찻집갈까?" " ....찻집?" 그의 묘한 목소리에 얼굴을 들어보니.. 그가 눈썹을 치켜올린 채 웃음을 참고 있다. " 왜?" " ....커피숍 말이야?" " 응." " .....다방도 아니고 왠 찻집이야... 커피숍을 찻집이라고 하는 사람은 첨 봤다." " 찻집이 뭐 어때서. 주로 차를 파니까 찻집이지..." " ..쿠쿡.. 그래. 찻집가자." 사실... 내가 가자고는 했지만... 남자 둘이 이런 데에 온다는 것은.. 조금 쑥스러운 일이다. 중학교는 벌써 하교시간이었는지 드문드문 여중생들이 모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음... 그 애들이 문을 열고 들어서는 우리를 쳐다본다.. 아니 째려보는 것 같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볼 필요는 없잖아. 요새 여중생들은 분식집에 안 다니나? " ....저기 가서 앉자." 지훈이 창가 맨 구석 진 곳을 가리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 꺄아." 여중생들 있는 곳에서 작은 탄식이 나온다. 뭐...뭐야. 너희들... 나보다 어린것들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시선은 무엇이냔 말야. 흘긋 주변을 돌아보니... 대개가... 남녀 커플이 아니면... 여자들끼리다... 역시... 남자 둘은... 아무도 없다.. 저기 저... 커피를 시켜 놓고... 서류 더미와 싸우는 회사원 둘은 제외하고 말이지.. 갑자기 지훈이 내 팔을 붙잡고 서서 여중생들이 있는 쪽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더니. 헉!!!! "흥!" 하고 콧방귀를 낀다. 그...그런 어린 아이 같은 짓을 하다니.. 아...아니.. 그런 대담한 짓을 하다니.. 마치.. 뭘 넘봐... 라는 투잖아.. 그런데... 난감한 것은... 그래도 뭐가 좋다고 꺅꺅거리는 그녀들..... 너희들... 도대체 무엇을 상상하고 있느냔 말이다... " ....뭐 먹을래?" 자리에 앉은 지훈이 나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물었다. 으윽... 그녀들의 수근거림이 귀에 거슬린다. " ....신경쓰지마.." 지훈이 손을 들어 내 앞 머리카락을 부비부비 흩어 놓으며 말했다. 에라... 뭐. 어떠랴.. 다른 사람도 아닌 지훈이랑 같이 인데.. 뭐가 창피하다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이 귀에 걸릴 듯 씨익 웃었다. 역시... 먹는 것은 즐거워... " 나 돈 별로 없어. 이번 달엔 생활비 적자야." " ....내가 먹자고 했으니 내가 살거야. 너 먹는 건 모두 내가 책임질거야. 이 비실아." " 뭐? 비실이?" 내가 어딜 봐서 비실이라는거야. 진짜 마르고 작은 녀석들 옆에 서면. 한 체격 한다구. 키 크지. 근육 적당하지. 무..물론 너에 비하면.. 순간.. 윗도리를 훌렁 벗어 던지던 지훈이가 떠오른다... 음... 너에 비하면.. 빈약하지.. " 흐음~ 네가 내겠다 이거지.." 나는 고양이가 씨익 웃듯... 뭔가 계략을 품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 뭐 드시겠어요?" 오옷! 아르바이트생인 듯한 누나는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흐흐흐.. 지훈아... 속 좀 타봐라.. " 어? 예쁜 누나네. 꼭 내 타입이다." 순간 지훈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는 다 알지. " ....뭐 먹을거냐잖아." 반응이 바로 나온다. 그 열받은 것을 꾹꾹 누르는 듯한 무뚝뚝하고 차가운 목소리.. 얼굴을 발그스름하게 물들인 긴 생머리 누나가 어쩔 줄을 몰라한다. 뭐.. 예쁘다는 말이 빈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누나에게 좀 미안하다... 지훈이 때문에.. 이 누나를 이용한 것이.. 좀 죄스럽다. " 음... 과일빙수하고요. 초코파르페. 아이스 티. 생과일 쥬스는 키위로요. 참. 예쁜 누나. 서비스로 빵 좀 많이 가져다주세요." 누나의 눈이 둥그래진다. 아앗... 좀 많이 먹지요? 네에. 하고 예쁘게 웃으며 열심히 적은 뒤 돌아서는 그 누나를 향해 지훈이 퉁명스레 말한다. " ...나는 주문 안 받아요?" " 예? 아... 같이 주문하신 줄 알구." " ....냉녹차랑.. 냉수요. 얼음 잔뜩 넣어서." 지훈이가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한다. 왠지... 기분이 무척이나 좋다. 후후후. " ......................" 지훈이 담배를 입에 문다.. 크.. 얼굴이 정말 기가 막힌다... 열 받아 죽겠지? 너 전생에 장희빈 아니었냐? 뭔 남자 자식이 그리도 투기가 많아? 옛부터 아낙네의 투기는 칠거지악이라고 했느니.. " 저 누나 이쁘다. 그렇지?" 아무것도 모른 척. 내가 입을 열자... 간신히 평정을 되찾아가던 지훈이의 얼굴이 또 다시 굳어진다. 녀석... 열 받아서 평소의 독심술은 다 날려버렸나 보다. 지훈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아니... 아니... 내가 널.. 얼마나.... ...하는데... 그래... 나는 널 .... 하고 있어. 널 ....하고 있어.. " ...그래. 이쁘다.." 지훈이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담배를 뻑뻑 피우며 중얼거렸다. 지훈이는.. 정말... 덩치 큰 강아지 같다... 주인을 무작정 신뢰하며 그의 사랑은 자기가 독차지 한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다른 강아지에게 손만 내밀어도 안절부절 불안해하는... 아무래도 난 너에게 꽁꽁 묶여 있어야 하나보다. " 나는 저런 여자가 좋더라." " .......................그래." 지훈이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음.. 내가 조금 심했나.. 싶다. 그렇게 복잡하고 풀 죽은 얼굴을 하면... 내가 미안하잖아. 그럼 이 쯤에서 끝내자.. 사실.. 내가 너에게 폭탄선언을 할건데... 이 정도는 당연히 애간장을 태워야지.. " 그런데 말야." " ...................응." 지훈이 여전히 나를 보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내 말이라고 꼬박꼬박 대답한다. " 아깝다." " ..........뭐가."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저 누나는 그냥 좋아하는 걸로 끝내야겠어." 으으으으으윽!!!!!! 낯간지러운 소리는 정말 못하겠어... 어서 누가 대패 좀 가져와 봐. 이 닭살 다 밀어버리게... .......................... 그런데... 아마.. 앞으로 여자에게 이런 말 못할거야... 할 기회도 없을테지만... 그 누구에게도 하고 싶지도 않아.. 오직.. 너에게만.. 너에게만이야.. " ........................" 지훈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그래. 네 눈이 좋아. 그 깊은 눈빛이 좋아. 그리고.. 네 모든 것이 좋아. 그래서 너를.. 너를 사랑해. " .....장난치지마. 앞으로... 이런 장난치지마. 가슴이.. 미어지는 줄 알았어." 지훈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내가 어렵게 고백했는데 지금 그걸 장난이.......라..고... 어엇? 너... 갑자기... 왜? 지훈이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더니 나의 턱을 잡고서 길게 입을 맞추었다. " 꺄아악" " 키스했어! 키스했어!" " 엄마야! 멋지다!" " 죽인다! 실사다!" 어이... 뒤에 앉아있는 깜찍하다 못해 끔찍한 여동생들아... 어째서 비명을 지르며 박수를 치는 거야.. " ...한번만 더 다른 사람이 좋다는 둥 장난치면 늘 이렇게 벌 줄거야." 지훈이 쿡쿡 웃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주 느긋한 태도로 말이지. " 흥. 그럼 시도때도 없이 장난쳐야지." 크윽... 나는 내 입이 정말 싫다. 앞으론 절대 장난치지 말아야지.. 라고 말해야 정상이란 말이다...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대패가 아니라.. 실과 바늘이야.. 이 입을 정말 꿰매버려야지. " 여기 있습니다." 그 긴 생머리 누나가 탁자 위에 주문한 것들을 올려놓는다. 나와 지훈을 번갈아 보며 배시시 웃는다. " 많이 먹고 힘내요." 빵이 수북히 쌓인 바구니를 내 앞에 놓으며... 그녀가 말하는데.. 뭔가 어감이 이상하다. 힘 내라니? 무엇을? 왜? 누나... 왜 그런 말을 하지요? 앞으로 여기 자주 와야... 아니 두 번 다시 오지 말아야겠다. " 우욱...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지훈이가 펴서 건네주는 우산을 받아들며 내가 중얼거리자.. 그가 쿡쿡 거리며 웃는다. " ....그러길래 내가 적당히 먹으랬지?" " 돈 주고 먹는 건데 남기면 아깝잖아." " ....그렇다고 그걸 다 먹어? 서비스로 나온 빵까지 네가 다 먹었잖아." " 먹고 힘 내라잖아." " ....흐음." 지훈이 우산을 쫘악 피며 피식피식 웃는다. 음... 또 내 무덤을 내가 팠도다... 아직도 허리고 어디고 안 아픈데가 없는데... " 오늘은 안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지훈이 능청스럽게 웃는다. " ..........뭘?" 그래.. 말한 내가 멍청이지.. 내가 입을 다물어야지.. " ....그럼 소화도 시킬 겸 성혁이네 집에나 갈까? 지금쯤 돌아와 있을 텐데. 여기서 성혁이네 가까워. 성혁이에게 할 말도 있구." " 성혁이네?" " .....응. 성혁이 재준이랑 꽤 친하거든.. 어찌된 일인지.. 궁금할거야. 혹시 재준이가 성혁이한테 연락했을 수도 있구." " 나. 성혁이네 가본 적 없는데...." " ...괜찮아. 그 녀석 사람 가리고 그러는 애 아니야. 물론... 다른 것은... 신중하게 고르지만..." " ?" " ......가자. 은우야." 지훈이가 갑자기 씨익 웃더니 자기 우산을 접어 버린다. " 가자며. 우산은 왜 접어?" " ....같이 쓰고 가자." 허억... 덩치 큰 남자애 둘이서 이 쬐끄만 우산을 같이 쓰고 가자구? " 다 젖어." " ...... 이렇게 꼭 붙어서 가면 되지." 지훈이가 내 우산을 덥석 잡더니 나를 한쪽 팔로 꼭 안아든다.. 엉겁결에 그의 겨드랑이에 꽉 끼어버린 나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 내가 못 살아. 정말..." " .......나는 좋기만 한데." 결국엔.... 순순히 따르고 말았다. 원.. 이거 민망해서... 그렇지만... 뭐... 나도 나쁘진 않아. 솔직히 말하면... 나두 좋기만 한 걸. " 어라? 너희들 무슨 일이냐? 둘이 나란히." 문을 열어준 성혁이 우리를 보며 낄낄거렸다. " ......놀러왔다." " 영광일세. 들어 와. 집에 아무도 없어." "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 크윽. 실례는 무슨. 어서 들어 와." 성혁이네 집도 역시 양옥집이다. 이 동네가 다 그렇지만. 역시 재준이네 집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좀 서늘하지? 에어콘을 너무 세게 틀어 나서.. 내 방으로 가자. 거긴 덜 추워." 성혁이의 뒤를 따라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좀 서늘하냐구? 이건 완전히 한 겨울이다. 전기세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에어콘을 이렇게 쌩쌩 틀어 놓는 거야? 역시.. 잘 사는 집은 다르구만... 돈 걱정 안 해서 좋겠다.. 나는 이번 생활비 감당하기도 힘들어 죽겠구만.. 그런데... 추운 것과는 다른... 썰렁한 느낌... 오랫동안 사람이 없었던 것 같은.... " 너 혼자 살아?" 그런 기분이 들었던 탓일까? 나는 성혁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 이런 큰집에서 혼자 사는 사람도 있냐? 나 갑부 아냐. 부모님이랑 같이 살지. 맞벌이셔." 아.. 그래. 그래서... 집이 빈듯한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성혁이 갑자기 문 앞에 서서는 머리를 긁적인다. " 이해 좀 해라. 남자애 방이 다 이렇지만..." 문을 여는데... 크윽... 아무리 남자 방이라 해도 이건 좀 심했다... 방에 발 디딜 틈이 없다. 피자 상자와 과자 봉지. 음료수 패트 병들이 바닥에 즐비하고.. 책꽂이에 제대로 꽂혀 있는 책이라고는 몇 권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은 만화책. 성혁이 방 역시 춥기는 매한가지다. 그런데도 게임을 얼마나 해댔는지 컴퓨터 열 식히느라 선풍기를 컴퓨터 앞에 두고 있다. " 무슨 게임하고 있었어?" " 디아블로 새로 나왔잖아. 으악.. 요새 밤 새워 하는데 장난 아니다. 완전히 중독이야. 레벨 29의 파라딘 실체가 뭔지 아냐? 완전히 단순한 인간백정이야." " ................어지간히도 했구만." " 잠깐만 기다려. 내가 마실 것 가져올게." 성혁이가 방을 나서고 난 뒤 나는 그의 책상에 앉아 게임 CD 들을 뒤적거려 보았다. " 우와. 성혁이 녀석. 게임광인가 보네." 성혁이 침대에 걸터앉은 지훈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고보니 재준이의 방구조와 거의 똑같은데... 지저분하기는 돼지우리가 따로 없다. " 와. 방이 완전히 도깨비 소굴이야." " ............한달은 넘게 안 치운 것 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훈이 옆에 앉아 처음 온 녀석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역시 집 구조가 같다 보니.. 가구를 놓는 배치도 같을 수 밖에 없다. 재준이의 방을 보고 나서 그런지.. 방 구조가 똑같은 성혁이의 방이 낯설지 않다. 책상은 오른쪽 벽에 붙어 있고 역시 침대도 오른 쪽에.. 왼쪽에는 커다란 책장 하나와 컴퓨터가 있다. 그러고 보니.. 재준이 방에는 컴퓨터가 없었다. 아.. 그런데.. 정말로 지저분하구만.. " 우아아아. 많이 기다렸지?" 성혁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그래도 손님 대접한다고 쟁반에 커다란 머그잔 세 개를 얌전히도 들고 왔다. 게다가 어울리지도 않게 하나는 앙증맞도록 귀여운 곰돌이가 목에 리본을 맨 채 뒤뚱거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 마셔 봐. 맛있다구." 성혁이가 곰돌이 머그잔을 들었다. 갑자기 저 녀석 취향이 저렇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보기보다 귀여운 녀석일세. " .......뭐야. 이 꿀꿀이 죽은." 지훈이가 컵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물었다. " 헉!!! 꿀꿀이 죽이라니. 미숫가루 탄 거야. 바나나에 우유 넣고 설탕 넣고 미숫가루 잔뜩 넣고. 얼마나 맛있는 줄 알아? 나의 성의를 무시하다니... 쩝." 그러나.. 역시 모양새는 영락없는 꿀꿀이 죽이다. " ......알았어... 먹어는 주마." 지훈이 떨떠름한 얼굴로 머그잔 안의 내용물을 마시다가 얼굴을 찡그린다. " .......설탕을 얼마나 넣은거야?" " 달아야 맛있지." 성혁이 홀짝홀짝 잘도 마신다... " 나는 도저히 못 먹겠다. 너희 집에 오기 전에 잔뜩 먹었거든." " 뭘 먹었는데?" " 과일빙수. 초코파르페. 아이스 티. 키위 쥬스." " ......그리고 빵 여섯 개." " 둘이 같이?" " ..........나는 냉녹차 한 잔 마셨다." 성혁이가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배를 잡고 웃는다. " 엄청나게 먹는구나?" " 배가 고팠을 뿐이야." 젠장... 빵 이야기는 하지 말지.. " 아... 참.. 재준이네 집에는.... 잘 다녀왔어?" 성혁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갔더니 할머니만 집에 계셨어." " 별 이야기는 없구?" " 응. 그냥 재준이 걱정만 하시더라구." 성혁이에게 세세한 것까지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그 나무꾼에 대한 정보는... 지훈과 나와의 악몽에서 대부분 얻은 것이니까... " 재준이... 아무 일 없을 거야..." 성혁이가 우리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 .........낮에도 말했지만 충격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했을 거야. 곧 돌아오겠지. 어쩌면... 어젯밤에 뭔가를 봤을 수도 있지." 지훈이... 차분한... 그러나 섬뜩하리 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 ...........그것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구." 지훈이가 텅 빈 머그잔을 성혁이에게 내밀었다. " .......먹긴 먹었다만.. 앞으로 손님에게 내놓는 건 좀 자제해라. 정말.. 꿀꿀이 죽 같아..." 성혁이가 오른 손을 내밀며 그 잔을 냉큼 받아들었다. " 쳇. 다들 맛있다고 했다구." " ............예의상 한마디 한 걸 가지구." 지훈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 난 본 것만으로도 배부르다." 내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성혁이 킥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 네 배는 이미 불러 있잖아." " ..............어쨌든 잘 먹었다. 은우야. 일어나자." " 벌써 가게?" 성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 .....은우랑 집에 가서 단 둘이 할 일이 좀 있거든." 지훈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중얼거렸다. 순간 성혁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허억... 너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거냐. " 아.. 지금까지 밀린 공부를 같이 할까 해서." 내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얼른 대답을 했지만.. 그래.. 너의 그 커다란 상상의 날개를 꺾기엔 이미 늦어버렸지... " 으흠..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뭐냐.. 너 역시 그 의미심장한 웃음과 말투는... " ................참. 재준이에게서 혹시 전화오면... 우리에게 알려 줘." " 알았어... 그런데 녀석이 전화를 할 지 모르겠다.. 은우 집으로 갈거지?" " ...........아니. 우리 집에 갈 거야. 누나랑 형들에게 은우 좀 당분간 봐 달라고 해야겠어." " 그래?" 성혁이 말꼬리를 올린다. 저 녀석.. 또 속으로 키득거리고 있겠군.. 성혁이의 집을 나서자마자 나는 불만을 터트리며 씨근덕거렸다. " 너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하는거야?" 지훈이가 또 능청스럽게 웃는다. " ....뭘?" " 집에 가서 단 둘이 할 일이 있다느니!! 너희 집에 가서 식구들에게 날 봐달라고 한다느니!! 성혁이가 오해하잖아!" " ......오해?" 지훈이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나를 살며시 껴안는다. " ....난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을 뿐인걸? 그리고 성혁이 녀석 워낙 눈치가 빨라서 내가 말 안해도 대충 짐작하고 있다구." " 됐어. 너랑 말하는 내가 바보지." 나는 괜시리 화를 내며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와 내 우산을 파악 펼쳤다. " 우산 따로 쓰고 가." " ................." 지훈이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미소짓는다. 가슴이 왠지 아리다... 왜? 왜? 비 소리가 요란하다... 장마는 도대체 언제나 끝날까... 우리의 악몽도 언제나 끝날까... 서로 아무 말 없이 우산을 쓴 채 나란히... 걸었다. 꽤 오랫동안 걸어왔다 싶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지훈아.. 너희 집 가는 길에.. 우리 집.. 아니 내 방 있으니까.. 들렸다 갈까?" 가서 무얼하자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냥... 그냥..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였다. 지훈이가 또 나를 향해 다정히 웃는다. "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우리 집에 가 있어." ....그럼.. 하는 수 없구... 그런데... 가 있으라니? 너희 집에 가 있으라니? 같이 가는 것 아니었어? " 너는 안 가?" " ..............아. 그게 지금 방금 생각이 났는데 아무래도 성혁이 침대 위에 지갑을 두고 온 것 같아. 아까 커피숍에서 계산 한 뒤에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지금은 없다." " 칠칠맞기는... 지갑 좀 잘 챙겨. 같이 가자." " ....아니. 금방 다녀올게. 너는 먼저 집에 가 있어. 가서.. 우리 큰형 좀 잘 구슬려 봐." 지훈이 쿡쿡 거리며 웃는다. " 구슬리다니 뭘." " .....형이 널 여자로 오해하고 있잖아." " 멍청아! 나보고 뭐라고 말하라는 거야? 형님 동생과 침대에서 발가벗고 맨 몸으로 뒹굴던 사람은.. 바로 접니다!! 라고?" " ...쿠쿡.. 그러면 나야 더 좋지." 내가 너와 말을 말아야지... " 몰라. 어쨌든... 그럼 먼저 가 있을게.." 내가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지훈이가 우산을 낮게 내리면서 나를 잡아끌었다. " 왜? 웁." 지훈이의 입술이 파고 든다. .... 달착지근한 바나나 향이 느껴진다... 보는 사람이 없을까.... 다행히 골목길에... 우리밖에 없었지... 왠지... 지훈이의 입맞춤이... 다급하면서.. 불안한 듯 느껴진다.. 왜 그래... 나 어디 도망 안가... 언제나 네 곁에 있을거라구. 그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에.. 이번에는 내가 먼저 조심스럽게 혀를 살짝 들이밀었다. 따뜻하다... 그리고 달콤하다... 한 손은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지훈이의 목을 껴안고... 지훈이 역시..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안고서... 물안개가 뿌옇게 올라오는 골목길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속에 서서... 오랫동안 서로를 느꼈다. " ..............하아..." 먼저 아쉬운 듯한 한숨을 내쉬며 지훈이가 입술을 떼었다. " 뭐야.. 갑자기.." 내가 달아오른 얼굴로 뚱한 목소리로 묻자 지훈이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내 입술에 엄지를 대어 닦아내듯 쓰다듬은 뒤 자신의 입술에 대고 문지른다.. 이제는... 그런 그의 행동이... 마치 무슨 의식 같이 느껴진다. 하나 하나의 움직임에 경건한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 .....이젠..... 가도...... 돼....... 우리 집으로... 곧장 가...." 지훈이가 느릿하게 말한다. " 응."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이상해... 이상해... 지훈이가 조금 이상해... 나는 몇 발자국 걷다 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퍼붓는 비 사이로 보이는 파란 우산. 그 파란 우산을 들고 지훈이가 그냥 서 있다. 나를 바라보면서... " 너도 어서 가." 내가 소리치자 지훈이가 대답 없이 고개를 그냥 끄덕이기만 한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 뒤... 한참을 걷다가... 이제는 지훈이도... 갔겠지.. 싶어 뒤를 돌아다보았는데...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파란 우산... 아직도 지훈이는 마냥 나를 지켜보고 있다. " 뭐하는 거야? 영화 찍냐? 빨리 다녀 와! 나 기다리게 하지 말구!!!" 이제는 어지간히 소리쳐서는 안 들리기에 목청을 돋구자 그가 손을 번쩍 들어 흔든다. 다시 돌아서서 막 발을 떼는데.... " 은우야!!!" 지훈이가 소리친다. 골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내가 돌아서니 지훈이가 또 소리친다. " 은우야!! 사랑해!!!" ............................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그러고보니... 내가 찻집.. 아니 커피숍에서... 그에게 말했을 때.... 그는 "나도" 란 말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 안 해도 아는데... 말 안 해도 알 수 있는데...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데... "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해!!!" 그의 외침은 거의 악에 가까워 내 가슴을 후려친다. " 죽긴 왜 죽어!!!!" 금기... 금기를 깬 듯한 기분... 그가 한 말이 절대로 깨어서는 안되는 금기를 깨어버린 듯한 기분.. 갑자기 불안감이 나를 뒤덮어서 내 목을 졸라댄다. 숨이 막혀.. 불안해.. 뭐야.. 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은. " 그만큼 사랑한다구!!!!" 지훈이 또 다시 악을 쓴다. 그리고는 손을 크게 휘휘 젓더니 뒤돌아서서 가버린다. 붙잡아야 할 것 같아.. 불안해.. 불안해... 뭐야.. 이 불안감은... 누구나 그런 말을 한다구.. 멋들어진 말을 즐겨 쓰는.. 상대가 낭만적인 환상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줄 아는 녀석들이... 즐겨 쓰는 말이잖아... 그래... 흔하게 쓰는 말이야. -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 그 말에... 담긴 저주 따위는 없어... 신데렐라를 도와주는 착한 마법사의 마법도 존재하지 않듯이... 공주의 생일을 위해 물레를 남겨두는 나쁜 마녀의 저주도 존재하지 않아. " 지..." 나는 그를 불러 세우려다가... 우산도 내던지고 그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내 다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그저 멍청히 서서... 이제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지훈이 뒷모습의 흔적을... 찾을 뿐이었다. " ..........." 멍하니... 멍하니.... 내 영혼은 지훈이를 따라 가 버렸는지... 멍하니 길을 걷고 있다가 문득 낯익은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나의 옥탑방이 있는 집에 다 와 간다. " 지훈이가..... 곧장 자기 집으로 가라고 했지...." 나는 웅얼웅얼 거리며 지훈이의 집 쪽으로 발검음을 옮기다가.. 목덜미가 섬찟한 느낌에 우뚝 멈추어 섰다. 분명... 분명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어. 등골이 오싹하다. 어두운 밤 불빛도 없는 골목길을 혼자 걷고 있을 때... 소리 없이 느껴지는 인기척. 머리를 감고 있는데 머리 꼭대기에서... 소리 없이 느껴지는 인기척.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등뒤에서... 소리 없이 느껴지는 인기척. 그것과 흡사한 느낌... " 누구야!!!" 냅다 소리를 지르고서는 그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잽싸게 튀어 달아난다. 니가 튀어봤자 벼룩이지!! 몸을 날려 그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비가 흠뻑 고인 물바닥에 나뒹굴었다. " 커억." 그 녀석이 숨이 졸리는 소리를 내뱉으며 발버둥쳤다. " 왠 놈..... 재준아?" 나에게 깔려 멱살을 붙잡힌 채 꺽꺽 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재준이였다... " 이 미친 놈아!! 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거야!!!" 재준이가 나무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잊은 채.. 나는 안도감과 반가움... 그리고 녀석에 대한 걱정으로 소리를 지르며 재준이의 멱살을 잡은 채 흔들어 댔다. " 수...수첩 돌려 받으러.. 컥.. 이것 좀 놔라!!" " 수첩?" 나는 그제야 흥분을 가라앉히고 재준이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 그리고... 좀 일어나 봐... 젠장. 너 때문에 옷 다 젖었잖아." 나는 깔고 앉은 재준이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 " 임마. 일으켜 줘야 할 것 아냐." 재준이가.. 손을 내민다... .....왼 손이다.... 왼 손을 내민다... 나는 다시 재준이에게 달려들어 그의 얇은 교복 셔츠의 오른 소매 부분을 걷어 올렸다. 계속 되는 장마 때문에 아침과 저녁나절이 쌀쌀하기에... 일부의 아이들은 반팔이 아닌 긴팔 소매의 셔츠를 입고 다녔다. 멀쩡해.... 멍 하나... 찰과상 하나 없다... 내가 그렇게 짓밟아 뭉갰었는데도... 재준이의 오른팔은... 매끈하다... " 갑자기 왜 그래? 미친 듯이 달려들지를 않나. 남의 소매는 왜 또 걷어 부쳐?" " 너 왜 도망가려고 한 거야?" " 소리를 빽 지르고 달려드는데 너 같으면 안 도망가겠냐? 나는 지훈이랑 틀려서 약골이란 말이야. 너한테 얻어 터지면 죽는다구!" " 학교는 왜 안 나온 거야! 나는 넌 줄 알고.. 넌 줄 알고..." "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죽었는데 학교가 무슨 소용이야... 하루 종일 미친놈처럼 돌아만 다녔다. 그런데.... 뭐가. 나란 거야?" 재준이가 투덜투덜 거리며 일어난다. " 그야..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당연히.... 뭐..... 네가 나무꾼인 줄 알았다구? 갑자기 머리 속이... 텅 비어버린 듯 하다... 그리고... 밀려들어오는 생각들... 경찰도 모르는 사실.... 지훈이와 나만 아는 사실... 그 살인마는... 우리 학교 학생... 같은 학년............ 누가... 그 잔인하고 무자비한 살인마가... 겨우 열 여덟의 남학생이라고... 상상할 수 있을까.. 지훈이와 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 그런데... 어째서.. 그런데... 어째서.. - 그래. 재준이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말도 안되지. - 성혁이는 어째서 그런 말을 한걸까.... 어떻게... 그 살인범이 우리 또래라는 걸 전제하에... 재준이를 떠올렸을까... 지훈이처럼... 그냥 충격 받아서 결석했을거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 참. 너희들. 그거 모르지. - 첫 번째 살인사건을... 맨 처음 알려준 것은 너였다.. 너는 그 사실을 어디서 그렇게 자세히 들었던 것일까... 오다가 들은 것? 경찰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있었을까? 그 이른 새벽에? - 뭐야. 어제 둘이 치고 박고 싸운 것 같아서 나는 기껏 니들 기분 풀어주려고 미팅 약속까지 잡아 놓았는데 꼬락서니들 하고는....- 학주에게 걸릴 것을 각오하고... 젤을 발라 붙여 넘겨버린 머리... 그건... 정말 미팅 때문이었니? 아니면.... 나에게 한웅큼 뽑힌 머리카락 자국을.. 감추기 위해서였니? - 당근이지. 여... 강은우. 오늘은.. 괜찮아 보인다. 기분 좀 풀렸어? - 그러면서 내 오른팔을 툭툭 치던 너.. 왜 몰랐을까... 내 오른팔을 치는 손은 네 왼손이라는 것을... - 아니.. 난 최근까지 난 은우가 이렇게 화끈한 성격을 가졌는지는 꿈에도 몰랐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조심하는건데. - 나의 그 화끈한 성격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야? 그 날 밤이니? 내가 너에게 덤벼들고 네 목을 물어뜯고 네 오른팔을 짓밟은 그 날 밤이니? 그래서 조심할 걸 그랬다고 그런 거야? - 무섭도록 춥던 성혁이의 집. - 그러고보니... 멋으로 또는 온도차가 심해서... 긴팔 교복 셔츠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집안에서까지 긴 팔을 입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에어콘을 끄고 반팔을 입지 않나? 그리고... 그리고... - 재준이의 방을 보고 나서 그런지.. 방 구조가 똑같은 성혁이의 방이 낯설지 않다. 책상은 오른쪽 벽에 붙어 있고 역시 침대도 오른 쪽에.. - 왜 몰랐을까? 왜 그 순간 바로 깨닫지 못했을까? 그 방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것을 왜 깨닫지 못했을까? 양손잡이라고는 하지만.. 왼손을 잘 쓰는 재준이.. 책상은... 오른쪽 벽에 붙어 있다... 그래야 왼손을 편하게 쓰니까... 그런데... 그와 똑같은 위치에 놓여 있던 너의 책상... 너 역시... 왼손을 쓴다는 이야기... " 야... 으..은우야. 너 왜그래? 어디 아파?" 재준이가 나를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한다. 내 머리를 적시는 빗줄기가 불같이 뜨겁다.. 속이 울렁거려... - .....충격이 컸나보지... 앞집 여자애를 짝사랑이라도 했던가. - 성혁이에 대답하던 차갑고 태연했던 지훈이의 목소리.. 유난히도 차가웠던 그 목소리... - ........엉뚱한 생각하지마.. 은우야. 성혁이 말대로.. 재준이는 그럴 녀석이 아니야.......- 넌 어째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지? 재준이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니? - ...괜찮아. 그 녀석 사람 가리고 그러는 애 아니야. 물론... 다른 것은... 신중하게 고르지만...- 무엇을? 무엇을 신중하게 고른다는거야? 희생자를 신중하게 고른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니? - .........낮에도 말했지만 충격 때문에 충동적으로 행동했을 거야. 곧 돌아오겠지. 어쩌면... 어젯밤에 뭔가를 봤을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구. - 차분했던 그러나 섬뜩하리 만큼 차가웠던 너의 목소리.. 그건... 성혁이를 자극하기 위한 말이었어? - .......먹긴 먹었다만.. 앞으로 손님에게 내놓는 건 좀 자제해라. 정말.. 꿀꿀이 죽 같아... - 그러면서... 성혁이에게 잔을 내밀었고... 성혁이는 오른 손을 내밀며 그 잔을 냉큼 받았지.. 왜 하필 오른 손? 그것은... 성혁이가 왼 손에 머그잔을 들고 있었으니까..... - ...........아니. 우리 집에 갈 거야. 누나랑 형들에게 은우 좀 당분간 봐 달라고 해야겠어. - 그건... 성혁이가 나를 한 번 노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래서 그렇게 말한 거야? - 우리 집으로... 곧장 가.. - 그래서... 그래서 내가 혼자 사는 그 옥탑방으로 가지 말라고 한거야? 너희 집 식구들과 같이 있으라고 한거야? 너는 확인하기 위해서 갔던거야!!!! 알고 있었어!!! 성혁이가 범인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어!!! 아까 그의 집에 들린 것은... 성혁이가 범인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한 거였어!!!! " 우우욱!!!" 울음이 터져 나온다... 누가 나를 붙잡고 왜 그러냐고 소리치고 있어.. 누구? 누구야? 누군지 모르지만 가서 지훈이를 데리고 와줘... 내 앞에 데리고 와줘... 제발 부탁이야.. 지훈이를 내게로 데리고 와 줘.. 너의 그 다급하고 불안했던 입맞춤.... 그 경건한 의식과도 같았던 행동.... - 은우야. 사랑해 - -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해 - - 그만큼 사랑한다구 - " 꿈이야...." 내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아련히 들어온다... " 이건 악몽이야..." 그래.. 누가 제발 악몽이라고 말해줘... 그냥 꿈이라고 말해 줘.. 현실이 아니라고 제발!! 제발!! 말해줘... 제발 말해줘... 부탁이야.. 이렇게 빌테니까.. 이렇게 빌테니까.. 무릎을 꿇어서 이렇게 빌테니까.. 그냥 꿈이라고 말해줘... 깨어나면 사라지는 기분 나쁜 악몽이라고 제발!!! 말해줘!!! - 은우야. 사랑해 - -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해 - - 그만큼 사랑한다구 - 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 그냥.. 악몽일 뿐이라구... 꿈에서 깨어나면.. 그만이라구... 말해 주지 않아? 늘.. 악몽에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지금처럼... 그 악몽이... 간절한 적이... 없다.... 누가.... 나 좀... 도와 줘..... 도와 줘................ 도와 줘................... 지훈이를................... 나에게 데리고 와줘....................... ........................제발................................................제발...............................................도와줘.................. #################################################################################### # N. O .B # - Nightmare Of Boy -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를 옭아매는 이 빌어먹을 현실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몽이 아닐까...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악몽의 끝이 또 다른 악몽의 시작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이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인간은... 그저 늘 도움만 바라는 자... 손과 발만 휘적거리면 얼마든지 빠져 나올 수 있는 물에서조차... 꼼짝도 하지 않는 채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어리석은 사람...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바라며 흐느끼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해 보았을까... < 일어나 > 일어나. 강은우. 이 물구덩이에 주저앉아 목 놓아 울지 말고. 지금 당장 일어나.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넌 영원히 지훈이를 잃게 될 거야. 넌 영원히 미쳐버리게 될 거야. < 일어나 > " c8!!! 도대체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일어나! 일어나서 머리를 굴려!! " 뭘 어떻게 해야 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네 육감이 시키는 대로... 너의 몸을 이끌어.... 그래. 나의 몸을 이끌테다... 지금 이 순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 지금 이 순간.. 지훈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하나뿐... " 제길. 제길.. 뭘 어떡해 해야 하지?" 내가 손을 벌벌 떨며 일어나 중얼거리자 재준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 으..은우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 재준이에게 늘 신세를 지고 있어 > " 그래. 그래서? 이 녀석에게 뭘 어떡해 하라는 거야!!" 나는 내 안에서 나를 이끄는 또 다른 존재에게 소리쳤다. 늘 그렇게 어정쩡한 대답만 하지 말고 확실한 정답을 가르쳐 달란 말이야!! 내가 재준이에게 뭘 부탁해야 하는데!!! < 모든 것에는 나름대로 쓰임새가 있는 거야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재준이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뒤로 움찔움찔 물러서는 것이 보인다. 그래.. 네가 보기에 나 미친 것 같아? 미쳐버렸으면 좋겠어!!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러면 안돼. 안돼. 왜냐면... 왜냐면... 지훈이를 두고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야. < 예를 들면.. 한낱 작은 종이 조각이라 할 지라도 > 순간 내 머리 속에 번뜩이며 떠오르는 기억. 나는 정신없이 내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빗물에 젖어 구깃구깃 구겨지고 찢어지기 일보 직전인 작은 명함이 나왔다. " 이걸 말하는 거였군. 진작 명함이라고 말했으면 좀 좋아!!!" 마치 유령에게 지껄이는 듯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떨까? 겁에 질린 재준이의 얼굴을 보면..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 재준아!!" 내가 그를 부르자 재준이는 질겁을 하면서도 다시 내 쪽으로 걸어왔다. "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이 전화번호로 전화해. 형사가 받을 거야. 강은우가 시켜서 했다고 하고 최지훈이 위험하다고 말하면 돼. 그리고 지금 당장 경찰들 데리고 성혁이네 집으로 가라고 해. 주소는 네가 가르쳐 줘. 알았어? 내 말 똑바로 알아들었어?" 재준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꽈악 붙든 채 재준이의 눈을 응시하며 소리쳤다. 재준이는 마치 최면에 걸린 몽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아.. 공중전화. 형사. 네가 시켰고 지훈이가 위험해. 경찰들 데리고 성혁이네 가야 해. 그렇지?" " 그래. 어서 가! 당장에 가서 전화해!" 재준이의 뺨을 두들기며 호령하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나를 흘끔 바라본다. " 넌 정말 10새끼야." 재준이가 불안하고 초조한 표정으로.. 그러나 뭔가 굳게 다짐한 얼굴로 미소 짓는다. " 알고 있어." 빗속을 철퍽철퍽 달려가는 재준이.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정말 10새끼야.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질질 짜는 어리버리한 놈보다는.. 차라리 그 편이 훨씬 낫다구. " 이제 뭘 해야 해!!!"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손이 나의 가슴속에 쑤욱 들어와 심장을 와락 움켜쥐어 마구 뒤트는 듯한 아픔. 내 안의 뭔가가 죽어간다.. 아니 내 영혼의 일부가 죽어간다. 이것은 일종의 예지일까? 견딜 수 없이 나를 조여드는 불안감에 나는 온 몸이 터져 나갈 것 같다. < 그가 위험해 > " 알고 있어!! 지훈이가 위험한 것 알고 있단 말이야!! 어떡해 해야 하는지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네 놈이 내 손에 잡히면 목을 비틀어서라도 대답을 토해내게 하고 싶다. 묻는 말에나 대답하란 말이야!!! 어떡해 해야 해? 그 다음은 어떡해 해야 해!!! < 시작된 곳에서.. 끝을 맺어야지 > " 시작된 곳이라니? 거기가 어디야?" < 시작된 곳에서.. 끝을 맺어야지 > "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란 말이야!!!" < 너의 세계. 맨 처음 시작되었던 곳 > " 첫 번째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 거기는 너무 멀어! 거기까지 갔다간 지훈이가.. 지훈이가 어찌 될지 모른단 말이야!! 거기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 < 너의 세계. 맨 처음 시작되었던 곳 > " 그래.. 그래. 지껄여라... 뭔 말인지 알아야 가든가 말든가 하지.." 그 의미도 알 수 없는 말을 되풀이하며 나는 머리를 움켜 쥐었다. 제발 이런 선문답을 집어치우고... 제대로 알려달란 말이야... 문득 입술을 질근질근 피가 나도록 씹으며 고개를 들다가... 눈에 띈 것은... 위에 보이는... 옥탑방... 나의 세계. 악몽이 맨 처음 시작되었던 곳. 저 곳 이다... 저기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빌어먹을 악몽도... 악몽과 엉키어 계속되는 살인도.. 지겹도록 내리는 이 장마도... 나의 세계. 나의 악몽이 시작되었던 곳. 바로 저 옥탑방에서 끝내야 해. 처음에... 나의 발은... 아주 느릿하게... 질질 끌리듯 움직이다가.. 점점 빨라진다. 힘이 들어간다. 과연.. 저기서 무엇을 어떡해 해야 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가야 만 해. 모든 것의 끝은 저 옥탑방에서 끝내야 한다. 말하고 있어. 저기로 가야 한다고.... 내 속에 잠들어 있던 감각이 눈을 뜬다. 그 것이 다른 나머지 오감들을 지배한다. 나는 다른 세계를 보는 눈을 떴다. 그것은 현실 저 너머의 것을 본다. 실재하는 모든 것의 뒤에 숨어... 늘 눈만 반짝이고 있는 또 다른 세계. 이제 내 발을 달리고 있다. 성큼성큼 계단을 두 세 개씩 뛰어오르며.. 몇 번이고 넘어져 계단 모서리에 머리를 박을 뻔한 아찔한 순간을 넘기며.. 떨리는 손으로 화분 밑을 더듬어 열쇠를 찾아 옥상의 문을 열어 젖혔다. 뿌연 장막과도 같은 빗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옥탑방... 작은 창은 애꾸눈과 같고... 시커먼 문은.. 마치 쩌억 벌리고 있는 입과 같다. 그 문안에는 화염으로 불타오르는 악마의 세계가 날 기다리고 있을까? 피를 흘린 채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 지훈이의 얼굴을 손에 든 채... 깔깔거리는 악마가 날 비웃고 있을까? 꼬리는 정말 있을까? 머리에 정말 뿔 두 개가 있을까? 세 개는 안돼? 문이 일그러지며 나에게 속삭인다. < 돌아온 것을 환영해 > 그래... 이 빌어먹을 악몽 속으로 내가 돌아왔다. 이 곳은.. 더 이상.. 나의 옥탑방이 아니다. 예전에 꿈에서 보았던 악몽의 실체. 독으로 가득 찬 비는 꽃들을 녹여버리고... 하얗게 번뜩이는 강렬한 번개는 땅을 태워버리는... 모든 것을 갉아대며 삼켜 버리는 저 끔직한 잿빛 구름.. 나는... 나의 악몽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열쇠를 들어 문을 열었다. < 돌아온 것을 환영해 >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악마가 웃고 있는 화염의 지옥이 아닌... 썰렁한 방 안..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뭔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제는 지워져 가는 지훈이의 흔적들 말이지. 지훈이가.. 말끔히 씻어놓은.. 그릇들.. 깨끗이 닦아 놓은 바닥... 바로 여기서 너와 웃고 이야기했는데............ " 이제 어떡해 해야 해!!!" 네 그 환한 웃음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 알려 줘!! 여기서 뭘 어떡해 해야 하는 거야!!!" 너를 처음으로 나의 세계에 들여놓았는데.......... " 도대체 어떡해 해야 하는 거야!!!!" 대답하지 않는다... 어째서 말해 주지 않는 거야... 알려 줘.. 알려줘야 내가 뭘 하든지 말든지 하지... 알려 달란 말이야!!!! " 빌어먹을!!! 빨리 대답해!!!" < 멍청하긴... 이미 알고 있잖아. 너는 > 고개를 돌리니... 책상에 얌전히 박혀 있던 의자가.. 그 말라빠진 앙상한 네 다리를 뒤뚱이며 나에게 걸어온다. " 내가 뭘 알고 있다는 거야?" < 너는 이미 알고 있어. 할 용기가 없으니까 아예 모르는 척 하는 거야 > 건방진 자식. 다리 하나를 등받이 위로 올리며 잘난 척을 한다. " 무슨 짓이든 할거야!! 지훈이를 구할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 < 넌 그 무슨 짓을 이미 알고 있다니까 > 나는 광분한 맹수처럼 의자를 향해 달려들어 그것을 집어들고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의자가 깔깔깔 웃어대며 벽에 부딪힌다. 다리 하나가 부러지며 창문을 박살낸다. < 와장창 > 어때? 다리 하나 부러진 기분이.... 방바닥에 흩어지는 유리 조각들. 투명하고 섬뜩하리 만큼 날카로운.... < 이미 알고 있어 > 그래... 이미 알고 있었어...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어... 일그러지며 나에게 말을 건네던 문도.. 나에게 걸어오던 의자도... 내 머리 속에서... 나를 이끌던 목소리도... 모두 나의 환상이다... 내가 만들어 낸 환상이다... 환상을 만들어 내며 내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야. 그 녀석에게 모든 책임을... 원망을... 남겨 놓고서... 달아나고 싶었던 거야... 일이 잘못되면... 내가 아닌.. 너의 책임이다... 라고 말이지.. 그렇지만... 내 속에 숨어있는 너 역시.. 나의 모습... 나의 의지로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오로지 나의 의지만으로.... 나는 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니 알고 있었다... 일어나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소리쳤을 때... 이미 그 때부터 알고 있었어...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을 말이지.. 나는 천천히 걸어가... 깨어진 유리 조각 앞에 우뚝 섰다. 시간이 없다... 악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번엔 악몽으로의 초대가 아닌... 스스로 불청객이 되어... 침입해야 한다... 자야 해... 하지만... 이 짧은 시간내에.. 어떡해... 잔단 말인가...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살 시간은 없다... 이렇게 벌떡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흥얼흥얼 꿈나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야 해... < 정말로 할 수 있어? > 내가 묻는다.. " 그래. 할 수 있어."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려온다. 떨리는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다. 나의 가슴도.. 나의 머리도.. 나의 온 몸이 떨리고 있다. < 정말로 할 수 있어? > 내가 다시 한번 묻는다. " .............................그래." 한참 만에 나온 대답은... 떨림이 없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중... 큰 것을 하나 집어들었다... 할 수 있어... 하지 않으면 안돼... 왜냐면.. 왜냐면.. < 이 방법이 지훈이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 그래. < 나는 지훈이를 사랑하니까 > 그래.. < 그러니까... 나는 자야 해. > 그래... 그래... 네 말이.. 아니 나의 말이 맞다.. 나는 자야 해.. 처음 여기서 악몽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마지막도 여기서 악몽의 끝을 내어야만 해.. 모든 것은.. 내가 그 시작이고.. 내가 그 끝이다.. 내가 그 시작이고.. 내가 그 끝이다... < 쯔으으으으윽 > " 으윽." 아...프다... 무척이나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의 것이 된 것처럼... 내 마음은 극도로 차분해져서.... 가라앉아... 가라앉아... 나의 몸도 가라앉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 몸을 채우고 있던... 따뜻한 체액이... 흘러내리고 흘러내려... 내 팔과... 내 몸을 적시고... 바닥을 흐른다... 나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한다. 손목이 아리다.. 팔이 통채로 빠져나가는 듯 하다. 극심한 고통.. 빠져나가는 내 피의 압력 탓일까.. 손목을 물끄러미 쳐다보니.. 신기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내 몸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나의 피가... 바닥 위를 흐른다... 자자... 자자... 잠을 자자... 빌어먹을 악몽 속으로 침입하기 위해... 훵한.. 나의 방 천장에 뭔가가 어른거린다... 잠이 들고 있다는 신호다.. 반갑구나.. 나의 악몽아... 미치도록... 반갑구나... " 강지훈... 정신이 좀 들어? 뭐야.. 왜 이렇게 비실거려? 끼끼끼끼끼." 내가 입가를 삐죽삐죽거리며 중얼거린다. 키키키키키키 뭐야? 그 태권도 검은 띠는 돈 주고 샀냐? 왜 이렇게 비실거려? " .................미친 놈."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지훈이 중얼거린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선 채.. 벽에 기대어 균형을 유지한다. 반쯤 무너져 있는 벽들.. 즐비한 철골... 각목들.. 시멘트 푸대... 아.. 여기는 공사장인가? 몰라서 물어? 골목에 숨어있다가 들고있던 벽돌로 저 녀석의 머리를 후려치고는 기절한 놈을 여기까지 끌고 오느라고.. 어깨가 다 뻐근하잖아. " 내가 네 뒤를 쫓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지? 내가 얌전히 내 방에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어?" " .................미친 놈." 끼끼끼끼끼. 네가 할 줄 아는 말은 그 말 뿐이야? " 설마 설마 했지만... 네가 눈치 까고 있을 줄을 생각도 못했다. 야. 지훈아.. 왜 그렇게 몸이 묵직하고 말을 안 듣는지 궁금하지 않아?" " ...................." " 궁금해? 왜냐면.. 그 꿀꿀이 죽에 내가 수면제를 탔거든. 끼끼끼끼끼." 멍청한 자식. 내가 만든 걸 뭐라구? 꿀꿀이 죽이라고? 그럼 그거 맨날 잘도 마셔대는 나는 그럼 돼지 새끼란 말이냐? 내가 각목을 들어 지훈이의 몸을 후려치자 그가 신음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는다. 내가 돼지 새끼야? 응? 내가 돼지 새끼냔 말이야! <퍽!> <퍼억!> 나의 발이 그의 배를 파고드는 느낌이 소름끼치도록 즐겁다. " 사실.. 나는 너보다는 은우가 마음에 드는데 말이지.. 배가 불러서 못 먹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서운했는 줄 알아?" " .................." 내 발이 자동으로 움직여. 끼끼끼끼. 네 몸을 후려차고 짓밟고. " 그 곰돌이 머그잔에만 수면제를 안 탔지. 끼끼끼끼.. 설마 니들이 그 깜찍하고 귀여운 머그잔을 집어들겠어? 차라리 안 먹고 말지." " ..........머리 한번 기차게 돌아가는군." 오호~ 주둥아리를 씨부렁 댈 기운은 남아있구만. " 너희들 나가고 난 뒤에 뒤를 밟았지.. 역시 너희들.. 그런 사이였더구만. 기분 좋았냐? 응? 강지훈. 은우랑 해봤어? 같이 자봤어? 여자랑 자는 것보다 기분 더 좋니? 남자들끼리.. 더러운 새끼들. 사랑 좋아하시네. 이 쓰레기 같은 놈아." " .......쿡. 그래.. 사랑이다. 네가 더럽다고 지껄여도 나에게는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다. 그러는 너는 사랑해봤어? 남자는 그렇다쳐도 여자를 사랑해 봤어? 사랑해서 부서질까봐 사라질까봐 마음 졸이며 같이 자 봤어? 아니면 강간한거야? 더럽다니? 여자애를 강간하고 죽이고.. 죽은 시체를 또 강간하는 너는 어지간히 깨끗한 자식이구나. 쿠쿠쿡..." 이 C8 것이 주절주절 대면서 웃어? 네가 지금 내 앞에서 쿡쿡 거리며 웃어? 몸을 들썩이며 지금 웃어? " 이 새끼가!!!" 네가 피를 부르는 구만! " ........족제비처럼.. 골목길에 숨어서... 내 머리를 후려친 다음... 이 외진 공사판으로 끌고 온 이유는.. 한가지겠지... 그래.. 각오는 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각오는 했지... 각오하고.. 너를 찾아간 이유는...." " 그래. 씨부렁거려 봐. 어차피 죽을 건데 말야." " .........너... 너 왜 이런 짓을..." 지훈이가 고개를 들었다. 흘러내리는 피 사이로.. 눈동자가 까맣게 빛난다. 재수 없어. 재수없는 눈깔.. 맨 먼저 너의 그 눈깔부터 후벼 파주마. " 뭐?" "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내가 아는 너는... 그냥.. 활기차고.. 밝은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내 친구였는데... 성혁아...." " ........" 친구 좋아하시네.. 웃기고 자빠졌네... 나에게 친구 따위는 없어. 그냥 학교에서 몇몇 녀석이랑 키득거리며 농 주고 받는 게 학교 생활에 도움을 주니까 한 짓이지. " 내 친구는 동이 뿐이야." " ....동이?" 지훈의 눈썹이 치켜올라간다. 저것도 재수없어. 네가 지금 무슨 탐문 수사하는 형사인 줄 알아? " 어쨌든.. 이제 다 지껄였어? 빨랑빨랑 네 놈 해치운 뒤에 은우한테 가 봐야 한다구. 끼끼끼." 나는 각목을 멀찌감치 던져버리고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익숙하고 차가운 손잡이를 막 잡는 순간. " 으아아아!!!" 갑자기 녀석이 투우사에게 달려드는 검은 황소처럼 맹렬하게 나에게 돌진했다. " 크억!" 이 망할 새끼. 이 놈 저 놈 할 것 없이 무작정 덤벼드는 것은 두 놈이 똑같잖아!!! 미친 듯이 달려드는 지훈의 어깨에 배를 받혀 그만 바닥에 나뒹굴었다. 우악! 시멘트 바닥에 부딪힌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프다. " 뭐가 어째? 누구한테 간다구?" 이 개 같은 자식! 지난 번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그 표정을 짓고 있다. 저승사자 같이 험상궂은 얼굴말이야. 쉴 새없이 흘러내리는 피 때문에 그의 얼굴이 더 섬뜩하게 느껴졌다. 아주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하다. 좀 전까지 찍 소리도 못하고 얻어맞던 주제에 갑자기 산삼을 쳐 먹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수면제를 통채로 쏟아 붓는건데!!! 이 무지막지한 놈은 지 발로 내 왼손을 짓밟으며 주먹질을 해댄다. " 이 미친 녀석아!! 미쳤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거냐!!" 젠장할... 얼굴을 집중적으로 쳐 대는데 내가 대답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 하냐? " 성혁아! 성혁아!! 도대체 너 왜 이렇게 된거야!" 녀석이 주먹질을 멈췄다. 빌어먹을... 이왕이면 내 팔을 짓누르는 네 녀석의 발도 좀 치우지 그래. "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궁금해?" 끼끼끼끼끼.. 오른손바닥 안에 느껴지는 깔깔한 모래들.. " ........" " 네 눈에는 내가 미친 놈으로 보이겠지? 하긴 정상이라고 누가 그러겠어? 도끼 들고 사람 장작 패듯 찍어대는 내가 정상으로 보일 리가 없지. 그렇지만.. 다 이유가 있는거야...." " ..........이유 좋아하시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봐... 끼끼끼끼.. 네 눈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걸? 네 주먹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 걸? " 너라면... 이해해 줄 수 있을거야... 내 친구라면 말이야." " ................"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혼신의 연기를 다해서 말이지.. 그리고 고뇌에 찬 얼굴에 주먹 쥔 오른 손을 가져가는 척 하다가.... " 우윽!" 녀석의 눈에다가 쥐고 있던 모래를 던져버렸다. 지훈이 비틀거리는 틈을 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녀석을 밀어버리고 벌떡 일어섰다. " 이유? 이유? 게임이니까!!!" 나는 바닥에 쓰러진 지훈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지훈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지만 도끼날이 쓰으윽 하는 유쾌한 소리와 함께 그의 팔뚝에서 피가 튄다. " 단순한 게임이라니까. 지훈아.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아? 멋진 장난감을 고른 다음에 얼마나 잘 망가뜨리냐... 하는 게임이야." 그가 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본다. 끼끼끼... 그러나 눈이 점점 풀리고 있는 걸.. 가물가물하지? 졸립지? 내가 수 없이 많아 보이지? 그러길래 왜 무리를 하고 지랄이야.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나마... 덜 괴로울텐데... 내가 다가가자 녀석이 비틀거리며 몸을 움직이려 하지만.. 역시... 동공이 많이 풀려있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한다. < 으드드득 > 내가 발로 그의 옆구리를 있는 힘껏 후려치자 뭔가 부러지는 듯한 둔탁한 느낌과 함께 그가 비명을 질렀다. " 아아악!!! 크윽... 하악.. 하악..." " 아파? 지훈아. 아프니?" 끼끼끼끼. 아픔때문인지 녀석의 눈에 잠깐 생기가 돈다.. 그 반지르르한 새까만 눈동자. 역시 기분 나빠. 철사로 후벼 파내 버려야지. " ....이성혁.... ......로... 가..... 줄....... 면.... ....이야..."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 뭐?" 그리고는 씨익 웃는다. " 뭐라고 지껄였어." " ........대로... 내가.... 면................ 이야..." 그리고는 또 씨익 웃는다. 제길 뭔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나는 어차피 만신창이가 된 채 옴짝달싹도 못하는 녀석이기에 마음을 좀 너그럽게 가지고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도끼로 그의 뺨을 두드리며 물었다. " 뭐라구?" 지훈이가 피식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 ....이대로 내가 죽을 줄 알면 큰 오산이야."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벽에다 나를 박아버렸다. 코가 화끈하는 것과 동시에 찐뜩하고 기분 나쁜 액체가 튄다. " 이 새끼가!!!" 도끼로 녀석의 골통을 부서버리려는 순간 목이 따끔하다. " ...움직이면 곤란해..." 지훈이 빙긋 웃는다. 피칠을 한 채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악귀같다.. " .... 네 목을 지금 뭐가 노리고 있는 줄 알아?" 나는 슬금슬금 눈을 움직여 목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젠장... 녹이 잔뜩 슬어있는 굵은 대못이 그의 손안에 들려있다. " ..........네 목에 박아 넣으면... 바로 죽지는 않겠지만... 쿡쿡... 파상풍에는 확실하게 걸릴 거야. 시간 차는 있겠지만.. 너도 어쩔 수 없이 내 뒤를 따라 와야 할 걸. 이봐.. 이 성혁.. 우리 같이 구경 가볼까? 저승 구경 말야..." 지훈이의 눈이 새까맣다. 그래. 이 미친 놈아. 네 눈을 보니 저승사자가 따로 없다. " 너 나한테 못질 하는 동시에 죽는 다는 건 알고 있지? 안 무서워? 응? 안 무서워? 이 자식아? 내가 죽으면 너도 죽어." " ......같이 죽으면... 적어도 네 놈이 은우를 해치지는 못할 것 아냐. 쿠쿠쿡.." 지훈이 키득키득 웃는다... 목이 찌르르르 하다. 이 미친 놈이 정말로 못을 내 목에 찔러 넣으려고 하고 있다!!! " 이..이 자식이!!! 너 정말 같이 죽으려고 작정을 했어!!!" " ...각오했다고 했잖아... 쿠쿠쿡... 내가... 네 놈이.. 은우한테... 곱게... 가게 둘 것.. 같아? .....응?" " 은우!! 은우!!! C8!!! 그 은우소리 좀 집워치워!!! 이 새꺄!!!" 못이 슬금슬금 내 피부를 뚫고 서서히 파고 든다... 아직까지는 살갗 조금을 뚫었을 뿐이지만... 제기랄... 언제 내 목을 꿰뚫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놈은.. 죽여야 겠다... 은우에게 못 가게... 사이좋게.. 지옥으로 가자구... 너는 무섭겠지? 그렇지? 쿠쿡... 그런데 난 말야... 네 놈이랑 같이 죽는게... 썩 나쁘지는 않거든... 은우에게 이미 말해 놨으니까...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한다고..." - 은우야. 사랑해 - - 널 위해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해 - - 그만큼 사랑한다구 - 이 바보 자식아!!! 죽긴 왜 죽어!! 날 두고 왜 죽어!!!! " 날 두고 죽긴 왜 죽냐니? 무슨 소리야?"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온다. 응? 지금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데? 순간 지훈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힘이 잔뜩 들어가 있던 그의 손이 느슨해진 기분이다. 이 때야!!! 바로 지금 네 머리를 산산히 조각내야 할 때!!!!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어... 뭐야.... 지금 자꾸... 누가 지껄이는 거야... 나야? 나인거야? " 시끄러.. 닥쳐.. 누구야.. 자꾸 떠드는게.." 누구긴 누구야... 나지... 몰라서 물어? 바로 나야.. 내가 떠들고 있다고.. 이 병신아.. 끼끼끼끼. 너와 같이 젊은 여자의 머리를 깨부수고. 너와 같이 할아버지의 가슴을 후벼놓고. 너와 같이 아저씨의 몸을 산산히 조각내었던... 그리고.. 소녀와 함께 너에게 짓밟히고 유린당했던.. 바로 나라구... " 뭐..뭐야... 머리 속에 울리는 이 소리는 도대체 뭐야.." 너라니까. 너라니까. 끼끼끼끼끼.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야. 바로 너이고 나이고. " .....은우니?" 갑자기... 지훈이가 나를 향해 묻는다. 피로 물든.. 너의 얼굴... 너의 얼굴이 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너의 그 검은 눈동자. 너의 그 우뚝 솟은 코. 너의 그 촉촉한 입술. 너의 각진 얼굴. 나는.... 네 모든 것이 좋아.... 지훈아.. 난 너를 ......해.. 알지? 알고 있지? 난 너를 사랑하고 있어... " 으아아악!!!!" 나의 입에서 겁에 질린 비명소리가 튀어나가며 왼손이 번쩍 치켜올라간다. 한번만!!! 한번만!!! 딱 한번만!!! 나의 꿈속에서 내 의지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 꿈 속에서는 절대로 나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하지만! - ......꿈을 꿔. 누구나 꿈을 꾸지...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었어.... 그 형체도 어렴풋한.. 나의 꿈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매번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나온다는 걸 말이야......... 분명 얼굴도 모르고... 어떤 때는 모습조차 다른 것 같은데... 느낌은 항상 같은 거야.... 꿈 속의 내 무의식은.. 어느 새 그 사람을 찾게 되고... 그건 더 이상 나의 꿈이 아니었지... 내가 꾸는 꿈이란... 오로지 나만의 세계이지만.. 내가 누군가의 존재를 자각하게 되면서 그것은 나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가 된거야.... - 지훈아.. 너는 그것이.. 무의식이라고 했지만... 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리고 나를 찾게 된 것은.. 너만의 세계가 아니라.. 나의 세계에까지 공유한 것은... 너의..... 의지다...... 한번만... 한번만... 내 꿈에서... 나의 의지가.... 실현되기를.... 움직여라. 왼손아. 그의 머리를 비껴나가도록. 움직여라. 오른손아. 그의 손을 잡고서... 그대로 잡아당겨 줘. 설사.. 그것이.. 내 마지막.. 의지가 된다하더라도.... " 컥..." 내 입에서... 묘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깡> 허공을 가르던 손도끼가.... 바닥에 떨어졌다. 지훈의 경악에 찬 시선이 자신의 손을 향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손을 붙들어... 그대로 목을 향해 끌어당긴.. 성혁의 손일 것이다... 해냈다.... 해냈다.... 지훈아.... 봤니... 내가... 성공했어... 처음으로.. 꿈 속에서... 내 의지로... 움직였어.... " .....................은우야?" 지훈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성혁이의 의식이.. 느껴지질 않는다... 아... 이제 남은 것은... 나 혼자 인가보다... 그리고... 나도.. 이제 ...가야 하나? 지훈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지훈아... 네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은데... 안 들린다.. 잘 안들려... 네 눈을 좀 더 보고 싶은데... 안 보인다... 잘 안보여... " ...어떻게.. 잠이 든거야? 어떻게 잠이 든거야?" 네가 극도로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느껴진다... 아... 이대로... 가면... 안 되는데... " 은우야!!!!!!" 지훈이가... 비명을 지르며... 내 몸.. 아니.. 성혁이의... 몸을 흔든다...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지 않아...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지 않아... 대신에...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잠이 와... 지훈아... 잠이 와... 이미.. 잠들었는데... 또 잠이 와... 그게 가능한 거니.... 꿈속에서... 또 꿈을 꿀 수 있을까... 꿈속에서 꿈을 또 꾸고.. 그 속에서 또 꿈을 꾸고... 어쩌면... 나의 현실은.... 다른 누군가의 꿈일지도 몰라.. 때로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르겠다... 간혹... 생각해 본다... 지금 나의 현실은... 다른 누군가의 꿈일지도 모른다고... 꿈은 언젠가는 깨는 법.. 꿈의 끝이 또 다른 꿈의 시작일지라도... 별로 두렵지 않아....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너를 놓쳐버리는 것... 너를... 놓쳐버리는 것... 지금처럼...... " 은우야!!!!!!!!"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데... 사랑하는데......... 그런데....................... 그런데............................... 잠이 와................. 지훈아.................. 너를 두고................................................. 잠이 와................................................... - THE END N. O. B - Nightmare Of Boy [Episode] # Episode # 푸른 강. 푸른 하늘. 세상이 온통 푸르다.. 눈이 시릴 만큼 파란 세상. 참으로.. 아름답다... 한참 눈을 감은 채 서 있으면... 나까지 파랗게 물들을 것만 같아.. 그리고... 그 푸른 강 맞은 편에... 누군가 서 있다... " 엄마?" 엄마다.. 엄마가 하늘거리는 푸른 옷을 입고..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예전처럼.. 그 온화하고...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보고 서 있다... " 엄마!!!" 엄마.. 보고 싶었어.. 왜 나 두고 먼저 가버렸어요.. 내가 엄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은우가 엄마 얼마나 그리워 했는 줄 알아요? 나는 파아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은 강에 풍덩 들어갔다. 무척 차가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매우 따뜻하다.. 엄마의 품처럼.. 그리고 그 누군가의 품처럼... 그 사람은... 누구? 기억이 나질 않는다... 괜찮아... 엄마에게 가면 돼.. 엄마한테 가면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늘 행복할 수 있다... < 아직은 아니야 > " 엄마? 아직은 아니라뇨?" < 아직은 아니야. 은우야 > 엄마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으신다. < 아직은 엄마한테 오면 안돼 > " 싫어! 엄마한테 갈거야!! 엄마가 보고 싶었단 말이야! 엄마가 그리웠단 말이야! 엄마한테 갈래요!! " < 아버지를 두고 엄마한테 올거야? > " 아버지 따위는 상관없어! 나 없어도 그 여자랑 행복하게 잘 살텐데 무슨 상관이야! 엄마한테 갈래요!" < 은영이를 두고 엄마한테 올거야? > " 은영이는 강한 애니까 나 없어도 씩씩하게 견뎌낼 수 있어요!! 엄마한테 갈래요!" < 그럼.. 그를 두고 올 수 있어? > " 누구요?" < 그를 두고 엄마한테 올 수 있어? > " 엄마... 엄마가 누굴 말하는지 은우는 모르겠어요. 엄마한테 갈래요..." 갑자기... 가슴이 아려온다.. 뭔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두고 온 듯한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아무 것도 없다.. 무서울 정도로 훵한 세상.. 텅 비어 있는 세상.. 기다리고 있는 것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는 그 곳... 저 곳으로 돌아가기 무서워... " 엄마. 나 저 곳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말아요. 나 혼자 저기서 못 살아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 누가 혼자야? > 엄마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 저기가면 나 혼자예요. 언제나 나 혼자라구요." < 그 사람이 들으면 섭섭해하겠다 > " 누구요? " 나는 또 다시 뒤를 흘끔 돌아다 보았다. 뭔가.. 정말로.. 중요한 것을.... 두고 왔나 보다... 아니... 중요한 사람이었던가? 갑자기.. 그 아무것도 없었던 그 훵한 공간에... 누군가 서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섭다... 엄마에게 가고 싶어... <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엄마한테 오면 안돼.. 아주 나중에...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때 와야 해...> 자꾸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신경이 쓰인다... 또 다시 뒤를 흘끔 돌아보니.. 좀 더 형체가 분명해진 사람이 서 있다.. " 엄마... 뒤에 누가 서 있어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웃기만 하신다. 그러더니.. 그 쪽으로 가라는 듯 손을 내저으신다. " 엄마.." 나는 강을 향해 한 발 내딛었다가... 다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아주 중요한 사람을... 두고 그냥 왔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뒤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데.... 그 사람이 불러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데... 내가 안오면.. 슬퍼서 죽을 것처럼.. 나를 부르는데... 이대로 엄마에게 가 버리면.. 뭔가 크게 잘못을 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굉장히 후회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 엄마... 저 사람이 자꾸 나를 불러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웃기만 하신다. 하지만 좀 더 손을 크게 내저으신다. 어서 빨리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 엄마... 나 가야겠어요.. 저 사람한테 가야겠어요. 가도 될까요? 갔다가 다시는 엄마 못 보면 어떡하죠?"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꼭 여기로 오게 되어 있어... 하지만 은우 넌 아직 아니야. 올려면 아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와야 해 > " 정말... 정말 엄마 다시 볼 수 있는거죠?" < 물론. 은우가 다시 오면 엄마가 제일 먼저 기다리고 있을게 > " 약속했어요. 엄마. 그럼.. 그럼.. 나 저 사람한테로 갈래요. 가서 그만 좀 애타게 부르라고.. 엄마한테 안 간다고 해야겠어요." 나는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 엄마도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엄마와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을 알지만. 언젠가 반드시 엄마에게 돌아올 수 있을테니까. 마음이 무겁지 않다. 웃으면서 돌아서야겠다. 엄마도 웃으면서 나를 보내주니까. 아주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돌려보내니까. " 엄마. 안녕!" <은우도 안녕 > 나는 뒤돌아 섰다. 아구. 정말 애간장이 녹도록 불러댄다. 뭐가 저리도 애가 탈까. 누가 죽기라도 한 것처럼. < 은우야. 은우야.. 은우야... > 알았어.. 나 지금 간다니까.. 그만 좀 불러라.. 듣는 나까지 속이 다 탄다. < 은우야. 은우야. 은우야. > 그러고보니..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다. 굉장히 듣기 좋다. 낮고 울림있는 멋진 목소리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으니까.. 갑자기 떠 오르는 사람이 있다. 먼저.. 눈동자가 떠오른다. 까만 밤처럼.. 포근하고.. 깊고... 따뜻한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 사람이 누구더라.. < 은우야. 은우야. > 알았어. 지금 가잖아. 내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이윽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하도 불러대서 빨리 뛰어가야겠다. 그리고 달래주어야겠다. 나 어디 안 간다고. 내 곁에 있을거라구. 난 늘 네 곁에 있을거라구. 지훈이.. 네 곁에.. 늘 있을거라구... 그래... 당신이 누군지 알았다.. 기억이 났다.. 엄마에게 가는 것을 포기할 만큼.. 나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바로 너였어. 응. 바로 너였어. 지훈아. 난 너를 사랑해. 지훈아. 지훈아. 지금 너한테로 돌아가니까.. 이제 그만.. 울어.. 시야가.. 흐릿하다.. 빡빡하면서 투명한 막을.. 눈동자에 억지로 끼워 넣은 듯 하다.. " 은우야. 은우야.." 그만 좀 불러..... 라고 말하려는 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입안이 말라있다. 아니 마른 정도가 아니라.. 고무막을 혀에 다가 씌어 놓은 것 같다. 으... 물 먹고 싶어 미치겠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희끄무레 한 것이 눈에 띈다. 눈을 몇번 깜빡이니까.. 그제야 뭔가 제대로 보인다. 아.. 눈이 아프다.. 세상에... 난 아직... 꿈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일까? 창문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 아주 새파란 하늘. 손을 뻗으면 손에 파란색의 물감이 흠뻑 묻어 나올 것만 같이 아주 파아란 하늘이 보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디 푸르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랗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는 사람이 보인다. 청승맞게.. 왜 질질 짜고 있는 걸까.. 차림새도.. 청승맞다.. 머리는 하얀 붕대로 칭칭 감겨져 있고... 팔 한쪽도 역시 붕대가 두텁게 감겨 있다. 게다가... 옆구리 부분도 뭔가 부목 같은 것이 덧대어진 채 역시 붕대로 감겨 있다. 환자복 웃도리는.. 그냥 폼으로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양이다. " 은우야.. 은우야..." 아씨... 나 일어났다니까.. 잘려고 해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 손을 들어서 좀 말려보려고 하는데 팔이 빠지는 것처럼 아프다. 눈동자를 또 데굴 굴려보니.. 으윽.. 손목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고.. 머리 위에는 수혈을 위해 피가 가득 담긴 비닐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다. 아.. 아... 이제야... 알았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 내가.. 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지를... 그리고 네가 왜.. 미이라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지를.. 하늘이.. 눈부시게 푸르다. 장마가 끝났다. 악몽도 끝났다. 그리고 나는 네 곁으로 돌아왔다. 만약.. 강을 건너서.. 엄마에게 갔다면.. 나는 죽도록 후회했을 거다. 음.. 죽어서도 죽도록 후회한다는 말을 해도 되는 걸까? 엄마에게 물어 볼걸 그랬다. 나중에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물론 아주아주 나중에 말이지. 엄마 말대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말이야. " 은우야.. 은우야..." 지겹지도 않냐.. 귀에 딱지가 앉겠다.. 하지만... 기쁘다. 기뻐서 지금이라도 발딱 일어나 너를 부둥켜안고 병원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싶을 만큼 기쁘다. " 그.....그만 좀... 불러대..." 말한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무슨 괴물의 신음소리 같이 갈라져서 튀어나온다. 완전히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구만. 그래도.. 너라면.. 알아들을 수 있지? " ..........." 지훈이가 얼굴에서 손을 떼고서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허억.. 얼굴이.. 말이 아니다. 무슨.. 유령같다... 너무나 초췌해서... 마치 다른 사람 같다... 도대체... 너는 얼마나 여기서 나를 불러댄거야? 밥도 안 먹었니? 잠도 안 잤니? 나는 도대체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던거야?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랴. 너에게 돌아왔으니까.. 이제 모든 것이 끝났는데.. " 내가... 멋들어지는 말.. 하나 ... 해볼까?" 크윽.. 이렇게 밥맛 떨어지는 목소리로..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한스럽다.. 물이라도 한컵 들이키고 말하면.. 제 목소리가 나올테지만.. 어서 빨리 말하고 네가 지어줄 표정을 보고 싶어. 네가 대답할 말이 듣고 싶어. " 너는 ....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래.. 나는 말야. 지훈아.. " 나는... 너를 두고... 죽을 수 없을... 만큼.. 사랑해.... 어때.. 멋있어?" " ...................응. 멋있어... 그 말이... 훨씬 멋있어..." 지훈이의 목소리가 떨린다. 하아.. 한숨이 다 나오네. " 물 줘. 목 아파." 지훈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을 자기 혼자 벌컥벌컥 마셔댄다. 아니.. 물 달라는 건 난데 왜 니가 마시냐? 억.. 아니나 다를까.. 이 놈이 또 이 짓거리를 하는구만.. 지훈이의 입술 사이로 아주 시원한 물이 내 입안으로 들어온다. 아주.. 달콤하다. 꿀이라도 탄 걸까. 쿠쿠쿠. 시원하다. 지훈이가 입을 떼고서는... 내 입술과 입가에 흘러있는 물을 엄지로 쓰윽 닦아내고는 자기 입술에 문지른다. 이제는... 그런 모습이.. 귀엽다.. 허억.. 귀엽다라니.. 그럼.. 뭐라구 할까? 사랑스럽다는 어때? 음... 아직 혼수상태에서 덜 깨었나 보다. " 물 또 줘." 확실하다. 나는 아직 혼수상태가 분명해. 아.. 눈부시다. 환하게 웃는 지훈이 어깨너머로 보이는.. 맑은 하늘이 눈부시다. 언젠가.. 장마는 또 올 것이다. 언젠가.. 악몽도 또 꾸게 될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아. 왜냐면.. 지훈아. 너랑 있으니까... 파란 하늘이.... 내 가슴에 녹아든다. 장마는 한 순간이다. 맑은 날씨가... 훨씬 더 많다... 악몽도 한 순간이다. 좋은 꿈이... 훨씬 더 많다... 이제까지 내가 겪은 괴로움의 시간은... 앞으로 내가 겪을 행복한 시간을 위해... 미리 경험해 둔 것이다... 나는... 기분이... 무척 좋다.... 나는... 무척... 행복하다.... 왜냐면... 지훈아... 너와 함께니까...........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언제나 너와 함께니까................ 너와 함께니까.... " 엄마. 또 나가요?" < 짜악 > 여자의 손이 아이의 뺨을 후려갈겼다. " 엄마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내가 뭐라고 하라고 했어!" " 누나요." 아이는 새빨개진 뺨을 어루만지며 훌쩍였다. 여자와 쏙 빼 닮은 아이는 주눅이 든 얼굴로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보기에는 연약하고 청순하게 생긴 젊은 여자가 독기 어린 눈으로 아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 지워버렸어야 했는데... 돈이 없어서 낳아버렸더니.. 완전히 애물단지야." 아이는 고개를 푹 떨구며 흐느꼈다. " 하여간 너 때문에 내가 못 살아. 나가서 죽어버리든지 해버리면 속이 얼마나 시원할까." 아이의 엄마라고 보기엔 너무 젊은 여자는 아이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말했다. " 네가 그 공원에 하도 나가자고 새벽부터 설쳐대서 나갔다가 그 끔찍한 것까지 봐야 했단 말이야. 이 애는 마가 씌웠나? 전부 네 탓이야!" " 흐윽.. 미안해요. 누나." " 어쨌든 그 덕에 멍청한 형사 녀석 하나 건졌으니.. 아이 참. 형사는 돈이 없어서 싫은데.. 혹시 알아. 그래도... 뇌물 잔뜩 받은 사람이라 돈 좀 꽤나 있을지.. 강력계 형사가 뇌물을 많이 받을려나? 그 사람 성질머리 보니까.. 대쪽같던데.. 그래도 그게 어디야. 홀아비에 자식이라고는 여자애 하나 달랑 있으니.."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흥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이 옷 저 옷을 몸에 걸쳐보기 시작했다. " 야! 나 오늘 손님 많이 받아야 하니까 밤에 못 들어와! 밥 알아서 챙겨 먹던지 말던지. 차라리 굶어 죽던가." 아이는 비틀비틀 멍한 눈으로 지저분한 쇼파에 드러누웠다. " 그래. 아예 쳐 자빠 자라. 그 편이 속 시원하다." 식탁 의자위에 걸쳐진 스타킹을 가지러 나온 여자가 쇼파위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 자야지.. 오늘은 조금 일찍 자야지.." 아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꿈에서 재미있는 게임하고 놀아야지..." 혼이 아예 빠져 버린 듯한 아이의 표정은... 소름끼칠 정도로 멍하다. 그리고... 초점없는 눈동자. 그러나... 섬뜩할 정도로 차갑다. 유리알처럼 차갑고 무감각하다. < 따르르릉 > 전화벨이 울리자 여자가 후다닥 튀어나와 전화를 받는다. " 여보세요? 아.. 김형사님이세요. 아... 예." 앙칼졌던 좀 전의 목소리는 어디 가고 수줍고 다소곳한 목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 예. 동생은 괜찮아요. 물론이죠. 저도 괜찮아요. 어머. 그래요? 사건이 해결났다니 다행이예요. 세상에.... 범인이 고등학생이요? 끔찍하기도 해라... 죽었나요? 예? 그래도 범인이 죽지 않았으니 다행이예요... 아무리 살인마라고 해도.. 죽는 것은 싫어요..." " 이번 주인공은 너무 일찍 잡혀서.. 재미가 없었어... 좀 더 똑똑하고 힘센 주인공을 골라야지." 아이는 멍한 눈으로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빗물이 새어 적갈색으로 얼룩진 모양들이.. 마치 피가 번진 듯 하다.. " 어머... 정신이 이상하다니.. 그럼 정신병원으로 가는거예요? 맙소사... 게임이라고 생각했다니.. 사람 죽이는 것이 게임이라니 너무 끔찍해요.. 역시 요새 아이들은 게임을 너무 많이 해서 큰일이예요." " 잠이 안오네... 자장가를 불러야 겠어..." " 형사님. 따님도 전자오락 게임 많이 못하게 하세요. 예. 예. 물론이죠. 우리 동이는 전자오락 게임 안 좋아해요. 하라고 해도 안 한답니다." " 악어떼를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지나서 가자~ 늪지대를 지나서 가면~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아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흥얼거렸다. 계속. 계속. 스스로 잠들 때 까지. 악어떼를 지나서 가자. 엉금엉금 지나서 가자. 늪지대를 지나서 가면. 악어떼가 나온다. 악어떼. .......................................저기요. 누나... 내 자장가가 들리는.... 누나.. 예... 누나 말이예요.. 나하고 게임해 보지 않을래요? 괜찮아요. 꿈에서 하는 게임인걸요... 끼끼끼끼끼끼끼끼끼끼끼끼끼끼... - THE END OF EPISODE - ################################################################################ 안녕하세요. 연야린입니다. 드디어... 드디어... 노브가 끝이 났네요. 뭐라고 말 할 수 없는 심정. 연야린이 노브를 처음으로 올린 날이 6월 24 일 이었습니다. 19 일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고.. 너무나 고마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의 벅차는 가슴에 그 분들에게 일일이 감사함을 표시하고 싶지만... 이 말로 대신할까 합니다. - 연야린은 그저 노브를 쓴 것 외에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 노브가 이렇게 꾸준히 올라올 수 있었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님들의 공이십니다. 특히나 읽어주신 분들. 외에도 추천 올려주신 분들. 연야린의 자양강장제 감상을 올려주신 분들의 공이 더욱 큽니다. 노브는 순전히 님들의 공으로 완결된 소설입니다. 연야린의 정신적 지주이신 라복 또는 잔혹 소녀님께는 더욱 각별한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님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고 좋은 꿈만 꾸시길 진심으로 비손합니다. 그럼 연야린. 벅찬 마음.. 숨 고르며 이만 물러갑니다.